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일하는 직장인이 되었다.
뻔한 클리셰로 이 글을 시작한다. 여행과 사진, 콘텐츠를 좋아해서 여행사 마케터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은 절대 녹록지 않았다. 분명 좋아하는 것을 일로 하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 상상은 10개월 만에 깨지고 만 것이다. 그렇게 나의 첫 서울살이가 29살에 시작해 30살에 끝나는 줄 알았다. 퇴사 후 짧은 유럽 여행을 다녀왔고, 두 달 뒤 새로운 직장에 합격하여 서울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뒤늦은 고백을 하자면 난 서울에서 살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공백기가 길어져 일을 못 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그렇게 두 번째 사회생활을 여행 콘텐츠 회사에서 이어 나가게 된다. 그렇게 약 2년 동안 몇 번의 출장과 휴가를 제외하고 대부분 사무실 모니터를 통해 세계를 여행하고, 콘텐츠를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가 합병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사실 여기까진 괜찮았다. 규모가 큰 여행사에서 마케터로 일할 수 있다는 건 나에게 큰 기회이기도 했으니까. 다행히 좋은 동료들을 만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치열하게 일하고, 퇴근 후에는 열심히 술잔을 기울였다. 대학 시절 내가 동경하던 ‘서울에서 일하는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1년이 흘러서 2020년 1월이 되었다.
나는 결국 퇴사하기로 결심했다.
2020년 초, 뉴스와 유튜브에서 우한 폐렴(코로나19 바이러스)이라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거라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정말 몰랐다. 하루가 다르게 퍼지는 바이러스와 필수품이 되어버린 마스크, 생전 남의 얘기인 줄 알았던 재택근무까지. 이렇게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몸소 겪다 보니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 국경이 닫히면서, 여행사와 항공사에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온갖 소문이 돌았기 때문. 결국 그 소문은 현실이 되었다. 처음에는 근무 일수가 줄어들었고, 월급이 깎이고, 결국에는 대부분의 직원이 휴직하게 되면서 20년 전 IMF를 직접 겪는 듯한 공포에 휩싸였다.
그렇게 1년이 흘렀고, 나는 결국 퇴사하기로 결심했다. 대구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상경한 지 불과 5년 차에 벌어진 일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때문에 여행업에서 오래 일하고 싶었던 나의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서울의 봄이 이렇게 예뻤나?
나의 안식년은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서울을 제대로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서울에 벚꽃이 피고, 여름이 오고, 단풍이 물들고, 눈이 내리는 동안 난 무얼 하고 있었나? 계절을 느끼는 삶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주말만 기다리는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거 너무 억울하잖아?” 출퇴근 지하철과 사무실에서 살려고 서울에 온 것이 아닌데! 난 도대체 5년 동안 어느 도시에서 살아왔던 걸까.
여전히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2021년 봄. 내가 사는 구로디지털단지역 근처에도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가 이렇게 예쁜 곳이었다니. 코로나가 나에게 준 유일한 선물이 있다면, 바로 내가 사는 이 도시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가까운 동네를 시작으로 벚꽃과 개나리가 만개한 서울의 궁궐을 거닐고, 오후의 햇살을 머금은 벚꽃 가득한 안양천을 따라 무작정 걷기고 하면서 내 방식대로 서울의 봄을 만끽했다. 그렇게 스마트폰 카메라로 서울의 봄을 부지런히 기록했다. 다시 오지 않을 나의 찬란한 34살 봄이기에. 이깟 바이러스 때문에 나의 아까운 청춘을 방구석에서만 보낼 수 없어 더욱 열심히 서울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서울의 시간은 잘 영글어가고 있었다.
나에게 여름은 그저 습하고 더운 계절이었는데, 서울의 여름도 봄 못지않게 청량하고 눈부셨다. 바다처럼 새파란 여름 하늘을 유영하는 하얀 뭉게구름을 보고 있으면 지긋지긋한 무더위가 살짝 가시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하루의 끝에 펼쳐지는 붉게 물든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여름이 절대 싫지만은 않더라. 그러다 문득 그날의 노을이 기대되는 날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왕산으로 향했다. 티셔츠가 땀으로 젖고, 숨이 턱 끝까지 찰 때쯤 도착하는 전망대에서 시원한 밤바람을 마주한다. 인왕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오후 7시 풍경만으로도 여름의 가치는 충분하다.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마시는 시원한 맥주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지.
여름과 정이 들 때쯤 어느새 가을이 찾아왔다. 나는 계절 중 가을을 가장 사랑한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적당히 시원한 날씨는 어디론가 사람을 떠나고 싶게 만드니까.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든 서울의 궁궐을 거닐면서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불안했지만, 그동안 잘 버텨낸 나에게 가을이 위로를 건네는 것 같았다. 스스로 결정한 휴식이기에 조금 더 시간을 가지면서 앞으로의 인생을 계획하기로 했다. 봄에 뿌린 씨앗이 싹을 틔우고, 무더운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듯이 나의 안식년도 서울의 시간도 잘 영글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서울의 1년을 사진으로 기록하면서, 이때 느꼈던 감정과 서울의 순간을 혼자만 보기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다른 천만 명의 사람이 모여 사는 이 큰 도시에서 누군가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하루를 버티고 있다는 것을 사진을 통해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살고 있는 이 서울을 마냥 미워하지 말고, 조금만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정을 붙일 수 있는 삶의 터전이자 여행지이기에. 그리고 나의 기록물을 보면서 당신도 문득 날씨가 좋은 날에는 에코백 하나 메고 서울의 곳곳을 거닐 수 있다면 좋겠다.
* 모든 사진은 본인이 찍었으며, 갤럭시 S20+ 기종으로 촬영하였음을 알립니다.
ㅣ WHO AM I?
생명공학을 전공했지만 현재는 서울에서 살며 일하는 마케터. 스무 살 이후 대구살이 9년 그리고 서울살이 8년 차. 좋아했던 여행을 업으로 삼았다가 코로나로 쓴맛을 본 후로는 취미로만 즐기기로. 2021년 셀프 안식년을 통해 서울을 여행하며, 서서히 서울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도시와 자연을 모두 좋아하는 편견 없는 사람. 단, 일출보다는 일몰이 주는 감성을 즐기는 게으른 여행자다.
※ 돈의문박물관마을 서울 100년 스토리클럽 활동을 통해 작성한 콘텐츠입니다. 링크를 통해 돈의문박물관마을 및 서울 100년 스토리클럽에 대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가기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