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V 빌런 고태경>
정대건
은행나무
2020년 04월
영화제나 GV 행사를 부지런히 찾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영화에 대한 한마디라도 더 듣고 풍부한 감상을 하고 싶은 욕심이었다. 얕은 식견으로는 미처 헤아릴 수 없었던 부분들을 채워주었던 GV에서는, 뜻밖의 '진상'을 만나는 때도 있었다.
"우선 영화 잘 봤고요…" 라는 평범한 첫 멘트부터 기운이 남달랐던 그들의 질문은 모더레이터와 게스트, 나아가 관객까지 곤란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자기중심적 비평과 훈계(?)로 GV를 합평회로 둔갑시키는 사람, 영화 연출 혹은 연기를 전공했음을 밝히며 (하나도 전문적이지 않은) 전문적 지식을 뽐내는 사람까지 그 패턴은 다양했다. 그런 류의 질문이 작품의 해석을 관통하는 질문이었느냐 하면…… 말줄임표에 그 답을 담으련다.
그런 류의 진상을, 사람들은 'GV 빌런'이라 불렀다. 영화에 등장해 주인공에게 시련을 주는 캐릭터를 '빌런'이라고 지칭하는 데서 온 별명일 것이다. 이 작품에도 그런 류의 캐릭터, 영화적 진상이 소설적으로 얻어맞는 스토리가 나오려나 했다. 그러나 예상이란 언제나 빗나가기 마련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태경은 '빌런'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런 모순이 허락된다면, '그는 빌런이지만 빌런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오래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버티는 인물이었다. 물론 아주 느려서, 멀리서 보면 그 움직임이 아주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끊임없이 전진하는 사람이었다. (그 방식이 조금… 일반적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 그가 조혜나를 만난다. 14년째 감독 지망생 조혜나와 20년째 입봉을 준비하는 고태경. 수상은 커녕 상영도 담보되지 않은 다큐멘터리를 위해 손을 잡은 두 사람. 그 동행은, 각자가 기다리는 '삶의 영화적 순간'을 향해 나아간다.
과정은 쉽지 않다. 계획은 어그러지고 대화는 쉽게 틀어지지만 조혜나와 고태경은 포기하지 않는다. 오랜 방황 끝에 잡은 기회를 놓칠 수 없어서다. 무엇도 담보되지 못한 과정이라도, 이것마저 놓쳐버리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서다.
조혜나와 고태경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각자의 좌절과 각자의 집념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낸다. 그 길에서 기다리는 어떤 기회와 삶의 영화적 순간들은, 꼭 우리가 상상한 모습은 아닐지라도 예상치 못한 때와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류의 소설이 그리곤 하는 희망적인 열린 결말과 달리, 책을 읽는 우리의 실제 삶은 많은 경우에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우리는 꼭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되는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대단한 것을 만들어내거나 그 스스로 어떤 특출난 존재가 되어야만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세상엔 꿈꾸는 포부를 이루는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다. 평범한 삶을 살다가 조용한 죽음을 맞이하고 금세 잊혀지는 그런 인생들이.
모두가 유명인이 되고, 이름을 널리 알릴 만큼 잘나고 멋지고 근사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누군가 멋진 일을 하면, 누군가는 조금 덜 멋진 일을 하며 세상의 한 켠을 채우고 있는 것으로 존재의 의미를 채울 수는 없는 걸까.
꿈 여럿을 스쳐 보낸 이 작은 인생은, 생각이 많아지는 작품이었다.
“작품 완성하려고 무릎까지 꿇었다고 했지? 그런 거 아무나 못 해. 난 말이야, 이제 나한테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무릎 꿇는 거보다 더한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진짜 부끄러운 건 기회 앞에서 도망치는 거야.”
고태경이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덧붙였다.
"완성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모든 완성된 영화는 기적이야.”
(11. 택시 드라이버 인 서울)
"그토록 오래 바라던 일인데 한 번은 펼쳐 보이고 싶어. 앞으로 오 년, 십 년? 그다음은… 죽어가는 거지. 영화는 계속 볼 수 있으니까. 팔십이 돼도 구십이 돼도 극장에 올 거야. 그때는 실버 영화관을 자주 가겠지.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고태경은 본인의 취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남의 취향을 깎아내려서 우월감을 느끼거나 냉소를 두르고 남을 조롱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고태경은 누구보다도 영화를 사랑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꿈을 위해 인생을 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큐멘터리로 성격 개차반인 관심종자를 희화화하려는 속내가 없지 않았다. GV 빌런을 같이 있기 싫은 중년 아저씨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고태경은 불콰하게 취해서 목소리 높이지도, 다짜고짜 내게 반말을 찍찍 하지도 않았다. 풍자처럼 시작한 다큐멘터리였는데 나는 고태경을 응원하게 됐다.
(12. 감독 똑바로 해)
영화를 찍으면서 드물게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좀처럼 확신을 못 갖던 내가 배우의 감정과 카메라의 움직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프레임에 들어오는 햇빛의 반사, 지저귀는 새 소리까지 모든 게 만족스러워 시원하게 오케이를 외칠 때가. 그렇게 얻은 화면이 영원한 지속의 순간이 되어 스크린에 상영될 때, 그 쾌감은 영화 만들기라는 미친 고생을 다시 하게 만드는 희열이 되었다.
삶에서도 확신을 가지고 오케이를 외친 순간들이 드물게 있었다. 무언가가 좋다는 감정,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들. 사람들은 그래서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는게 아닐까.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불확실한 생에 확신이라는 것을 가져보고 싶어서. 결국 영화를 만드는 것은 많은 선택지 앞에서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고백하는 것이었다.
삶은 엉터리고 대부분 실망스러운 노 굿이니까 사람들은 오케이 컷들만 모여 있는 영화를 보러 간다. 우리가 '영화 같다' '영화 같은 순간이다'라고 하는 것은 엉성하고 지루한 일상 속에서 오케이를 살아보는 드문 순간인 거다.
(16. 나 행복하지가 않다)
곧이어 마이크를 넘겨받은 고태경이 운을 떼었다.
"누군가 오랫동안 무언가를 추구하면서도 이루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비웃습니다. 자기 자신도 자신을 비웃거나 미워하죠. 여러분이 자기 자신에게 그런 대접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냉소와 조롱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값싼 것이니까요. 저는 아직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꿈과 열망이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제 영화를 상영하는 겁니다.”
관객들이 오오, 하고 박수쳤다. 고태경의 말은 허풍처럼 들리지 않았다.
(19. 서울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