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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교 Sep 11. 2023

운전면허 시험장에서 살아남기

개쫄보의 운전면허 도전기


운전면허 기능 시험장은 정말 실제 도로를 축약해 놓은 듯했다. 횡단보도부터 신호등, 주차장까지 꼭 닮아있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은 액셀러레이터 금지 구역이라는 거였다. 경사로 코스를 무사히 통과한 내가 "액셀 밟나요?"라는 질문을 던지자 강사님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 천천히 가면 됩니다. 브레이크에서 발만 떼고! 액셀 밟으면 안 돼요!" 그렇게 오른발 바로 밑에 금지 버튼이 달린 차는 서서히 굴러갔다.




붉은색, 푸른색 사이 3초 그 짧은 시간


액셀을 밟지 않은 차는 정말 천천히 굴러갔다. 시속 10km는 되는 걸까? 그렇게 천천히 기어가던 중, 저 앞에 신호등이 보였다. 초록불이었다. "천천히 다가가서... 정지선이 안 보일 때 멈춰요." 미천한 실력과는 다르게, 속에서는 빨리빨리 민족의 피가 들끓었다. 지금 액셀 조금만 밟으면 초록불 안에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하며 조수석에 앉은 강사님을 바라보았다.


강사님은 이런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시험장 안에 있는 신호등은 신호가 엄청 짧아요. 그러니까 멀리 초록불이 보인다 싶으면 그냥 멈추는 게 좋아요." 그 말을 증명하듯, 초록불은 금방 주황불로, 주황불은 금방 빨간불로 바뀌었다. 주황불에 지나가려 들었다가는 신호위반으로 걸릴 게 분명했다. 나는 머릿속에 있던 잘못된 상식을 지우고 새로 적었다.


주황불이 보일 때는 잽싸게 달린다 멈춘다.




기능시험장의 전우애


2시간의 연습이 끝난 뒤 쉬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차는 어디에 세워요?"라는 말에 선생님은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그냥 두고 가세요, 내가 세울라니까...." 정말 좋은 생각이었다! 두 시간 동안 운전석에서 꼼짝도 못 했던 나는 속으로 자유의 달콤함을 외치며 털레털레 건물 안으로 피신했다.


쉬는 시간을 받은 몇 수강생들이 옹기종기 대기실에 모여 앉았다. 30분 정도 식사를 한 뒤, 다시 차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옆에 앉은 사람이 가방에서 3단 도시락을 꺼내 펼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 맞다, 나도 밥이 있었지! 하며 작은 가방에 구겨 넣은 편의점 샌드위치를 꺼냈다.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베어 물던 그때, 3단 도시락의 주인공이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 해보니까 조금 어떠세요?" 사슴 같은 눈망울이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안 무서워요. 선생님이 액셀을 밟지 말라고 하셔서 거의 기어 다니고 있거든요." 이런 나의 답변에, 그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거리며 말했다. "천천히 갈 수 있으니까 덜 무서운 것 같아요. 아직 반듯하게 가는 건 어렵지만요..." 나는 꼬깃해진 샌드위치를 우적우적 씹으며 동의한다는 뜻을 밝혔다.


비록 초면이었지만, 첫 운전을 함께하는 사이인 만큼 일종의 전우애가 있었다. 우리는 이내 친구처럼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저는 5년째 면허 따겠다는 말만 하다가 스물여섯이 되어서야 겨우 따러왔어요. 언니가 저를 아가리 면허러라고 불렀다니까요?" "스물여섯이면 양반이죠, 저는 서른이 넘었어요! 20대 때 기능시험 한번 떨어지고 의지가 사라져서..." 그는 어느새 도시락통에서 꺼낸 떡을 내게 내밀고 있었다.


"그래도 선생님이 생각보다 무섭지 않아서 좋아요. 엄청 걱정했었거든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휙 돌아보며 말했다. "저희 선생님은 자꾸 졸아요... 다른 의미로 무서워 죽겠어요." 가뜩이나 1종에 도전하느라 큰 트럭을 몰아야 해서 겁이 나는데, 선생님이 자꾸 졸고 있으니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는 거였다. "그런데 제가 주차하다가 연석에 올라탔더니 깨셨어요." 그는 웃는지 찡그리는지 모를 얼굴로 자조적인 말을 남기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앙선 씨 팬입니다, 만나고 싶어요


시험장의 도로 위에는 나 말고도 서너 대 정도의 차량이 있었다. 모두 운전을 처음 해보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강사님들은 차량과 차량 사이의 거리가 멀찍이 떨어질 수 있도록 임의로 경로를 수정했다. 아까 마주쳤던 수강생이 끊임없이 주차장에 있는 연석 위에 올라타고 있는 관계로 나는 그동안 주차 대신 '차선 반듯하게 따라가기'와 '신호 지키며 멈추기'를 연습하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는데, 차선을 따라가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는 거였다. 나는 왼쪽으로 자꾸 치우치는 경향이 있었다. 오죽했으면 강사님이 중앙선에 꿀 발라놨냐고 물을 정도였다. "가만 보니까 중앙선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아... 반대쪽에서 오는 차가 보면 아주 무섭겠어..." 왜 이렇게 중앙선에 가까이 가고 싶은 걸까. 오른쪽에 충분한 공간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왜 나는 믿지 못하는가.


강사님은 운전자의 오른 다리가 도로의 중앙에 있어야 한다는 팁을 주었다. 공간지각력이 떨어지는 나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이야기였지만, 시키는 대로 한 덕분에 중앙선을 밟는 것만은 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왼쪽으로 살짝 치우친 상태로, 주차를 제외한 모든 코스를 돌아볼 수 있었다.




공식은 정해져 있고 넌 주차만 하면 돼


"자 이제 주차할 겁니다. 저기로 들어가세요."라는 말을 듣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수많은 면허 지망생을 좌절의 늪으로 빠뜨린다는, 바로 그 악명 높은 T자 주차에 도전할 차례가 온 것이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차코스에 진입하자, 강사님이 분주하게 차에서 내렸다.


주차를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하던 나에게, 친구들이 해주던 말이 있었다. "학원에서 알려주는 공식대로만 하면 돼. 시키는 대로 하면 시험은 다 붙어!" 어차피 운전대를 잡는 건 난데, 시키는 대로 하면 붙는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러나 막상 현실이 되니, 그 말이 진실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여기 무늬 보이죠? 여기에 맞춰서 쭉 직진해서 들어옵니다. 핸들 끝까지 막 꺾고! 어깨너머로 봤을 때, 저기 선이 내 어깨에 딱 닿으면 감아요. 그대로 쭉~ 들어가는 거예요." 학원에서는 수강생들을 위해 연석에 선을 그어놓았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긴 했지만, 어쨌거나 나는 이 복잡한 단계를 외우고 로봇처럼 따라 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저는 우등생이 아닌가 봐요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공식을 외웠다고 해서 모두가 문제를 풀 수는 없는 것처럼. 내 딴에는 어깨선과 맞다고 생각해서 핸들을 꺾은 것인데 선을 대차게 밟는다거나, 어디까지 뒤로 가야 할지 몰라서 뒤에 쿵하고 닿는다거나, 웬일로 잘 해냈으나 선에 맞춰 들어가는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주차 브레이크를 거는 걸 까먹는 등 난관이 발생했다.


"저... 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까지 나 자신이 못 미더운 적은 없었다. 잔뜩 주눅이 든 나에게 강사님이 위로를 건넸다. "그래도 아직 연석에 올라타지는 않았으니까 이 정도면 괜찮아요. 1시간만 더 연습해도 나아질 것 같은데!" 나는 험악한 곰돌이 푸 같은 강사님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습만이 살 길이었다.


 그렇게 주차 코스를 몇 분 동안 점령하고 나니, 얼추 실패 없이 주차를 해낼 수 있었다. 물론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걸 막지는 못했다. 현실에서는 어깨와 맞춰볼 선도 없고, 직진할 위치를 알려줄 선도 없는데 어떻게 주차를 해야 하는가?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걸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일단 기능 시험도 통과하지 못한 주제에 현실 세계에서 차를 끌고 다닐 걱정을 왜 한단 말인가. 나는 다시 연습에 집중하며 모든 코스를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기능 시험은 생각보다 쉽게 끝났다. 비록 액셀을 밟지 않아 기준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들어오긴 했지만. 깜빡이를 켜는 걸 잊지 않았고, 돌발 상황에 침착하게 비상등을 켜는 데 성공했고, 주황불에 풀액셀을 밟는 기행을 참아냈으며, 끝까지 걱정했던 T자 주차도 웬일인지 한방에 성공했다.


"12번 차량, 합격입니다!"


드디어 죄수번호 12번에서 탈출하는 순간이었다. 기뻐하는 내 모습을 본 '험악한 곰돌이 푸 강사님'은  "내가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잖어..."라는 시크한 한 마디를 내뱉으며 웃어주었다. 이제는 정말로 도로 위에 올라 나와 타인의 안전을 위협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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