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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그릇 Mar 25. 2024

#12. 지난 11년, 쓰면서 버틴 시간들

원체 나는 생각의 끄적임, 그림의 끄적임 같은 기록을 좋아하고 지난 다이어리 수집을 꾸준히 해왔다. 

일관성 없는 사이즈와 디자인, 패턴들이 지난 11년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준다. 권, 들춰다 보니 부끄러운 기록들이 많다. 


PART 1. 2013년~2016년. 

미국에서의 짧은 신혼과 첫째 출산 후 다시 한국으로 역이민을 와서 정착하는 과정에서 느끼던 감정들. 사색들. 끄적임 - 보통은 괴롭고 고통스러웠던 기억이다. 

오늘 아침 출근 전 어쩌다 몇 권을 들춰봤는데 전남편에게 받았던 모욕, 고통, 언어학대, 언어폭력이 내용의 60~70프로였다. 참 씁쓸하면서 슬펐다. 그리고 많이 나왔던 내용이 나의 분노 조절, 화, 억울함, 속상함,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 어찌할 없는 무력감, 와중에도 열심히 써내려갔던 버킷 리스트, 간혹 보이는 예산 짜기 (고정지출, 예상지출 등).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미술치료와 상담을 공부하고 싶어서 공부의 흔적, 초기 멤버들과 전시회를 준비했던 흔적들도 간혹 보여서 반가웠다. 다행인 건, 한창 말이 틔이던 첫째의 예쁜 기록 노트가 소중하다. 가슴 아리게 소중하고 귀하다. 


PART 2. 2017년~2021년. 

별거를 16년 겨울부터 시작하면서 17년에는 쓰지 않고는 정말 버티지 못한 날들이었다. 날려쓰기, 흘려쓰기, 낙서하기, 그림그리기, 그 와중에 아이들의 흔적과 낙서까지도 모두 소중해서 버리지 못하였다. 미술치료를  배우고 실전에서 상담사로 일하며 본격적으로 셀프 작업으로 하며 흔적으로 남긴 그림들도 하나같이 귀하다. 어디 누구에게 떳떳히 보이지는 못하지만, 어제 집정리를 대대적으로 하면서 지난 기록을 모두 버리려고 했던 나의 짧은 생각이 조금 부끄럽기까지 하다. 나를 이토록 사색하게 하고 돌아보게 하고 반성하게 하고 살아있다고 느끼게 한 흔적들인데... 20년에는 제주로 이주하면서 여행에 관한 흔적도 조금 색다르게 들어가 있다. 모든 것이 나의 발자취이다. 


또 하나의 감사한 창구는 바로 현재는 30만이 넘는 회원수를 보유하고 있는 돌싱 (돌아온 싱글 = 이혼자, 사별자), 올싱 (올드싱글) 들의 카페이다. 16년, 아주 시리고 시린 겨울 한 가닥 동앗줄이라도 잡고자 "나홀로 이혼 소송"을 검색했던 카페에서 수 많은 사람들의 별거, 이혼, 이혼 과정, 이혼 후 적응의 모습들을 글로 사진으로 보며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 안에서 나는 충분히 익명성을 담보받고 나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글쓰기가 주는 치유의 힘에 대해 간증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글쓰기를 통해 많이 회복할 수 있었다. 어쩌면 공감을 해주고 위로 해주던 사람들의 피드백의 힘도 아주 큰 부분이었을 것이다. 



PART 3. 2022년~지금까지. 

20년 5월, 제주에 정착하기 시작하고 점점 기록이 줄어들면서 바쁘게 살아왔다. 무언가 끄적이긴 했는데 그다지 내세우고 싶지 않은 연애의 기록이 있어서 그 부분은 모두 다 파쇄해버렸다. 때론 부분적으로 삭제하고 태워버리고 싶은 기억이 있으니까. 전남편과의 기억은 참 고통스럽고 아팠는데 모두 다 태워버리는 게 안되는 게 아이러니하다. 아마도 그때의 나를 부정한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 없어서 그런 것일까. 생생하게 아팠던 기억이라 노트를 들춰보는 것조차도 고통이 스며드는 느낌이다. 하지만 기록은 나를 버티게 해 준 원동력이기도 했기에 마냥 이렇게 버리지도 못하고 제대로 간직도 못할 수는 없다. 


5월 말, 이사도 앞두고 있고 서서히 내 주변을 정리하고 있다. 

여러가지를 생각하며 비워내는 중이다. 사실은 생각조차 비워내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물건들, 특히 버리지 못하거나 처분하지 못했던 책들을 많이 정리하고 있다. 

당근으로 판매를 했는데 헌 책, 새 책 모두 해서 거의 25만원 정도가 판매되었다.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한 비움 아닌가! 


기록을 줄이는 방법도 생각 중이다. 

좀 더 정갈하고, 단정하고, 짜임새 있는 정리. 

내 주변을 그렇게 정리해나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나를 더 다듬어 나가고 싶다. 


쓰면서 버티고, 버텨졌던 지난 11년. 그리고 나의 흔적, 참 소중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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