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손녀의 가족 관계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특별했다.
맞벌이 하는 엄마, 아빠와 손녀를 전담 마크해 준 그 할머니에 둘러싸여 유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고, 청년기를 맞았다. 할머니에게 그 손녀는, 둘째 손주가 생기기 전까지는 스물네 시간 부대끼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손녀는 초등학교 4-5학년쯤이 되면서는 코딱지만 한 독립심이 생겼지만, 그전에는 할머니에 대한 분리불안 정도의 애착이 있었던 것 같다.
하루는 손녀가 몸이 좋지 않아서 유치원에 다녀와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24시간 할머니는 손녀가 유치원 가는 시간만 빼면 항상 집에, 손녀 곁에 함께 했다. 손녀는 눈을 떠 보니 집에 할머니가 없다는 걸 알았다. 고래고래 할머니를 불러보았지만 적막할 뿐이었다. 손녀는 자지러지게 몇 분을 울었다.
손녀가 외우고 있던 전화번호 세 개는 아빠, 엄마의 회사 직통번호와 송이 고모의 집 전화번호였다. 늘 엄마, 아빠 회사에 전화 가끔 걸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날은 고모네 집으로 전화를 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낯을 가리던, 할머니 치마 뒤에 숨어서 고모한테 얼굴을 비추는 것도 어려워했던 손녀는, 꺼이꺼이 울면서 고모한테 전화를 했다.
“고모, 할머니가 없어요”
느낌상 고모네 집에 가신 건 당연히 아닌 것 같았지만 고모는 차분하게 손녀를 안심시켰다.
“할머니 잠깐 나가셨응께 곰방 오실 것이다. 울지 말고 차분히 기다리고 있으면 곧 오실 것이여.”
고모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할머니가 가끔씩 왕래가 있는 송이 고모네 집에 갔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건지, 이런 작은 일로 엄마랑 아빠가 괜히 걱정할까 봐 그랬던 건지, 아무튼 손녀는 고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울음보라는 치부를 들켰다.
전화를 끊고 몇 분 지나자 현관문이 열리고 할머니가 양손 가득 채소 봉지를 들고 들어온다. 신발을 벗기 전, 일단 손에 든 짐을 휙 집 안으로 던져 올려 둔다.
“아이고 되다. 어째 깨부렀냐?”
할머니가 없어서 송이 고모한테 전화까지 했었다며 손녀는 억울한 심경을 할머니한테 전했다. 물론 귀를 잘 열지 않는 할머니는 눈으로 안위를 확인했으니 손녀의 호소가 귀에 들어올 리 없다. 할머니는 업무 순위에서 한참 뒤로 밀려있는 손녀의 하소연을 듣는 대신 중요하고 시급한 저녁 반찬 준비를 한다.
물론 그때는 혼자 집에 있던 그 시간이 한 시간쯤으로 느껴졌다만 어른이 된 손녀가 회상을 해 보면 아마 십 분쯤 되는 시간이었지 싶다. 할머니가 부재한 그 짧은 시간, 자지러지게 울던 손녀는 그때 그 어린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사실, 할머니를 먼저 떠난 건 손녀였다. 만 스물두 살에 손녀는 큰 세상을 체험하겠다며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한 해에 한두 번씩 서울의 집에서 변함없이 씩씩한 할머니를 만났다. 언제나 할머니가 바라는 손녀의 삶에 대하여 여전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겨울이면 할머니 잔소리를 양껏 듣고, 할머니의 눈물바람으로 배웅을 받으며 집이 없는 일상이 있는 타국으로 씩씩하게 돌아갔다. 매년 만나는 할머니는 고요하며 작아졌다. 할머니가 평온해지니 눈치 없는 손녀는 평온해졌다. 잔소리 없는 귓가의 공백으로 인해 안도감도 들었다.
할머니는 팬데믹이 뒤덮은 그 세상을 훌쩍 떠났다. 손녀의 동생마저 유학생활을 시작한 지 오 개월 된 무렵에 잔소리를 들어줄 손녀, 손자가 없는 그 집이 이제는 지긋지긋했는지 떠났다. 할머니가 완전히 떠난 지 이제 다섯 해 가까이 지났다. 손녀의 눈치 없는 평온함 여전히 사무치게 원망한다.
할머니의 부재는 손녀를 텅 비게 했다. 그 공허함은 시간이 지나도 잘 채워지지는 않는 듯하다. 어쩌면 그 공간 속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도록 손녀의 마음을 비울 수 있는 성숙한 틈이 생긴 건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