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는 긴 유학생활을 하는 중이다.
전라도 할머니 손에서 서울 토박이로 자란 스무 살 무렵, 자취를 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 해 봤던 손녀는 유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일 년에 한 번씩 방학이나 휴가 때에 서울의 집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누구에게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유학을 시작할 무렵엔, 매일 부대끼던 할머니와 엄마, 아빠를 가끔만 봐야 한다는 현실이, 혼자 자고 일어나야 하는 현실이 손녀는 서럽고 두려웠었다. 하지만 귀에 딱지가 앉을 때까지 쏟아붓는 할머니의 하소연과 잔소리를 일 년에 한 번만 짧게 들을 수 있어서 한편으로 숨통이 트인다는 생각도 들었던 게 사실이었다.
이제 10년이 넘게 된 타지 생활 중에도, 할머니가 부재한 지금까지도 손녀는 평생을 들어온 그 넋두리가 그립지 않았다. 다만, 할머니의 존재가 사무치게 그립기에 잔소리를 들었던 그 순간들도 그리움 속에 감당하자고 결론 내렸다.
외국에 나갔다가 일 년에 한 번쯤 귀국하는 손녀를 할머니는 많이 그리워했다. 할머니의 손길을 언제나 갈구하던 어린 손녀가 이제는 집을 떠나 말도 잘 안 통하는 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밥도 해 먹고 빨래도 한다고 하니 대견하면서도 어쩌면 배신감도 들었겠지 싶다. 손녀의 해방감과는 다르게 할머니는 손녀의 모든 모습이 매일 그리웠던 것 같다.
손녀는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가장 아끼던 손녀와 손자는, 정작 가장 원했던 순간, 할머니 곁에 있을 수 없었다. 손녀에게 할머니의 마지막 한 달간의 모습은 아빠, 엄마에게 전해 들은 모습이 전부다.
할머니에게 생전 처음 저혈당이 왔다. 급하게 아빠는 할머니를 모시고 응급실로 갔다. 이때부터 할머니의 몸은 기력을 다했다는 신호를 보냈던 것 같다. 보청기도 소용이 없었는지 이 시기에는 아빠와 할머니가 공책에 글을 써가며 대화를 나눴다고 했었다. 응급실에도 아빠는 할머니와 대화를 나눌 공책과 연필을 들고 갔다고 했다.
누워있던 할머니는 지나가는 어느 간호사의 뒷모습을 보며 "유진아, 유진아" 하고 불렀다.
"유진이는 지금 미국에서 아주 좋은 회사에서 열심히 일 하고 있어요."
아빠는 서둘러 큰 글씨로 적어 할머니께 노트를 보여드렸다. 손녀는 간호사 같이 유니폼을 입는 직업은 당연히 아니거니와 할머니는 와글와글한 단체 사진 속의 손녀를 콕 집어내는 매서운 눈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아빠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처음엔 믿고 싶지 않았고 곱씹으며 손녀는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퇴원 후 할머니는 조금씩 더 기력을 잃어갔고, 한 달쯤 후에 손녀네 집, 그리고 세상을 완전히 떠났다. 겨울이면 공항에서 아빠 차를 타고 오는 손녀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할머니가 이제 집에 없다. 할머니의 신세한탄과 혼잣말로 항상 빽빽했던 집은 이제 적막하다. 겨울이면 꼭 맡아야 하는 홍어 냄새, 청국장 띄우는 냄새도 없어 지루할 따름이다.
할머니의 그리움은 손녀의 죄스러움이 되었다.
낯선 사람을 손녀라고 믿고 싶을 만큼 그리움으로 가득했던 절박한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린다. 세상의 전부인 손녀와 손자를 그리워하며 마지막을 준비했을 할머니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마음 아팠을 아빠에 대한 회한으로 손녀는 오늘도 죄스럽다. 앞으로도 그 무게를 늘 감당하노라 담담히 받아들이면서도 매 번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