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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연 Oct 14. 2021

책 <무정에세이>, 작은 무정으로 돌보는 세상의 틈




<무정에세이>
부희령
4월의책
2019년 10월





소설가 부희령의 에세이를 두고, 소설가 김남일은 「부희령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오고가는 사소하고 느슨한 선의에 대해 쓴다.」 라고, 칼럼니스트 박찬일은 「여기 실린 글들은 어쩌면 늘 실패하고 곤란에 처해 살아가는 우리에게 보내는 작가의 따뜻한 작은 불빛일 것이다.」 라고 추천평을 썼다.


이들의 두 문장이 <무정에세이>의 처음과 끝을 모두 말해준다. 세상과 삶을, 나와 너를 서술하는 그의 글들은 무정을 가장했으면서도 가장 유정한 문장들이었다.





지나치게 유정하여 때로 비정하기까지 한 세상에서 차라리 무정을 바라는 그는, 존재의 외로움부터 거대한 세상을 해일처럼 덮치는 커다란 괴로움에 이르기까지를 부드럽지만 단단한 문장으로 서술한다. 바위같은 속내를 담았으면서도 뭉근하게 읽히는 글이었다. 나의 고됨과 좌절, 세상의 슬픔과 무너짐을 이야기하면서도 작은 다정함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끈기가 묻어났다.


그리하여 헛헛한 유정의 세상을 떠나온 그가 결국 가닿는 지점은 다시, 유정의 세상이다. 차라리 무정하고자 했지만 그러기엔 이곳의 사람들이, 세상의 저편이 마음에 밟혔던 탓이다.


그의 문장들은 세상의 틈을 메운다. 지나친 유정은 너무 커서 채울 수 없는 아주 작고 작은 틈을 돌본다. 선의의 문장은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구한다.










무엇인가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을 때마다 도대체 누가 나 같은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지 걱정이 앞서곤 한다. 앞에서 자조적으로 실패한 작가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 의미는 복잡하다. 솔직히 한 인간으로서 내가 실패자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훌륭한 성취를 이룬 것도 없고, 부유하거나 학식이 깊은 것도 아니지만, 이 정도면 그럭저럭 잘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늘 곱씹는 것은, 환영받지 못하는, 재능 없는, 성실함이 부족한, 의지가 박약한, 게다가 운도 따르지 않는 작가라는 자괴감이다. 그저 '무명'이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시대와 불화한, 혹은 너무 앞서간 예술가라는 자긍심이라도 지닐 수 있을지 모른다. 소설을 쓰노라면 그런 정신승리에 빠져들 여지가 있다. 나에게 소설은 철저하게 자폐적 공간이기도 하니까. 에세이는 그렇지 않다.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가야 한다.

(6-7쪽, 머리말 중에서)





한 사람의 훼손된 삶의 의미를 헤아려 본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자기 뜻과 상관없이, 이유도 모르는 채, 누구도 짐작 못할 고통을 오롯이 견딘 사람들이 늘 있었다. 어떤 이들은 덧없이 죽었고 어떤 이들은 끝내 살아남았다.

(253쪽)




지난번 수업을 마치고 나서는 덕수궁 길을 따라 시청역 쪽으로 걸었다. 그러면서 그날 내가 했던 수업 내용을 되새겨 보았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사람이나 사물, 혹은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단어 하나로 설명하려 애쓰는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는 것, 무례한 이웃, 아름다운 여자, 외제 승용차, 이렇게, 그러나 하나의 수식어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제대로 표현하고 설명할 수 없다는 것. 단어는 그저 이름일 뿐이고, 이름을 붙이는 행위에는 나와 세상을 분리하려는 의도도 있다는 것. 예컨대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그러니까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저것은 예쁜 그릇이다. 그러니까 나는 예쁜 그릇이 아니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라는 식으로. 그런데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세상을 더 잘 설명하고 이해하려면 단어에서 문장으로 문장에서 글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구체적이고 섬세한 문장을 쓰는 일은 분리시켰던 세상과 나를 다시 연결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것.

(277-278쪽)





창밖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이따금 현실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라는 의문이 고개를 든다. 그런 게 정말 있기나 한 것일까. 현실이란 가장 비현실적인 게 아닐까.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뉴스로 보여주는 것이 현실일까. 포털 사이트에 올라오는 검색어들이 현실일까. 겹겹이 쌓여 있는 매트리스 저 밑에서 밤새도록 굴러다니던 완두콩 한 알 같은 불편함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책속에서는 아무리 무시무시한 괴물을 만나도, 어떤 끔찍한 누명을 써도 반드시 도달하는 진실이라는 지점이 있었다. 용감하고 정직하면 요란한 행복은 아닐지라도, 겸허한 각성에는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처해있는 현실은 고작해야 맷집과 변명, 핑계와 거짓말로 견디고 애쓰는 게 최선일 뿐이다. 편집이 잘못된 영화, 목차가 뒤죽박죽인 이 책이 정말 나에게 주어진 현실일까.

(346-3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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