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함이 사라졌다. "나랑 왜 결혼했어?"라는 나의 질문에 남편은 "엉뚱한 게 좋아서"라고 대답했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엉뚱함이 사라졌다. 그뿐인가? 귀여운 척도 사라졌다. 신날 때 추던 이상한 춤도 더 이상 안 추고, 맛있는 걸 먹고 짓는 이상한 소리와 표정도 사라졌다.
아니, 사실은 나의 내면의 전체가 붕괴했다.
사실은 신혼시절 아이를 갖지 않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갈수록 사람들의 마음이 병들고, 지구환경도 병들어가고 있지 않느냐며 희망이 없는 미래에 나보다 더 오래 살, 필연 나자신보다 더욱 사랑하게 될 인간을 탄생하도록 하는 것이 맞냐는 나의 말에 남편은 "그건 태어날 아이가 판단할 문제"라고 답했었다.
사실 나는 겁이 났던 것이었다. 용기 있는 남편을 따라가다가 아이가 태어났다. 부끄러울만치 힘들어했다. 아이를 둘, 셋 낳아 기르는 부모를 보면 절망감이 들었고,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젊은 세대들의 풍조를 마주할 때면 묘한 배신감이 들었다. 직업이 없고, 유행하는 옷이 없고, 화장으로 얼굴을 가리지 못하는 나는 나를 아주 많이 초라하다고 여겼다. 갓 태어난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직업, 옷, 화장 같은 사회적 욕구뿐만 아니라 잠자고, 밥 먹고, 화장실을 가는 아주 기본적인 욕구까지 아이보다 덜 중요한 문제로 미뤄야 하는 고되고 무거운 하루, 하루, 하루였다.
마트 유리창 속에 비친 내 모습이 아주아주 낯설고, 아무에게도 보여주기 싫을 만큼 미워서 유리창도 흘겨보았다. 그러던 중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중에 커다랑 사랑이 내안에 들어와버렸다. 미녀와 야수같은 사랑. 야수가 된 나를 사랑해 주는 미녀를 만난 것이다.
내 왼쪽 볼에는 아주 작아서 남들은 잘 보지 못하는 사마귀가 있다. 아이는 아침마다 눈을 뜨면 작은 손가락으로 그 사마귀를 누르며 "귀여워"라고 말해준다. 잠이 들 때면 "뽀뽀 좀 해줘야겠다"라고 와서 도무지 웃음이 참아지지 않는 귀여운 촉감의 입술을 내 입술에 맞춘다. 그러고는 "'아이 좋아'라고 해야지" 말한다. "아이 좋아"라고 말하면, "세 번 말해야지"라고 해서 웃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내가 없으면 울고, 내가 다시 나타나면 "엄마"라고 크게 외치며 달려와 안긴다.
아이를 낳기 전 나는 계속해서 겁을 먹고 있었다. 세상에선 직업이라는 옷으로, 그리고 진짜 옷으로 나를 가꾸라고. 그렇지 않으면 도태될 거라고 겁을 주었다. 그런데 아이는 나의 사회적 욕구, 기본적 욕구까지는 앗아가 놓고 선 "그래도 사랑해"라고 온몸으로 매 순간 말해주었다. 마법 같은 순간이라고 해야 하나? 오히려 나를 보호하려던 갑옷을 모두 벗어던졌을 때 세상을 향한 용기가 생겨났다.
그런 사랑에 한창 녹아내리고 있는 순간, 또 아이가 다시 말을 걸어온다. 그게 요즘인데, "엄마, 언젠가 내가 훨훨 날아갈 수 있게 천천히 엄마의 인생을 다시 찾아봐"
나를 모두 무너트려놓고선, 다시 나를 지으라고 한다.
그런데 결코 쉽지 않은, 아주 혹독하고 눈물 나게 행복한 이 과정이 나는 참 좋다. 무너질 땐 힘들었지만, 모두 무너져버린 나도 좋고, 또 앞으로 다시 지어질 나도 기대된다. 오랜만에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