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대학원 동기가 얼마전 카페 봄봄 **점의 사장님이 되었다. 최근 몇 달, 스트레스로 살이 부쩍 찐 나에게 주말에 한 두달만 와서 카페와서 일하면 살이 쏙쏙 빠질 거라고 현혹하기도 했지만 내가 넘어갈 리는 없지. 카페 알바에, 거기다 주말에 하는 알바라, 크게 매력을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요즘 내 인생 리셋이 필요한 시점에 내 방식으로 건강하게 다시 나를 관리하고 살을 빼보겠다는 다짐이 들고 있기 때문이기도.
그도 그럴 것이 내게 가장 큰 불안과 스트레스 요인이 되고 있는 '어떤' 사안때문에 입맛도 없어지고 사람 만나는 일정도 최대한 피하고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대학원 동기가 "누나 ㅇㅇ 보고 나서 정말 내 마음이 다 덜컥했다."라고 마음을 보인다. 또 다른 친한 아꼬운 대학원 동기는 "언니, 내 마음이 다 미어져... 부디 마음 잘 추스리기를."라고 또 마음 한 칸을 덜컥 내준다. 깊은 인간관계를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학위, 목적 하나로만 진학한 대학원이라 그런가, 이들의 존재가 말 그대로 선물같다. 얕고, 깊고, 넓고,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이란, 나이 먹는 것과 비례하여 줄어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역시 기대하고 있지 않을 때 다가오는 인연이라던가, 기회라던가 하는 것의 감동이 더 크다.
그러니까 위안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 놓게 되었고, 나에게는 이런 간질간질한 혹은 몽글몽글, 몽실몽실한 감정도 물론 중요하지만, 부쩍 '쾌락'이 가진 '위안'이라는 속성에 대한 사색이 늘고 있다는 말을 하려고 한다.
사전적 정의로 한자는 (快 쾌할 쾌, 樂 노래 악)快樂快
영어로는 pleasure, delight, enjoyment.
그러니까 단순한 유희일 수도, 즐거움일 수도, 기쁨일 수도 있는'쾌락'이 한때 청교도에 의해 한탕주의, 저급한 세속주의 취급을 받게 되기도 했다는 걸이데올로기적인 해석으로만 치부하기엔 그 스펙트럼이 넓다. 쾌락주의로 들어가면 (快樂主義, hedonism) 우리 모두 도덕, 윤리 시간에 잠결에 들어 봤을 인문철학적 이념이기도 하지 않겠나. (그래서 지금부터 몇 줄은 n사의 집합지식을 빌려 써본다) "인생 최고의 가치 있는 목적이자 최고의 선(善)으로 보았다는 쾌락주의 사상. 인간의 모든 행동과 도덕의 기준을 쾌락 추구에 두는 윤리학적 입장, 가능한 많은 쾌락을 취하는 것을 행복이라고 주장한 키레네학파와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여 쾌락의 질적인 차별을 인정한 에피쿠로스 학파. 벤담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 등이 있다"
다시 잠에서 깨서 '쾌락이 위안이 될 수 있다'는 내 주장에 대한 뒷받침을 슬쩍 더 얹어 보자면, 오히려 인간의 기본 욕구로 여기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쾌락'이 주는 다중적 해석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그래서 얼마전부터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위안이라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쾌락은 식도락에서, 여행에서, 독서에서, 섹스에서, 취미에서, 연애에서, 관계에서 다양하게 올 수 있겠지. 다만 생각컨대 쾌락으로 인해 타락하면 나락으로 갈 일뿐인 것. 그것이 또 쾌락의 속성, 양날의 검일지도 모르겠다.
맹목적이고 탈목적성을 추구함으로써
타락하지 않길.
나락으로 가지 않길.
부디 쾌락, 그 자체로서의 목적 그대로 즐겁고 편안하길.
쾌락, 그것은 위안으로 가는 길. . .
#오랜만에불면
#이또한쾌락
#이또한위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