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조로움을 지켜내는 퍼펙트 데이즈 - 지금은 지금이야!
심야에 단 한번 허락된 작품이 종종 있다. 자본에 밀린 탓이겠지만 이런 영화는 굳건하게 ‘질문하는 영화’로 자리 잡는다. 알음으로 취저를 잘 찾아오는 친구가 “이건 잔말 말고 봐야 한다”며 예매를 해 주었다. 밤 10시가 넘어 시작하고 새벽 1시가 되어야 끝나는 영화를 말이다.
요즘의 나는 오늘을, 지금만 사는 환자들을 자주 마주하는데 오늘은 유난히 저항이 심한 환자들이 많았다. 보청기를 이용해도 들리지 않는다는 그들과 소통을 통해 정보를 얻어내야 하기에 고래고래 소리 질러 갈라지고 쉰 소리가 나는 목을 부여잡고, 눈을 맞춰 앉아야 하기에 의자를 끌어들이고 몸을 앞으로 바짝 당겨 앉은 내 일상은 금요일 저녁이 되면 굳어버린 듯 고목 같아진다.
영화라는 장르는 주도권이 내게 없어서 보여주는 것만 봐야 하고 의미를 모르겠거나 불편한 장면도 그냥 수집해야 한다. 때론 그 수동성이 위안이 되기도 한다. 텍스트로만 이해해야 하는 책과는 또 달리 영상이라는 채널은 인물의 대사보다 표정이나 소리, 주변의 다채로운 상황 등 감독이 뿌려놓은 장치를 통해 서사에 빠져보는 것도 묘미다.
친구가 보내준 예매권을 확인했지만 정보를 검색해 볼 겨를도 없이 퇴근길 운전대를 잡은 나는 금요일 특유의 혼잡길 속에 갇혀 열두 번은 취소할까 고민했다. 그래도 오랜만의 심야영화이니…라는 맘에 약간의 설렘이 몸을 일으키게 해 주었다.
‘왜 이곳에 있지?’ 라며 흔한 ‘왜’ 논리도 이유도 댈 수 없는 곳 공중화장실. 누군가의 기본욕구가 해소된 곳을 매일 닦고 청소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복작이는 맘을 지닌 내가 늘 동경하고 경외심을 갖는 사람이 있는데, 일상의 루틴을 지키며 살아가는 그들이다. 수많은 선택지가 있고 번잡한 일상에서 꾀나 지켜지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연하게 다시 일상을 이어가는 것, 그리하여 자신을 지키는 사람을 마주하면 일상에 꺼내지 않았던 감정인 경외심이 일고 뱃속 어딘가가 일렁이며 눈물이 차오르기까지 한다.
영화는 그리 친절하지 않은 편이다. 이제는 구하기 어렵고 구해도 플레이어가 없어 듣기 어려운 카세트테이프처럼 인물의 현재는 있으나 과거에 대한 이야기도 없고, 같은 듯 다른 비슷한 하루하루 그리고 주말이 이어진다. 책을 읽으며 하루를 마치는 그의 꿈에 나오는 무의식의 욕구도 모호하다.
맑은 날 흔들리는 고목나무잎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 그 햇살을 흑백 필름카메라로 뷰파인더를 확인하지 않은 채 남기고 인화된 사진을 확인하며 거르는 의식이 그의 욕구 중 하나일까?
엄마와 싸우고 가출한 조카가 불쑥 찾아와 일상을 보내며 나눈 말이 내내 곱씹힌다.
‘다음은 다음이고, 지금은 지금’을 서로 반복하며 노래하듯 외치는 장면이 오늘 꿈에 나올 듯하다. 마치 내 무의식의 욕구처럼 말이다.
덧! 좋은 영화 강행해서 보자한 룡룡쓰 고마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