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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Koo Jun 12. 2023

MBTI전문가회원이지만 MBTI로 말하는건 싫어요

공유와 개방


‘우리’라 부를 수 있는 조건 중에 여러 근거가 있겠지만, 취향도 그중 하나에 속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상대가 좋아하면 우리는 더욱 친밀함을 느끼게 되고 면면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며 내밀함을 키우게 된다. 공유가 먼저인 경우도 있거니와, 개방이 먼저인 경우도 있는데 이 둘이 모두 가능해야 ‘우리’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엄마, 아빠, 아내, 남편 등은 공유가 가능한 대상이어서 ‘우리’를 붙일 수 있지만, 동생은 어김없이 ‘내’가 붙어 개방은 가능하지만 공유는 불가능함을 선언한다. 취향도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것이므로 우리라는 단어보다는 ‘내’가 수월하다.


‘우리는 책을 좋아해. 나는 생각을 따라가며 마음을 읊조리는 내용의 책을 더 좋아해.’


이렇게 공유된 취향에도 개인적인 편향이 있는데 이를 개방하여 상대에게 표현하기란 여간 쉽지가 않다. 개방에는 에너지가 더 필요하다. 개방에 쓰이는 에너지는 평소 관계에서 중요시 여기는 신뢰, 안정감 등과는 다른 영역의 것 같다. 그래서 밀도 높은 관계임에도 취향을 개방하는 것은 언제나 주저하게 된다.


그림의 경우는 더욱 취향 공유가 어렵다. 비언어적 자극이 주는 모호한 끌림, 좋음을 언어로 표현하며 취향을 개방하고 공유하기는 내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미술관 관람은 혼자일 때가 편하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다.  

취향에 끌려 방문한 미술관에는 여러 관계들이 보였다. 주말이라 물리적 밀도가 높아 원치 않게 주변의 이야기들이 귀에 걸려왔다. 끌려온 듯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었고, 작품보다 동행인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도 보였고, 끊임없이 작품을 비판하고 해석하려는 사람 등 관계를 대변하는 다양한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 사이에 혼자인 나는 작품에 집중하다가도 가까이 들리는 목소리에 주의를 뺏기기도 했다. 아이와 함께 온 엄마는 아이가 좋다 하는 그림 몇 점을 토대로 아이의 취향을 ‘목가적’이라는 단어로 정의했고, 작품보다 ‘목가적’의 설명이 길어지고 아이는 그게 아니라 ‘알록달록이 좋다’고 하고 엄마는 다시 그게 목가적인 거야 하며 이야기의 꼬리가 설명에서 확언으로 이어지는 양상을 보였다. 아이는 더 이상 변호하지 않았고 엄마는 지속적으로 ‘그러니까 너는 목가적인 것을 좋아해.’라는 확언이 반복적으로 주어지자 옆에 있던 나는 참던 고개를 돌리고야 말았다.


순간 내 표정이 어떠했을지 짐작한다. 허나 언어적 표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니 어떻게 전달되었을지는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동선이 비슷해 근처에 있었으나 그 후 엄마의 말 수는 확연히 줄었다.




최근에 몸 담은 직장에서는 진단을 위한 임상적 검사사례보다 정신건강과 일상적응을 돕는 상담업무가 늘어 심리사로의 역량강화를 위해 MBTI성격유형 전문가자격 및 에니어그램성격역동검사 강사 자격을 보완했다.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니 역시 내 업과 삶에 대한 태도는 달라졌다. 짧게 요약하자면 나와 타인에 대한 이해의 각도는 넓어졌(으리라 기대한다)으나, 내뱉는 말의 질은 더욱 조심스러워졌고 양은 줄었다. (일하는 장면에서만 그렇다. 일터를 벗어나 개인적인 장면에서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말 많이’이다.)   


그날은 일정에 약간 시간이 뜨는 바람에 근처 작은 카페에 들러 몸도 식히고 머리도 식히려 독서를 했다. 작은 카페에 한 무리가 들어왔고, 내 앞 테이블에 앉았는데 그들은 앉자마자,

- 그러니까, 00 이가 I여서 그런 거야. 그래서 그렇게 지 맘대로 하는 거야.

- 아니야. I인데 생각이 없을 리가 있어? 생각 없이 행동하는 거 보니까 I는 아니야.

- 아니야. 내가 살아보니까. 나는 I랑은 안 맞더라고. 지 맘대로야. 완전.


그들은 그 자리에 없는 이에 대한 불만감을 표현하는 것이었는데, MBTI로 그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 같았고 관계를 위한 공유의 코드로 MBTI를 쓰고 있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잘못된 방식으로 MBTI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나는 E라서 00하잖아’라며 코드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는 모습까지 보였다.


아뿔싸.

흥미롭게 나의 주의를 끌던 책의 내용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MBTI의 코드를 운운하는 그들의 이야기에 주의가 옮겨졌고 오역된 코드해석에 나의 주의는 책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대화 내용을 토대로 한다면 이들은 코드에 대해 제대로 된 해석도 받지 못한 것 같은데 그로 미루어보면 정식검사도 실시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관심은 오역되어 관계를 위한 노력을 변질되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해져 고개를 들고야 말았다.


‘어떻게든 끼워 맞추려 마시고, 그냥 이해해 버려요. 판단하지 말고요.’


하지만, (다행히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검사라는 이름으로 각자를 항변하고 서로를 한 곳으로 몰아넣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니.......


현업에 있는 나는, 서로의 이해를 위한 그 검사의 목적과 방향을 어떻게 개방하고 공유해야 하는 것인가?


그러고 보면, 책으로 자신을 내어 보이는 에세이 작가는 대단하다. 마침 내가 읽고 있던 책이 필드고고학자가 현직업을 토대로 사유한 경험을 쓴 책을 읽고 있던 터라 더욱 작가의 개방성이 위대해 보였다. 학술논문, 강연 등을 공유라 본다면, 에세이는 사유를 개방하는 내밀한 작업일 것이다. 내 손에 들려있던 책 속 작가의 힘을 빌어 개방을 시도해 본다. 얼마나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시도해 볼 장이 있어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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