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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ce Lee Mar 31. 2021

당신이 꽃보다 아름다워

<나의 아름다운 이웃, 박완서, 작가정신>


 것이 궁금할  우리는 박물관에 간다. 역사책을 읽고, 때로는  시간과 비용을 들여 문화유산 답사도 떠난다. 그런데 그곳에서 오래된 흔적들로 앞선 이들의 삶을 유추해볼 수는 있어도 그들이 어떤 고민을 했는지, 하루를 어떻게 지냈는지는  길이 없다. 우리가 정말로 궁금한  그들의 생생한 하루라든지 속마음 같은 것이 아니던가. 밀착취재 카메라가 되어 깔깔대는 웃음소리와 한숨소리가 버무려진 실감 나는 인생을 엿보고 싶은 것이다. 그럴  뭐니 뭐니 해도 문학 만한 것이 없다. 때로는 짧은 고전 소설  편이 박물관이나 유적 답사보다도 훨씬  가깝게 과거와 다리를 놓아주기도 한다. 시대상을  담아내는 것이 소설의 묘미라고 한다면, 박완서의 단편집 <나의 아름다운 이웃>  역할을 아주 톡톡히 해냈다.


 ‘70년대의 대학생활은 이랬구나. 우리가 지금 ‘아파트라는 이름에 느끼는 자부심과 경멸감을 오십   우리 엄마 아빠의 젊은 날에도 비슷하게 느꼈구나.  시대 일하는 여성으로 사는 엄마들의 마음은 훨씬 더 복잡하고 무거웠겠다. 부부 싸움하고 화해하는 패턴들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구나.’


읽는 내내 지금과 전혀 다른 생활양식과 가치관에 이질감을 느끼다가도  장만에 대한 꿈과 좌절, 빈부격차, 날로 치솟는 부동산값 앞에서 느끼는 설움은  2021년의 것과 너무나 닮아서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수년  ‘응답하라 시리즈 히트를  것은 다들 지나온 시절이 궁금하기도, 그립기도 하기 때문일 텐데,  단편집을 읽고 나면 1970년대로 떠나  년쯤 살다  기분이 들만큼  시대 사람 사는 풍경을 구수하게 그려내고 있다. 제목처럼 우리 이웃들의 일상을 친근하게 담아내고 있는데, 단편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만큼 아주 짧은 ‘콩트들이  사십 개쯤 알차게 실려 있다.


슬픈 사연들부터 소박한 웃음이 나는 사연들까지  빠져 읽다 보면, 어느새 부모님의 젊은 날을 상상해보게 되면서 마음이 찡해진다. 젊은 이들은 태어나기 전의 세상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고, 부모님들은 모처럼 추억을 소환할  있으니 가족과 함께 읽기에 좋은 책이   같다.  


두 번째로 이 소설이 의미 있는 이유는 어딘가 ‘어설프기’ 때문이다. 여기 모인 글들은 시시하고 소박하다. 거르지 않은 젖소의 우유마냥 비릿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맹물처럼 시시하기도 하다. 어딘가 모자란 기분을 감출 수 없다. 게다가 툭하면 갑자기 부자연스럽게 뚝 뚝 끊겨버리는 탓에 허무하고 배신감마저 든다. 다듬지 않아서 촌스럽고 거칠고 울퉁불퉁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게 이 책의 매력이다.


성공 뒤에 가려진 수많은 실패가 있다. 수많은 연습이 있고, 좌절과 눈물이 있다. 이름난 작가에게도 구겨진 종이와 닳은 연필로 가득 쌓아 올린 세월이 있다. <그 여자네 집>, <그 많던 싱어는 누가 먹었을까> 등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유명한 작품이 수두룩하고, 도서관에서 ‘박완서’라고만 검색해도 몇 백개의 결과가 뜰만큼 다작을 한 유명 소설가도 이런 초짜의 시간이 있었다는 걸 이 책은 우리에게 당당하게 보여준다. 그렇다. 완벽한 것만이 아름다운 건 아니다. 이 세상에는 수줍고 어설프기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 책은 이제 갓 유치원에 들어간 다섯 살 아이들처럼 수줍음과 용기, 풋풋함과 열정, 그런 아름다운 빛깔들을 지녔다.


박완서 작가는 이웃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많고, 하루를 누구보다 정성껏 살아갔던 사람인 것 같다. 평소에 다른 이의 마음을 깊이 공감하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이런 이야기는 결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작품을 봐도 마찬가지이지만, <나의 아름다운 이웃>에서는 더더욱 그녀의 따뜻한 마음씨를 느낄 수 있다. 특히 희로애락이 뒤섞인 이 인생들을 쓸쓸하거나 너무 호화스럽게 포장하지 않은 것도 참 마음에 든다. 어떤 삶이건, 기쁠 때도 슬픈 때도, 가난해도 부자여도  ‘다 아름다운 삶’의 일부라고 아마 말해주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위안을 받는다. 우리에게 일상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싶었던 그녀의 마음이 가슴에 와 닿아 자꾸만 먹먹한 기분이 든다.


짧고 뚝뚝 끊겨서 감질 맛 나는 것은, 달리 생각하면 금방 읽다 덮고 나중에 또 생각날 때 읽을 수 있어 부담이 없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하나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언제든 편하게 읽을 수 있으니 화장실에서 5분쯤, 지하철에서 한 십 분쯤, 그리고 던져두었다가 며칠 있다 또 생각날 때 다시 펼쳐 보기에는 더없이 좋다. 그런 식으로 짬짬이 읽다 보면 완독도 어렵지 않다.  


2021년의 봄을 건너가고 있는 나의 하루를 가만히 곱씹어 본다. 이 자질구레한 웃음과 고민들이 모인 나의 하루와 당신의 하루가 모여 이 시대의 그림을 완성하는 것일 테다. 나의 삶도 한 편의 소설이 되어 미래의 사람들과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경건해진다. 좀 더 웃으면서, 좀 더 책임감 있게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엄마 아빠의 젊은 날로 여행을 떠나게   박완서 님에게  고맙다. 아마 다섯 살쯤이었을까.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독산동 언덕  벽돌집이 문득 그리워지는 저녁이다. 이 책처럼 시대를  담아내는 좋은 글들이 많이 남겨 지기를, 백 년 이백 년  2021 살고 있는 우리가  세상을 떠났을 , 책을 통해 미래의 친구들과 손을 맞잡을  있기를 희망해본다. 내가 오늘 1970 그들을 만났듯이.


무허가 동네는 파리나 모기나 그 밖의 나쁜 것들만 키워내는 줄 알았더니, 그 아이처럼 건강하고 마음씨가 넓고 공부 잘하는 아이도 키워내고 있었습니다. 사람 사는 집은 다 비슷하단 사실이 놀랍고 유쾌했습니다.
 
-할머니는 우리 편- 중에서
여편네 티를 극복했다는 긍지와 여편네 노릇도 못 하고 있다는 열등감은 백지장의 표리처럼 결국 같은 거였고 우린 ‘열심히’한 면만을 강조하고 한 면은 무시하려는데 김 교수는 우리가 무시하고 있는 쪽을 팔라당 뒤집어 여봐란 듯이 보여주고 있었다.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아파트 열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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