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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요일밤 Feb 07. 2023

아빠에 대하여

그날의 기억

우연히 ‘놀면뭐하니’ 복원소 영상을 보게 되었다. 30년 전 돌아가신 아빠의 목소리가 담긴 카세트 테이프를 복원해 달라는 가족의 사연이었다. 잊고 살던 아빠가 떠올랐다. 햇수를 헤아려보니 나도 올해로 아빠를 잃은 지 꼭 30년이 되었다. 영상을 보며 나의 아빠를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아빠의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목소리는 기억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빠는 엄마를 자주 때렸다. 어린 내 시선에서 그 폭력의 이유는 엄마의 춤바람이었다. 젊은 시절 미모가 출중했던 엄마가 춤을 추러 다닌다는 것은 아빠를 불안하게 했을 것이다.


엄마는 아빠가 의처증이라고 했다. 아빠가 그렇게 싫어하는데도 엄마는 아빠의 눈을 피해 몰래 춤을 추러 다녔다. 나는 여덟 살에 의처증이라는 단어를 알게 됐다. 지금 내 아이의 나이에 나는 어른들의 세계에 들어와 버렸다.


엄마를 미행했다. 어김없이 예쁘게 차려입고 친구를 만난다고 나가는 엄마가 실은 춤을 추러 간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왜 춤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아빠가 싫어하니까 나쁘다고 생각했겠지. 또각또각 걸어가는 엄마를 몰래 뒤따라 가던 내 모습과 작은 가슴 안에서 끓던 분노와 두려움이 선명히 기억난다. 숨 죽이며 미행하던 그 길에서 이내 엄마는 사라져 버리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던 여덟 살 아이. 그 아이 마음속엔 그렇게 엄마에 대한 미움이 자리 잡았다.


때리는 아빠보다 춤바람 난 엄마가 미웠다. 하지만 눈앞에서 맞고 있는 엄마를 보고 있자면 가엾고 불쌍해서 또 아빠가 죽도록 미웠다. 나에겐 엄마, 아빠 모두 밉기도 하고 가엾기도 한 존재였다.


아빠는 작은 회사의 사장이었다. 잘 나가는 회사는 아니었는지 사장이라고 해도 살림은 변변치 않았다. 사람 좋은 아빠는 지인의 보증을 섰고 결국 그 연대 책임은 우리 집까지 왔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 여파로 아빠는 회사 어음을 막지 못했고 결국 부도가 났다. 부도, 차압, 보증 이 모든 단어를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어느 날 아빠는 여기저기 피가 묻고 찢어진 와이셔츠를 입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빚쟁이들에게 맞았다고 했다. 여기저기 피투성이가 된 아빠의 모습은 내 기억 속에 한 컷의 사진처럼 남아있다.


아빠 회사의 부도로 빚쟁이들이 집으로 찾아왔고 아빠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집으로 찾아온 빚쟁이들은 며칠을 아빠가 없는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며 아빠 행방의 단서를 찾는데 혈안이 돼 있었다. 낯선 사람들과의 기이한 동거, 무겁고 불안한 공기 속에서 전화벨이라도 울리면 제발 아빠가 아니길 빌며 전화를 받곤 했다.

엄마는 곧 우리 집 모든 물건에 빨간딱지, 차압이 붙을 거라고 했다. 매일 학교에서 돌아올 때마다 집에 빨간 스티커가 붙어있지 않길 기도하면서도 ‘만약 티비에 빨간딱지가 붙어도 몰래 보면 안 들킬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던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그 무렵 아빠는 지방 여기저기를 떠돌며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빠의 도피 생활은 몇 년간 계속됐고 그 사이 엄마는 작은 공장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가끔 엄마가 외출한 사이 아빠로부터 전화라도 오면 거짓말을 해가며 엄마를 보호했다. 전화벨이 울릴 때면 심장이 요동치고 두려웠다. 엄마 아빠를 지키기 위해 내가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두어 달에 한 번 아빠가 며칠간 집에서 지낼 때면 아빠에 대한 반가움도 잠시, 엄마, 아빠의 싸움은 계속 됐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빠의 일방적인 폭행이지만.


1993년 12월 어느 날, 그날도 아침부터 아빠는 엄마를 때렸다. 맞고 있는 엄마를 두고 학교에 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종일 맞고 있을 엄마를 떠올리며 학교에서 슬픔과 불안에 떨었다. 학교를 마치고 급히 집으로 돌아와보니 엄마는 집에 없었고 아빠는 안방에서 자고 있었다. 안방 문을 빼꼼히 열어 문틈으로 아빠의 자는 모습을 보고 살며시 문을 닫았다. 그 고요가 깨지고 지옥의 순간이 돌아올까 봐 두려웠다. 웬일인지 아빠가 즐겨 입던 하늘색 츄리닝이 깨끗하게 세탁을 마치고 거실 한편에 반듯이 걸려있었다. 아빠가 웬일로 직접 빨래를 했지 싶었다.


몇 시간이 지나고 엄마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에게 계속 맞다가 아빠가 화장실 간 틈에 뛰쳐나와 이웃집에 숨어있었다고 했다. 엄마가 출근을 안한걸 이상하게 여긴 직장 친구가 집으로 찾아왔고 엄마와 우리를 위로해 주었다.


“애들 저녁은 먹여야지” 하며 그 아주머니는 라면을 끓여줬다. 밉지만 남편도 저녁은 먹여야 하니 엄마는 큰언니더러 아빠를 깨우라고 했다.

아빠를 깨우러 간 언니가 안방을 나오며 "엄마, 아빠가 이상해."라고 말했다.

서둘러 안방으로 가보니 아빠의 입가에는 하얀 거품이 있었다. 아빠 손에는 무선 전화기가 들려 있었고 주변에 하얀색 약이 있었다.


그날 아빠는 세상을 떠났다. 도망친 와이프를 찾는 전화를 수도 없이 걸었던 전화기를 손에 든 채.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그 감정을 잊을 수 없다. 엄마를 폭행하는 나쁜 아빠였지만 딸자식들에게는 손 한번 댄 적 없던, 막내딸이라고 나를 끔찍이 예뻐해 줬던 아빠가 떠나서 슬펐지만 한편으로는 더 이상 엄마가 맞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하기도 했다. 내 나이 열 살이었다.


아빠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선택을 하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회사의 부도, 빚쟁이들 사이에 처자식을 남겨두고 홀로 하던 도피생활, 아내에 대한 의심과 배신감.

이제와 아빠의 그 심정을 미루어 짐작해 본다.

그날, 즐겨 입던 츄리닝을 빨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후 즈음, 엄마 걱정에 학교에서 전화한 중학생 큰 딸과 통화하며 아빠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여기저기 전화해도 엄마의 행방을 찾을 수 없던 아빠는 혹시 엄마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진 않았을까.

아빠의 나이 마흔셋, 지금 내 남편의 나이였다. 대단한 어른처럼 보였던 그 나이가 사실 여전히 서툴고 흔들리는 나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30년 전 그날을 떠올리며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무언가로 가슴을 콕콕 찌르는 듯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가슴속에 깊이 묻어뒀던 그 슬픔을 이렇게 글로 옮겨 적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는 느낌이다.


미움과 사랑이 뒤엉켜버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보고 싶어요.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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