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로 돌아오기
찌릿하고 불쾌한 감정들이 내게 들어올 때마다 긴급 처방전이 있어서 참 좋았다. 불쾌한 감정을 인지하고 잠시 호흡으로 나의 중심을 가져와 보기. 내 마음 연못에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온다. 잠시 내 들숨과 날숨을 헤아려 본다. 다섯 번. 또 다섯 번. 이 단순한 호흡 활동으로 금세 소나기가 잦아든다.
2024.3.14
명상의 시작
길고 긴 어두운 밤이 지나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요즘의 나는 한낱 인간이라는 걸 일상 속 크고 작은 나의 감정의 회오리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작년 겨울엔 수녀님과 마음 근력 만드는 운동도 열심히 트레이닝받고 왔다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어리고 여리다.
나는 명상 수련원에 가 본 적도 없고 명상을 해야겠다는 굳은 마음을 먹은 적도 없다. 그저 우연하고 자연스럽게 명상을 접했다. 골치 아프고, 찝찝한 미팅을 끝내고 환기를 위해 동영상 플랫폼을 열었다. 마음 훈련을 위한 강의들로 가득한 나의 시청 기록 사이, 추천 탭에서 명상 가이드를 우연히 마주쳤다. '속는 셈 치고 3분만 따라 해 보자.'가 내 마음 챙김의 시작이었다.
믿기지 않을 만큼 꽤 효과가 있어서 조금 어안이 벙벙했다. 휘몰아치던 감정이 짧은 3-4분 내 호흡을 바라보고 나서는 산들바람이 된 듯 잠잠해졌다. 물론 어떤 때는 금방 다시 회오리가 올라왔지만 그럼 또 반복해서 호흡에 집중을 해 보았다. 또 속는 셈 치고 다른 명상 가이드도 들어보자고 생각하고 명상 앱을 받아 하루에 한 번, 많게는 3-4번 가이드를 틀어두고 지금 이 순간으로, 나의 호흡으로 돌아오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2024년 6월 29일
내 마음은 하늘과 같다. 분명 파란 하늘은 언제나 내 마음 안에 있다. 먹구름이 끼어서 잘 안 보일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안개가 끼고 비도 와서 파란 하늘을 가릴 때도 있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하늘은 있다. 눈이 부시게 새파랗게.
마음에 먹구름이 들어왔다고 해서 너무 당황하지 않아도 된다. 혹은 당황 좀 해도 괜찮다.
김창완 아저씨도 마음이 날씨와 같다는 말을 하셨다. 어떤 날은 비도 오고 또 어떤 날은 해가 뜨고 또 눈이 왔다가 바람도 분다. 확실한 것은 그 모든 게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저 다들 잠깐 왔다 지나간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은 '지금 여기로 돌아오는 것'의 반복적인 행위가 뇌신경 가소성이라는 능력을 통해 나의 뇌를 긍정적인 패턴으로 자리 잡도록 한다는 것이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일상 속의 짧고 긴 스트레스가 찾아오면 어김없이 호흡을 찾았다. 콕 집어 말할 수 있는 이득은 없다만, 나는 분명 호흡을 바라보면서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힘이 줄어들고 있다.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뿐만 아니라, 내 경험을 통해서 명상의 순기능을 이해하게 된다.
2024년 9월 8일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다. 최근에서야 배워가고 있는 마음 챙김 명상을 하며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영성 책의 내용과, 작년 겨울에 만난 크리스티나 수녀님과 올해 여름에 만난 K수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가톨릭 기도가 놀랄 만큼 명상과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기도는 마음 챙김을, 마음 챙김은 기도를 품고 있었다.
지난겨울 한 달에 한 번씩 명동에 수녀님께 다녀왔다. 수녀님이 그때 해 주신 여러 가지 조언들이 생생하게 남아 마음이 힘들곤 하면, 수녀님의 말씀이 내 귓가에 종종 들린다.
"마리아, 마음이 힘이 들 때는 미사가 아니어도 돼. 조용한 성당에 들어가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께 말을 걸어봐요. '예수님 제가 이런 것 때문에 마음이 힘들어요' 하면서 말이에요. 그리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봐요."
" '나는 참 잘해 왔고, 지금도 참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참 잘 살아갈 것이다' 내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 줄 수 있어야 해. 그리고 사실이 그렇고."
이번 여름에 수도원에서 K수사님께 내 마음을 보여드리니 수사님께서 이렇게 말해 주셨다.
"마리아, 마음이 힘들 때는 그 마음을 하느님께 고해 보세요. 그러면 하느님이 그 마음을 들어주실 거예요."
부정적인 감정이 느껴졌을 때 그 감정을 신에게 털어놓는 행위(기도)와 그 감정을 알아차리고 바라보고 놓아주는 행위(명상)가 같은 맥락임을 자꾸만 느낀다. 시간차를 두고 같은 가르침을 반복해서 들려주고 있었다. 마음 운동법은 어찌 보면 정답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호흡에 집중하는 명상을 하며, 수녀님과 신부님께 기도에 대해 배우며, 명상과 가톨릭의 기도가 꽤 비슷한 형태와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몇 가지 알아차린 그 둘의 닮은 점을 적어보려고 한다.
한 마디로 관상 기도는 현재에 머무르며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경청하는 상태. 나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기도의 형태를 말한다. 마음 챙김 명상은 호흡을 느끼고 관찰하며 현재에 머무르는 상태를 말한다.
다른 한 마디로, 명상은 쉼이다. 기도는 사랑하는 존재를 만나는 시간이다. 즉, 쉼이다.
명상은 행위의 중심을 호흡에 두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기도는 중심을 내 안의 예수님에게 두는 것이다.
불편한 감정이 느껴지고 마음이 괴로울 때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고하는 것이 기도의 한 가지 형태이다. 불편하게 머릿속을 휘몰아치는 감정을 다그치거나 없애려 하지 않고 그 감정이 머릿속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행위가 명상의 한 가지 형태이다. 무엇보다 불편한 감정을 기도와 명상으로 대하게 되니,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그 감정과 상태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순간을 통해 나의 존재를 포용하는 시간을 갖게 되기도 한다.
분심이란? 마음 챙김을 하며 호흡을 바라보며 현재에 머무르려 해도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이 들 수 있다. 당연하다. 그 생각들이 떠오르면 그저 '이런 생각이 들었구나.' 하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 생각에 휩쓸리기보다 호흡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 생각이 중요하다면 명상이 끝나고도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기도 중에 물론 분심이 들 수 있다. 하지만 괜찮다. 그 또한 치유의 과정이다. 다시 기도로 돌아오면 된다.
평가의 척도는 없다. 기도는 나 스스로 혹은 신에 대한 평가를 내걸고 하는 행위들이 절대 아니다. 코감기에 걸려서 병원에 가면 누군가는 사흘 치 약을 먹고도 금방 낫는 반면 누군가는 열흘 치 약을 먹어도 감기 증상의 호전이 더딜 수 있다. 그저 개인차이지만 누구도 그걸 '네가 빠르네. 네가 느리네.' 하며 평가하지 않는다. 명상 또한 마찬가지이다. 잘하고 못 했다는 점수를 매길 수 없고 그건 의미 없는 일이다. 그저 아주 잠시라도 내가 생각을 내려놓고 지금 여기로 올 수 있는 순간이 반복되었다면 그걸로 되었다. 잘하고 못 한 기도 역시 없다. 기도를 통해 쉼을 얻었는가? 마음을 내려놓고 쉴 수 있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명상 앱에서 여러 가지 가이드를 들어보며 어느새 숙련자 명상 가이드도 따라가 보는 시기가 왔다. 그러면서 궁극적인 마음 챙김의 목표가 자애심 갖기라는 걸 알았다. 나에 대한 자애심을 길러서 한 걸음 나아가 타인을 향한, 그리고 세상을 향한 자애심을 갖는 것이 명상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한다. 언젠가 내 마음이 그 목표까지 미칠지는 미지수의 미지수이지만 점점 납득이 가는 논리이다. 어릴 때부터 들어온 기도의 목적과 목표도 이제 마음으로 와닿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갖도록 기도하며, 예수님의 눈으로 이웃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지향한다. 그걸 다른 말로 자애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역시 머리로 이해는 가지만 내가 다다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매일, 매 순간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기도나 명상을 하는 이유가 또 있을까? 기도를 하는 큰 이유는 기도 시간 외의 일상에서 내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함이다. 아무리 완벽한 기도를 했다고 한들 그 사람의 일상이 욕심, 화, 질투로 가득하다면 그의 영을 위한 기도는 의미가 없다. 무엇보다 일상 속의 '나와 나의 관계', '나와 이웃의 관계'를 위한 선을 실천하는 것이 모든 종교의 보편성이라고 생각한다. 마음 챙김을 하는 이유는 아주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끈을 놓지 않고 꾸준히 하고 있는 것 같다. 마음 챙김을 통해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작은 노력으로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일상의 어떤 부분에서 감정이나 생각의 불편감이 왔을 때 온전한 나의 힘으로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올 수 있는 힘을 기른다.
마음을 근육이라고 보고, 기도와 명상을 운동에 비유한다면 최고의 가성비 운동 방법이다. 마음 근육을 키우기에는 이만큼 접근성 좋은 운동이 있을까 싶다. 일상 속 아주 잠깐이라도 기도를 통해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지금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을 알아차릴 수 있다. '오늘 출근길 속 파란 하늘과 붉은 단풍을 보게 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저 동료를 질투하는 마음이 들어요. 제 마음을 알아주세요.' 명상을 하고자 하면 내가 원하면 어느 시공간에서든 바로 지금 여기로 돌아올 수 있다. 긴장감 속의 길고 긴 미팅 속 잠시. 꼰대와의 소개팅 중 잠시. 아주 잠깐이라도 할 수 있다.
실용주의적 측면에서 명상은, 감정의 실용도를 판단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좋고 나쁜 감정은 없다. 단, 그 생각과 감정이 지금 현재의 나에게 이로운가 혹은 그렇지 못 한가를 알아차리고 생각과 감정에 실용도를 매기는 것에 방점이 있다. 이게 어렵다면, 기도 속에서 나와 신과의 관계를 찾아볼 수 있겠다. 부모님이 자녀를 바라보는 시선을 신의 시선이라고 생각해 본다. 지금 이 내 기도를, 내 마음을 부모님이 듣는다면 나에게 어떤 위로를 해 줄 것인가. 내 마음속의 신이 나를 향해 위로와 응원을 할 수 있는가에 방점이 있다.
기도와 명상으로 보낸 시간 이외에도 비슷한 점을 찾았다.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크고 작은 고통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고통과 행복은 일시적이고 반복된다. 반복되는 감정이나 고통은 어쩌면 그 안에 신호가 있다. '그걸 통해서 내가 어떤 것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배움의 신호, 혹은 그 고통이 지나고 오는 행복의 신호일 수 있다.
Follow your gut
대학교 4학년. 첫 돈벌이에 대한 두려움, 앞날의 막막함이 가득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나의 밥줄이 달라질 것 같아 두려웠다. 어떤 회사에서 인턴을 해야 하나. 이런 수업을 들어야 하나. 모든 선택들에 고민이 참 많았다.
고심 끝에 선생님들께 이메일을 보내고 상담을 받아보아도 결국 내가 듣는 조언은 Follow your gut. That's the right thing to do. 처음에는 저게 무슨 말인지도 몰라서 사전도 찾아보았다. 그래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 수십 번 다시 읽어 보았다.
내가 나고 자란 문화로 번역을 해 보자면 '너의 마음을 따르라.'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아마 내가 그 당시에 이해가 가지 않았던 이유는 언어의 장벽 이외에도 정답을 바라는 마음 때문이지 않았을까. 나는 분명 어느 정도의 틀이 있는 조언을 바라고 선생님을 찾아갔는데 결국 돌아오는 대답은 '네 마음 가는 대로 해.'였다.
궁극적으로 꼭 생각해 보아야 할 그 부분을 그 어린 나는 이해가 안 가니, 내 마음을 따를 수 없었다. 그래서 고민과 계산 끝에 '나의 머리'를 따랐던 것 같다.
10년쯤 지난 요즘 그 관용어의 의미를 깨달아 간다. 나의 정답은 나의 마음 안에 있다.
어쩌면 세상의 다양한 종교가 다양한 문화적, 역사적 형태를 통해서 같은 진리를 추구하는 게 아닐까?
지금 여기 중심으로 돌아오기.
그리고 내 마음의 평화를 찾아오기.
모든 것은 내 마음의 평화로부터 시작된다.
인생의 목표란, 매 순간 다른 감정들 속에서 마음의 평정을 찾아가는 데 있다.
나이롱 신앙인으로서 '기도를 왜 하나, 명상을 왜 하나'에 대해 의문을 가져본 적도, 답을 찾으려 한 적도 없다. 그저 요즘 들어 유난히 어렵게 느껴졌던 것, 부정적인 감정이나 고통을 현명하게 지나 보내는 지혜를 찾아 헤매었다. 그러다 문득 접한 마음 챙김 명상, 기도가 내가 찾았던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해 주는 도구라는 걸 깨달았다.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어려운 퍼즐의 한 조각을 맞추고 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아무리 알고, 깨닫고 해 봐야 부질없다. 마음공부에는 끝이 없다. 나는 평범한 인간이고 나에게 매일의 행복과 고통이 주어진다. 마음의 평화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는 건,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을 그저 반복하고 연습하는 것뿐이다. 혹한기 만반의 준비를 한 어떤 마음은 준비가 무색하게 눈보라에 무너지기도 한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듯, 내 마음의 섭리를 감사하게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