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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소 Jul 27. 2019

방귀를 삼킨 그녀 이야기

첫사랑이 뭐길래


 메모장을 정리하다가 문득 안부가 궁금해진 사람이 있었다. 첫사랑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웠던 그녀. 내일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의 안부를 물어야겠다.


 내가 좋아했던 유명한 미드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나로선 아쉬웠던 캐리의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바로 방귀사건이다. 캐리와 빅이 한 침대에 누워있을 때 캐리가 방귀를 뽀옹 뀌었고 그 뒤로 캐리는 빅이 자신을 싫어할 거라며 걱정하는 이야기였다. 술자리에서 그 사건에 대해 친구들이랑 토론 아닌 토론을 펼친 적도 있었다.


“미스터 빅이 캐리의 진정한 첫사랑이니까. 판타지만 남기고 싶은 거지.”

“그런 사랑이 어떻게 지속돼. 첫사랑 판타지 너무 지겨워. 환상 속의 그대여야만 해?”

“첫사랑=신비감이잖아.”

“그러니까 동창회 가서 첫사랑이네 뭐네 하면서 바람나는 거지.”

“첫사랑이 뭐길래 목숨 거는 사람이 있을까.”

“추억을 먹고사는 사람도 있어.”


결론도 나지 않을 토론을 펼치다가 마감시간이라며 통닭집에서 쫓겨난 기억이 난다. 2차를 갔던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첫사랑에 목숨 거는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는데.. 그러다 곧 그로부터 며칠 뒤 나에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안겨 준 이가 있었다. 바로 엄마 친구 딸 k이다.


엄친딸 K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엄마의 말을 빌려올 수밖에 없다.


“그 지지배, 지 엄마 닮아서 승질이 드~러워. 성깔 있는 숙이도 지 딸 감당을 못한다니까!”


그렇다. 엄마 친구 중에 가장 성깔 있는 캐릭터가 숙이 아줌마이고, 그런 숙이 아줌마의 DNA를 물려받은 딸 K이다.


 일화로 소개하자면, k가 고3 때 한 친구랑 들이받고 싸웠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친구가 명백하게 잘못했지만 어쨌든 폭력을 행사한 K에게 선생님은 더 호되게 꾸짖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K가 어떻게 했대? 빨리 말해봐.”


엄마는 이야기의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자꾸 마(방송용 속어)를 띄우신다.


“선생님도 들이받고 가방도 안 챙기고 집으로 왔댄다.”


와우! 난 많은 선생님들을 꽤 존경하는 편이지만 왜 그때 K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대리만족을 한 느낌이 들었었다.


“숙이 아줌마, 학교 불려 가셨대?”

“쫓아가서 선생님이면 애들 잘잘못 먼저 가려주고, 그러고 나서 K를 따로 혼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따졌대.”

“어쨌든 놀라셨겠네. 학교에서 전화 와서.”

“별로. 1년에 한 번은 가나 봐. 연례행사처럼.”


두 번째 일화는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 숙이 아줌마가 K를 데리고 길을 걷고 있었는데 숙이 아줌마와 알고 지내던 동네 할머니가 이런 멘트를 날리신 거다.


“숙이 딸, 못 본 새 다 컸네. 살만 좀 빼면 되겄어.”


여기서 받아친 K의 대사가 압권이다.


“할머니도 주름살만 좀 펴면 되시겠네요.”



 이제 좀 K에 대한 설명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엄마에게 전해 들을 때마다 만화 캐릭터 같은 그녀의 생동감 넘치는 일화를 흘려들을 수 없었다. 내가 언젠가 꿈을 이루면(수 년째 작가 지망생인 프로소심러) 그녀를 내 극본에 출연시켜야겠다는 마음으로 메모장에 일화를 구체적으로 기록해두었다.


아무튼 그런 그녀에게도 첫사랑이 있었는데 두어 살 더 많은 오빠였다. 하필 그 오빠야는 그녀와 같은 아파트, (심지어) 같은 라인에 살고 있었고 모범생의 표본 같은 대학생이었다.

‘연애 카테고리’에서는 숙맥이었던 K는  그 오빠를 고등학생 시절 내내 짝사랑하다가 자신도 성인이 되기 직전인 수능 직후 고백을 했다가 정중히 까인 모양이었다.

‘삼일 밤낮을 울고 지X’이라며 숙이 아줌마가 우리 집에 오셔서 한탄하신 적이 있었다.

그러다 그 고결한 모범생 오라버니가 군대에 입대했고 우리의 K도 대학생이 되어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 날은 숙이 아줌마가 빙수를 포장해서 엄마를 초대하셨고 엄마는 빙수 마실을 떠나셨다가 몇 시간 뒤 집으로 오셔서 말없이 계속 웃기만 하셨다.


“크크 크큭... 아하아하하하하.”


그러다가 소파에 아예 누워서 배를 잡고 웃으시는 게 아닌가.


“엄마 왜 혼자 웃어. 말을 해주고 같이 웃어야지.”


 너무 웃다가 울게 돼버린 엄마는 숨을 고르시더니 물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난 시원한 얼음물을 가져다 드리고 평생 잊지 못할 에피소드를 선물 받았다.


엄마와 숙이 아줌마, 또 다른 친구분 이렇게 세 분이서 빙수를 드시고 계셨고, K는 외출 준비 중이었다고 한다.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는 K를 보며 숙이 아줌마가 요새 딸이 변비로 고생 중이라고 신호가 와도 도통 처리를 못한다며 걱정을 늘어놓으셨단다.


“K야, 이리 와. 빙수랑 고구마 파이 먹어. 자꾸 먹어야 밀어내지.”


엄마는 K에게 빙수와 파이를 권하셨고 K도 합세해서 맛있게 디저트를 다 먹어치웠다고 한다. K는 이제 나가보겠다며 어른들께 인사를 한 뒤 집을 나섰고 엄마와 친구분들은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였다. K가 나간 지 5분도 안돼서 다시 도어록 누르는 소리가 들렸는데 삐. 삐. 삐. 누르는 소리가 순조롭지 못하더란다. 이에 숙이 아줌마는


“누구세요! K니?”


하며 문을 벌컥 열었는데 세상에,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K가 바닥에 누워있더란다. 엄마와 아줌마들은 너무 놀라서 애를 데려다 거실에 눕히고 팔다리를 주무르고 단추를 풀고 난리법석을 떨었다고 한다. 숙이 아줌마가 물을 떠 와 애 얼굴에 들이붓다시피 먹이자, 과호흡을 하던 K가 조금씩 안정되고 안색도 조금 돌아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강도라도 만난 거야?”

“병원에 갈까?”


아주머니들은 놀라고 걱정된 얼굴로 K를 쓰다듬어 주었고, 곧 안정된 K는 눈물을 쏟으며 이런 말을 하더란다.


엘리베이터 타자마자 방귀 신호가 왔는데 참으면 또 가스 차서 속 아플까 봐 시원하게 껴버렸는데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멈추더니 상훈이 오빠야가 탔다고.....


그랬다. 휴가 나온 첫사랑 오빠가 하필 그때 엘리베이터에 탄 것이다. 더 멋져진 상훈이 오빠야는 K에게 손인사까지 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당황한 K는 그때부터 오빠의 등 뒤에 서서 들숨으로 엘리베이터 안에 퍼진 자신의 공기를 흡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계속해서 들숨만 습습습후- , 날숨 쉴 새도 없이 습습습후- 일층에서 오빤 내렸고 현기증이 나기 시작한 K는 다시 집으로 올라오는데 과호흡이 시작되고 갑자기 눈 앞이 흐려지면서 일어서 있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애가 엉엉 우는데 거기서 웃을 수가 있어야지. 근데 너무 웃긴 거야. 빨리 집에 오고 싶었어.”


엄마는 땀까지 흘리시며 웃고 계셨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그 사람과 인연이 다하더라도 추억에 만큼은 판타지로 남고 싶은 마음.... K는 과호흡이 올 정도로 온 마음을 다해 그걸 지키고 싶어 했던 것이다.


나의 좁은 이해의 폭을 또 한 뼘 넓혀준 K에게 감사하며 오늘의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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