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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ce Lee Aug 12. 2021

나만의 인생을 산다는 건, 어떤 뜻일까요?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김이설

여기, 가족의 불행을 함께 짊어지기를 자처하고 동생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주인공이 있다. 변변한 것 없이 늦은 나이에 시인이 되기를 꿈꾸며 필사와 습작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녀는 어느 날 동생에게 폭력을 일삼는 제부의 모습을 알게 된다. 심지어 그는 이미 전처와 아이도 있다는 사실도 숨기고 결혼한 상태였다. 그녀는 동생을 제부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기 위해 조카들을 돌보아주기를 자처한다.


부모님 댁에 여섯 식구가 함께 살면서 매일 아침을 차리고, 청소와 빨래를 하고, 조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킨다. 밤이면 목욕을 시키고, 아이들을 재우고, 알림장을 쓴다. 그 몫을 온전히 해내기 위해 기꺼이 연인에게도 이별을 고했다. 매일매일 집에 갇혀 동생의 역할을 대신하는 동안 사실상 그녀의 삶은 삭제된 것과 다름없었다.


그녀가 조카 육아와 집안일을 점점  익숙하게 해낼수록, 동생은 점점  아이들에게 무관심해져 가고, 그녀는 결국 시를 필사할 시간도 잃게 된다. 마치   주인공이 엄마인 것이  어울려 일 정도였다.


동생은 가끔 주말에도 외출을 할 만큼 아이가 없는 사람처럼 자유롭게 행동하기도 한다. 내 시간이 없는 고단한 삶과 그것을 당연시하는 친정 엄마, 그리고 집에 오면 쓰러져 자기 바쁜 동생을 보면서 주인공은 외롭고 고달프다. 자신만의 시간이 없는 것이 괴롭고 화가 나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선택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거라 여긴다. 그나마 너는 피지 못한 꽃이라는 걸 잊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숫기 없는 아버지, 그리고 저 먼발치에서 그녀를 조용히 변함없이 기다리고 있는 애인이 있지만 그들도 큰 위로는 되지 않는다.


손이 많이 가는 개구쟁이 두 아이와 눈치 없는 친정엄마와 동생, 그들이 서 있는 목련빌라와 그 주변 풍경이 눈앞에 아련하게 펼쳐진다.


‘니 인생을 찾아’ ‘타인을 위해 희생만 하지 말고 너부터 행복해야지’ 단지 이런 메시지뿐이었다면 이 책이 그렇게까지 의미 있게 다가오지 못했을 거다. 한 마디로 정의 내리지 못하는 인간의 모순적인 심리와 이기적인 본성, 가족의 사랑과 의무, 돈을 버는 것을 더 중요시하는 마음 따위 같은 것들이 너무 적나라해서 읽는 내내 자꾸만 가슴이 저려왔다.


집에 갇혀 집안일을 하고 동생의 아이를 키우는 주인공과, 밖에 나가 사회생활을 하고 돈을 버는 동생. 그녀의 친정엄마 눈에 한쪽은 돈을 벌지 않는 사람이고, 다른 한쪽은 돈을 버는 사람이다. 공부를 못하고 변변치 않던 큰딸과, 공부도 잘했고 취직도 잘한 작은 딸이 있다. 엄마에겐 돈을 버는 일이 더 중요했다. 심지어 동생에게 안됐으니 애들을 두고 나가서 새 인생을 차리고 살라고 하고, 애들은 당연히 큰딸이랑 같이 키우자는 말을 서슴없이 하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마지막이었다. 다행히 주인공은 용기를 내어 집을 나가 혼자 살기를 선택했고, 충격을 받은 엄마의 비난과 질책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천천히 되찾아간다. 육아에 찌들어 제대로 자지 못했던 것을 보상받는 듯 몇 날 며칠을 푹 자보기도 하고, 한 평짜리 방을 얻어 아르바이트를 하며 다시 시를 필사한다. 연인과도 다시 데이트를 시작한다. 그녀는 이전보다 더 강하고 단단해졌으며,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본인이 가족에게 떼어줄 수 있는 게 어디까지인지 분명한 기준을 세운 듯 보였다. 주인공의 변화를 보여준 작가에게 고마웠다.


가장 반전인 것은, 그렇게 두고 나온 조카들이 몹시 처량하고 가여워 보였지만, 결코 더 불행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동생은 언니의 독립을 계기로 엄마인 자신의 역할을 깨닫고 아이들을 챙기기 시작했으며, 아이들은 엄마랑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져 조금 더 행복해졌다. 동생은 집안일도 돕기 시작했고, 퇴근하고 술을 마시는 대신 더 일찍 귀가하게 됐다. 어쩌면 언니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나 몰라라 살 때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다. 그러니 언니의 무리한 희생은 어쩌면 두 사람 모두를 더 무겁고 혼란스럽게 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김웅현 님의 책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에서 “누군가 도와주는 사람을 쓴다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그만큼 의존적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라는 대목이 함께 겹쳐진다. 자립, 스스로 서는 일, 그걸 도와주는 게 진정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일일 테다. 자녀에게도 자립하는 힘을 키워주는 게 최고의 선물이라는데 하물며 다 큰 어른의 짐을 대신 져줄 때 불행은 반으로 줄어드는 게 아니라 두 배로 불어나 버릴 수도 있다.


가끔, 책 한 권이 정신과 진료나 상담 몇 달보다 효과가 좋을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 책은 아마도 그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나를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이 책이 새로운 출발의 계기가 되기를 조용히 소망해본다.


뭐랄까.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 그 사람과 헤어지게 된 것이었지만 나는 그게 억울하지는 않았다. 살면서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애초에 보통의 삶에 어울리지 않았던 것처럼, 어쩌면 이제야 나와 잘 어울리는 상황에 놓인 것 같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김이설> 중에서


그런 말을 듣다 보면 집에 붙박인 이유에 회의감이 들곤 했다. 내가 없어져봐야 알 테지. 내가 사라져봐야, 나 없이 생활해봐야 내 존재의 필요에 대해 깨닫겠지……라는 생각이 무시로 들었다. 그러나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때려치워도 나갈 곳이 없었다. 어떻게든 돈을 벌고 있는 동생이 부러웠다. 벌이가 있으니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엄마와 아버지가 부러웠다. 부러울수록 스스로가 추레해졌다. 부럽다는 감정조차도 인정하지 않기 위해 나는 내 감정을 자꾸 외면했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김이설> 중에서


그날 저녁, 엄마의 구시렁 소리를 무시한 채 그대로 출근한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설거지 중이어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 인생은 길고, 넌 아직 피지 못한 꽃이다. 주저앉지 마. 엄마가 하란 대로 하지도 말고.
그러곤 뚝, 통화가 끊겼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김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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