[미국 교환일기 5]
비행기가 뉴욕에 착륙하자 꼬리 칸에서 누군가 Aclicia Keys의 Empire State of Mind를 재생했다. 흔히 뉴욕 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그 노래 말이다. 사람들은 모두 박수를 쳤고 나도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따라 했다. 뉴욕은 그런 곳이었다. 누군가에겐 꿈과 같은 곳. 뉴욕에 도착했다는 그 자체로 박수가 나오는 곳.
나와 친구는 뉴왁 국제공항에서 맨해튼에 위치한 펜실베니아 역으로 가는 열차에 탑승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서로를 처음 만난 기차처럼 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이 뒤 쪽 창가에 타 있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상상했다.
그렇게 펜실베니아 역에 도착해 개찰구를 통해 지상으로 나왔다. 맨해튼에 첫 발을 디디는 순간이었다.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고층 빌딩이 즐비해 있는 도로를 걸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악명 높은 뉴욕 지하철을 타고 숙소가 있는 Bronx까지 갔다. 기차역에서 숙소까지 가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뉴욕이라는 도시의 어두운 면들을 압축해서 볼 수 있었다. 뉴욕은 이전까지 살던 텍사스의 작은 도시와 많은 것이 달랐다. 사람들은 눈에 띄게 냉소적이며 개인주의적이었고 이기적이었다. 작은 것이지만 횡단보도를 지키고 지나가는 사람조차도 드물었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치안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한국의 지하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역에 들어가는 입구는 땅굴처럼 생겼고 눈에 띄지도 않았다. 역사에 들어가자마자 풍기는 암모니아 냄새와 선로에 쌓인 쓰레기들을 보면서 세계 최고라고 일컬어지는 도시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를 깨달았다.
다음 날 아침, 친구와 나는 센트럴파크로 향했다. 공원이 생각보다 거대하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는 밥을 먹고 다시 오기로 했다. 그러다 우연히 딸아이와 함께 있는 한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누게 됐다. 그녀는 20여 년 전 페루에서 왔으며 지금은 할렘에 살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간단하게 밥 먹을 곳이 있는지 물었고 아주머니는 마침 근처에 가는 길이니 식당들이 있는 곳까지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센트럴파크를 나와 횡단보도를 기다리고 있을 때 아주머니는 사진에 보이는 건물 꼭대기에 위치한 펜트하우스에 존 레논의 아내가 살고 있다고 말했다. 존 레논이 팬에게 살해를 당한 곳 또한 저 앞이었다고 덧붙였다.
페루 아주머니는 지금의 뉴욕이 20여 년 전 뉴욕처럼 부정적으로 변하고 있다며 사람들이 왠지 다들 화가 나있다고 말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Beef)>이 떠올랐다. 그녀는 우리가 방을 어디에 구했는지 물었고 우리는 Bronx라고 답했다. 아주머니는 위험한 곳이니 조심하라고 주의했다. 나는 마이애미의 '리틀 하바나' 보다 위험하냐고 물었고 그렇다고 답했다. 위험하다고 소문난 동네에 사는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하니 괜히 겁이 났다.
센트럴파크의 크기는 어마어마하다. 공원이 다 거기서 거기겠거니 생각하고 별 기대 없이 갔지만 오만이었다. 빽빽하게 있는 차가운 건물들 사이에서 햇볕이 내리쬐는 거대한 공원은 뉴욕 시민들에게 따스함을 안겨주기에 충분해 보였다. 어린아이부터 대학생, 신혼부부, 직장인들, 노인에 이르기까지, 센트럴파크는 인생의 축약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돗자리를 깔고 누워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가족들, 잔디 위에서 요가 수업을 하는 선생님과 수강생들, 벤치에 누워 책을 읽는 사람들.
가지각색의 사람들과 함께 같은 공간을 나누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타임스퀘어는 방송매체에 흔히 등장했다 보니 여기라는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밤에도 낮처럼 밝은 이곳의 거대한 전광판들은 잠깐만이라도 자신을 보라는 듯 일 초에도 몇 번씩이나 깜빡거린다. 삼성, 엘지는 물론이고 뉴진스에 정관장까지 한국 광고들을 여러 차례 볼 수 있어 반가웠다.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고 정신이 없어 오래 있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사진처럼 백 투 더퓨처의 타임머신 자동차와 주정뱅이 같은 과학자 아저씨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공짜는 없는 법. 이런 곳에선 정말 작은 서비스를 받아도 돈을 내야 한다. 내가 핸드폰을 들자마자 다가오는 저 아저씨의 얼굴에을 보면 돈이라고 써져있지 않은가.
뉴욕에는 유명한 미술관이 여러 곳 있는데 그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는 곳이 MOMA(Museum of modern art)와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이다. 메트로폴리탄은 조소 작품들이 많은 거 같아 비교적 더 관심이 가는 회화를 보러 MOMA를 갔다. 이곳은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의 근현대 미술 작품이 있는 곳이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MOMA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인데 해당 작품이 메트로폴리탄에 마침 대여를 가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잭슨 폴락, 앤디 워홀, 피카소, 모네, 백남준 등 거장들의 작품이 즐비해있어 재밌게 볼 수 있었다. 역시나 예술은 아는 만큼 보이구나 싶었고 현대 미술은 어렵다고 생각했다.
시간 관계상 2시간 반 정도로 빠르게 관람하고 왔는데 작품들 하나하나를 천천히 보고 싶다면 3시간은 잡고 와야 할 거 같다. 꼭대기 층부터 내려오면서 관람한다면 연대순으로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뉴욕에서 꼭 가고 싶었던 곳 중 하나가 록펠러 센터 전망대였다. 왼쪽 사진 제일 왼쪽에 높은 건물(서밋)이 비교적 최근에 생긴 전망대로 소셜미디어를 보면 대부분 저곳을 가는 것 같았다. 실내이기도 하고 사진을 찍는 공간이 잘 마련되어 있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유리 없이 맨눈으로 뉴욕을 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클래식을 따라가는 편이라 이곳으로 왔다. 여기서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앞으로는 뉴욕의 도시 경관, 뒤로는 센트럴파크 전체를 볼 수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정면에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보자마자 '역시 뉴욕은 뉴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영화들에서 나온 곳이다 보니 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언제 또 이곳에 와 볼까'하는 마음에 뉴욕 시내의 풍경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다.
뉴욕은 익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산업적으로 엄청나게 발전한 도시이며 모든 부분에 있어 대단한 도시임은 분명하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의 피뢰침처럼 뉴욕의 세계적 위상은 여전히 하늘을 찌른다. 하지만 동시에 뉴욕에 와서 미국의 자본주의가 얼마나 위태롭게 서 있는지, 이들의 대단함은 주변에 있으면서도 없는 거처럼 살아가는 수많은 헐벗은 이들을 무시하고 외면한 장면임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페루 아주머니는 4주를 일하면 2주는 방 값에 쓰고 2주는 식비로 쓴다고 한다. 뉴욕에 사는 평범한 시민의 현실이다. 숙소가 있던 Bronx에는 대부분 흑인과 히스패닉이 거주한다. 백인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저녁을 포장하러 간 맥도날드에서는 홈리스가 들어와 음식을 받은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며 다녔다. 다음날 저녁, 피자 가게에서 주문을 하고 기다리다 한 홈리스가 매장으로 들어와 음료수를 훔치다 점원에게 걸려 쫒겨나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빛이 전혀 없는 지하로 누군가가 들어가는 것을 봤다. 그런 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뉴욕의 아름다움은 흑인과 히스패닉 빈자들을 맨해튼 위쪽 할렘과 Bronx로 밀어넣고 프레임 아웃시킨 거짓된 사진에 불과했다.
세상은 이례 없는 평화와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과연 저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나는 세계 최고라는 도시를 여행하며 꿈을 꾸고 아이러니하게도 죄책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