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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연 Jan 20. 2022

책 <지구 끝의 온실>, 무난한 동어반복의 서사


<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자이언트북스
2021년 08월





도서관에 재미가 들렸다. 그래서 <지구 끝의 온실>을 사놓고도, 도서관 서가에 다른 표지 버전이 있기에 리커버판인 줄 알고 빌렸더랬다. 화려한 표지보다 단정한 표지가 취향이기도 했고. 그런데 다 읽고 나서야 알았다. 남색 표지는 2020년에 '밀리의 서재 오리지널 에디션'으로 나온 것이고, 내가 산 화려한 표지가 2021년에 정식 출간된 판본이라는걸.


다른 부분이 있어도 오타나 자구 수정 정도일 거라 넘겨짚고 확인차 넘겨 보는데 도입부부터 달랐다. 거의 다시 읽듯 시간을 들여 훑었는데, 전체적 뼈대는 동일했지만 몇몇 설정이 달랐다. 어떤 건 약간 결정적이고, 어떤 건 사소했다. 영화로 치면 일반판과 감독판의 차이인가 싶었는데, 끝까지 읽어보니 그것보다는 조금 컸다. 굳이 수치화하자면 5분의 1 정도는 다른 것 같고, 정식 출간되면서 결이 다르게 다듬어진 느낌이라 두 판본을 각각 읽은 두 독자의 감상이 아예 다를 수도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밀리 에디션 버전이 더 취향에 가까웠다. 먼저 읽어서인지 몰라도, 더 친절하고 매끄럽게 덧붙이고 다듬은 정식 출간본보다 러프한 느낌이 이 소설의 서사에 더 걸맞다고 느껴서였다.






알맹이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다. 현재 메인스트림을 차지하고 히트치는 SF 소설들의 결을 역시나 따라가는 느낌이라서.


종말이든 폐허든 어디서든, 따뜻하고 다정하게 발현되는 '인간의 이타적 심성'을 전면에 내세운 서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해 각 작품의 메시지가 결국 하나로 묶여가는 것 같다. 마치 10여 년 전부터 최근까지 기업형 조폭물로 대동단결하는 영화계를 보는 것 같다,고 하면 너무 잔인한가?


김초엽 작가의 현재까지 & 예정된 라인업을 보면 완전한 '다작러'인데, 어쩌면 벌써 동어반복에 닿아가는 걸까 싶기도 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분명한 어떤 작가들에게는, 동어반복과 천착이라는 두 영역이 마치 멍에처럼 무겁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이렇게 느끼는 건, 아무래도 내 취향이 서정적 SF보단 기술적이고 냉소적인 SF를 선호하는 탓일 수도 있어서, 보통의 관점에서는 섣부른 감상일 수도 있겠다 싶기도.






김초엽의 작품을 비롯한 요즘 작가들의 작품에서 대명사 '그녀'가 사라져 간다. 불필요한 성별 인식을 은연중에 심어줄 이유가 없다는 데에 동의해서, 나도 요즘은 의식적으로 '그녀'와 '그'를 구분하는 대신 '그'라고 쓴다. 이와 관련해 잡지 『VOGUE』 2021년 12월호의 <'그녀'가 성차별적 표현인가요?>(조소현 기자) 기사가 가볍게 읽을만하다.










“돔 안의 사람들은 결코 인류를 위해 일하지 않을 거야. 타인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는 게 가능했던 사람들만이 돔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인류에게는 불행하게도, 오직 그런 이들이 최후의 인간으로 남았지."

나오미도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나오미는 지수가 자신의 생각을 인정해줬다는 사실에 기뻤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래도 우린 식물들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야 해."

“왜요?"

뜻밖의 말이었다. 지수가 짧은 침묵에 잠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많은 대안 공동체들을 봤어. 모두 같은 패턴이었지. 처음에는 거창한 기치를 걸고 모이지. 유토피아 공동체를 표방하거나, 종교가 중심이 되거나 사냥꾼들이 모인 집단일 때도 있고, 그도 아니면 그냥 평화로운 생존을 바라는 사람들이 모이기도 해. 그들 모두 돔 시티 안에서는 답을 찾지 못해서, 돔 시티 밖의 대안을 꿈꾸는 거야. 하지만 그게 뭐가 됐든 결국 무너져. 돔 밖에는 대안이 없지. 그렇다고 돔 안에는 대안이 있을까? 그것도 아니야. 나오미 네 말대로 돔 안은 더 끔찍해. 다들 살겠다고 돔을 봉쇄하고, 한 줌 자원을 놓고 다른 사람들을 학살하지. 그럼…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오미는 멍한 얼굴로 지수를 보았다. 지수가 그런 나오미를 보며 미소지었다.

“돔을 없애는 거야. 그냥 모두가 밖에서 살아가게 하는 거야. 불완전한 채로. 그럼 그게 진짜 대안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 똑같은 문제가 다시 생길 거야.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 뭔가를 해야 해. 현상 유지란 없어. 예정된 종말뿐이지.”

지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오미는 이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돔을 어떻게 없앤다는 것인지, 그 밖에서 모두가 살아간다는 말은 무엇인지….

(212-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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