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겨울의 끝자락은 유난히 따스했다. 우리는 연애시절부터 나누었던 생각들을 하나의 퍼즐로 차곡차곡 맞추고 있었다. 의사의 “이제 시도하셔도 됩니다” 이 짧은 한마디가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그해 봄 부푼 마음을 가득 안고 임신테스트기를 구입했다. 5년의 신혼생활을 뒤로하고 우리에게도 드디어 아이가 찾아왔다. 아직 임신이라는 아무런 근거도 없던 그때 미리 태몽까지 꾼 나는 살면서 몇 안 되는 설렘을 느꼈다. 남편과 임신테스트기에 두 줄을 확인하고 태명을 먼저 짓기도 했다. 임신 확인을 위해 처음으로 산부인과를 방문하던 날은 아직도 생생하다. 거뭇거뭇 한 초음파 상에서 딱 보이는 점하나, 그동안의 고생이 녹아내리는 환희였다.
결혼하기 전 서로가 원하는 앞으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남편은 아이 두 명을 원했고 나는 인생에서 ‘굳이 아이가 있어야 하나’ 싶었다. 험난한 세상에 아이를 낳아 잘 기를 수 있을까, 딱히 이유를 모르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남편과 단둘이 살아도 괜찮지 않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좀처럼 좁혀지지 않을 듯한 팽팽한 의견 대립은 의외로 쉽게 무너졌다. 당시에는 내가 남편을 너무 사랑했기에 아이는 잠시 미루기로 했다. 일단 결혼해서 생각해 보자며 하나만 낳자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막상 결혼해서는 누구도 임신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남편과 보내는 신혼생활은 행복 그 자체였다. 물론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 결혼을 했으니 잦은 다툼도 있었다. 그때마다 깊고 솔직한 대화를 하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우리가 더 단단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남편을 향한 믿음이 있었기에 나도 용기 내어 자연스럽게 임신을 떠올릴 수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의 아이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봤다. 남편은 자녀 한 명은 있어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으나 나에게 어떠한 강요는 하지 않았다. 고맙게도 오로지 내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줬다.
우리가 임신을 하려면 준비 기간이 필요했다. 내가 오랫동안 앓아온 질병 때문이다. 복용하는 약 중에 리튬이라고 있는데 태아에게 치명적인 심장기형을 유발해서다. 설상가상 내 주치의였던 C교수님은 다른 병원으로 가신다고 하셨다. 그동안 진료를 받으면서 한 번도 임신의 힘듦을 말씀해 주시지 않았고 도리어 적극적으로 임신할 수 있음을 말해 주셨다. 임신과 출산하기까지 이렇게 어러운 과정일지 미처 알지 못했고 남편의 조언대로 좋지 않은 이야기들은 찾아보지도 않았다. 어쩌면 임신과 출산의 어려움을 자세히 알지 못했기에 도전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교수님이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임신을 하기까지 약일 년의 시간을 약 조절하는데 흘러 보내야 했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나를 잡아주셨던 분이라 일방적인 통보는 나에게 큰 슬픔이었다. 감정에 복받쳐 한동안 울었지만 남편의 위로 덕분에 이겨냈다.
내 진단명은 F31.9 상세불명의 양극성 정동장애로 흔히 조울증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다. 조울증은 기분장애의 대표적인 질환이다.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는 것과 관련된 다양한 증상을 일으키는 조증과 울증이 독립적으로 또는 혼합되어 나타난다. 약을 꾸준히 잘 복용하면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다. 단, 임신을 하게 되면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임신을 하면 태아에 좋지 않은 약물은 복용할 수 없어서다. 윤리적인 문제로 임상실험은 많지 않다지만 적어도 임산부 금지약물 기준은 있다. 주치의와 충분한 상담을 통해 약을 줄이거나 다른 약으로 변경해야 한다. 리튬은 단약을 했고 임산부에게 비교적 안전하다는 쿠에타핀을 점차 복용했다. 감사하게도 이 약에 특별한 이상반응 없이 잘 적응하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약 조절만큼이나 또 다른 걸림돌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바뀐 S교수님은 조울증 환자의 임신에 걱정과 회의감을 가지고 계셨다. 나는 단 한 번도 내 질병으로 인해 임신을 못 하게 될 거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우리에게 교수님의 말은 상처와 비수로 돌아왔다. 그동안 질병을 앓으면서 많이 적응되어 타인의 부정적인 말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교수님의 자신 없어하는 실망스러운 말들에 어느새 나는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순간 너무 절망적으로 다가왔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답답함이 밀려왔다. 당장이라도 진료실 문을 박차고 나와 어디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교수님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조울증 환자는 전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건가요?” 물었다. 아직 시작도 해보지 않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희망이 끊어져 버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누구를 믿고 임신 준비를 해야 하나 교수님이 원망스러웠다. 남편도 울먹이는 말투를 하고 있었다. 남편은 간절하게 말을 이어갔다. “교수님 우리는 아직 시도도 하지 않은걸요?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아니지 않나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표정이었다. 우리의 지극한 마음이 닿은 걸까. 교수님은 다음 진료 때 너무 죄송했다며 최선을 다해 진료를 보고 내가 무사하게 출산을 하기까지 잘 도와주겠다고 하셨다. 이제부터는 교수님을 신뢰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진심이 통했는지 운 좋게도 아이는 한 번에 왔다. 아이가 계획대로 오지 않았더라면 준비 기간이 더 길어졌을 것이다. 조울증 치료에 가장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는 리튬을 먹지 않았음에도 임신기간 동안 비교적 기분 상태가 평온했다. 쿠에타핀으로 계속 복용했고 임신으로 인한 호르몬도 긍정적으로 작용을 해서 보통의 임산부보다도 안정적인 기분이 들었다. 수원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까지 홀몸이 아닌 임산부가 운전해서 가는 게 고단한 일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임신을 했다는 감격에 힘든 줄도 몰랐던 것 같다. 아이가 건강하게만 태어나기를 손꼽아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