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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밤 Jan 26. 2023

제사는 니가 받아야지

너는 기독교가 아니니까

시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하면 족히 30분은 넘기는 내가 나도 이상하지만 더 이상한 건 시어머니와의 통화가 재밌다. 한국말로 수다 떨 사람이 없는 곳에 살며 느끼는 수다의 갈증을 풀어준다. 내가 자유로운 시간에 한국의 친구들은 직장이다 육아다 바쁠 시간임을 알기에 전화를 망설이게 되지만 시어머니는 언제나 내 전화를 반가워해주신다. 해외에 산다는 이유로 기껏해야 한두 달에 한 번 전화를 드리니 그러실 만도 하다.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는 아들 대신 아들의 회사 생활, 손자의 학교 생활을 전해 들을 수 있으니 더없이 반가운 전화일 테다.


시어머니 생신을 맞아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조잘조잘 수다 떨 생각에 신이 났다. 생신 축하드린다는 말과 함께 근황 토크가 오가고, 다가오는 명절 이야기가 이어졌다. 차례상 차리기의 노고는 빠질 수 없는 소재다.

기독교인인 어머님은 종교가 없는 아버님의 뜻에 따라 30년이 넘도록 제사상을 차렸다. 그간의 고생을 토로하시며 당신 며느리들은 이런 고생 안 시키고 싶다, 내 제사는 지내지 말라는 며느리 사랑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묵직한 한마디가 날아왔다.

"너도 교회 다녀야겄다. 큰 애는 기독교고 친정도 독실해서 제사 안 받으려고 할 텐데 우짜니. 교회 안 다니는 니가 받어야지"

둘째 며느리인 나에게 넌지시 제사는 내 몫임을 알리는 말씀이었다.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말에 나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답했다.

"저도 제사 안 받을 건데요. 어머님~~"


내 대답에 적잖이 당황하신 눈치였다. 서둘러 전화를 끊으시려다 시아버지 친구 얘기를 꺼내셨다.

"아버지 친구 중에 며느리 맘에 안 든다고 아들 불러다 이혼하라고 한 친구도 있어야? 그 집 아들도 대답을 못하다가 받을게 많으니 결국 이혼하겠다고 했대. 아버지는 그 친구한테 니가 잘못한 거라고 하긴 했다는데 그래도 야 그런 집도 있어"


아들 인생 망치는 그런 분과 친구냐며 믿을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가장이 되어서도 그렇게 부모에게 휘둘리는 남편이라면 이혼하는 게 낫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지만 말을 삼켰다.

"어머 세상에 그런 분이 계세요? 어머.." 하며 대충 둘러대고 말았다.


제사 얘기에 이어 며느리를 이혼시키려는 다른 집 시아버지 이야기는 마치 협박처럼 들렸다. 그리고 다짐했다. 내가 제사를 받지 않겠다는 이유로 이혼을 강요한다면, 그리고 내 남편이 그 뜻을 받들어 올린다면, 기꺼이 해드리리라. 나도 그런 시부모님과 남편은 사양한다.


큰 며느리는 기독교라 열외이니 둘째인 내가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말에 적잖이 불편함을 느꼈다. 종교가 있는 며느리는 그 신념을 존중하여 대상에서 제외되지만 종교가 없는 나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그 주체로 선택되는 것이 불편했다. 그렇다고 제사는 무조건 큰며느리가 준비해야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한쪽만 존중받는다는 것이 언짢을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사상을 차리는 주체가 며느리들에 한정되는 것이 불편하다. 정작 조상에게  한번 하지 않는 며느리들이  주체가 되고 아들들은 뒤로   빠져있다. 만약 내가 교회에 다닌다면  집안의 제사는 자연스레 없어지는 것일까. 자손인 아들들과는 상관없이 며느리들의 종교에 따라 제사의 유지 여부가 결정된다는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다. 제사상 차리기가 당연히 며느리의 몫이라는 뜻일 테지만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인지 나는 이해할  없다.


명절이 되면 시댁 주방에 여자들만 모여 전을 부친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정확히는 며느리라는 이유로 강요받는 노동이 싫다. 명절이 다가오면 미디어에서 차례상을 간소화하자고 이야기한다. 며느리들을 일에서 조금이라도 해방시켜 주자고 외친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상다리가 휘어지게 상을 차려도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온 가족이 함께 일 한다면, 또는 노쇄한 시부모님은 거실에서 손주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아들들, 며느리들이 일을 한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기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노동의 양 문제가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여자라는 이유로 한쪽의 노동만을 당연시하는, 성별과 상관없이 똑같이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그 인식이 문제다.


차례를 지내고 친척들과 다 같이 식사를 할 때 남자 상, 여자 상을 따로 차리는, LA갈비를 잘라 뼈가 안 붙은 고기는 남자상으로, 뼈가 붙은 고기는 여자상으로 내는, 설거지는 반드시 여자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시댁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평등이겠지.

한국으로 돌아가기 싫은 이유 중 하나다.

또다시 시댁에 가면 단지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많은 것들이 당연시되겠지. 그 기분이 참 별로다.


어색하게 마무리된 통화를 마치고도 사실 마음에 큰 타격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진짜로 제사를 받지 않을 거니까. 어머님의 삶을 존중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같은 방식의 삶을 살 생각이 없다. 그 전통을 이어가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어가면 되고, 그게 싫다면 그만 두면 된다. 각자의 방식으로 조상을 추도하면 된다. 그것을 선택할 권리는 나에게 있지, 다른 누구에게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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