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안그릇 Jul 27. 2024

# 17. 기록되지 않은 아픔, 토해내지 못한 그림

살갗이 뜯겨 나가는 아픔이 이 정도일까 싶은 마음의 고통은 가끔 글로도 그림으로도 표현이 안된다. 아무도 보는 곳에서 혼자 짐승처럼 울부짖거나 애달픈 눈물이 아이라이너를 사정없이 지워대며 볼을 타고 내려와 얼굴을 엉망인 체로 두어도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다. 눕고 또 누워있고 먹고 또 먹어대다가 나를 방치해놓는 상태까지 가고 나면 가끔 깨닫는, 정말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까지 마음이, 또. 또 무너져야 하나. 절제되지 않는 아픔을 절제되지 않는 식욕으로, 수면으로 풀어내다가 생경한 경험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별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있고, 보내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있고, 남겨둘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있고, 멀어질 수 없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건 나의 의지로도. 절박함으로도. 떼를 쓰는 연약하고 철없는 마음으로도 되지 않는다. 오로지, 희미하지만 단단히 연결된 보이지 않는 빨간 실로 묶여 있는 인연의 연결로만 가능하다. 내 마음을 활자로 기록조차 할 힘이 없을 때, 붓을 들고 웻온웻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겨우 몇 마디 적어 놓고 위안을 삼았다. 수채화 기법 중에 하나인 웻온웻. 간단히는 물로 종이를 채우고 그 위에 수채화로 끄적이면 끝이다. 젖은 거 위에 젖은 거. 젖은 마음 위에 젖은 마음. 눈물로 흠뻑 젖어 있는 마음 위에 또 눈물로 젖어 있는 마음. 물감의 색감이 물에 희석되고 번지고 내 마음같지 않게 모양을 그려대는 것을 지켜보는 게 위로라면 위로였다. 물감조차, 색깔조차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구나. 정작 내 마음대로 하지 않기로 마음을 비워두자 나름의 패턴이 알아서 그려진다. 물과 색깔이 만나 종이 위에서 젖은 체로, 젖은 그대로. 


오랜만에 모녀 상담을 의뢰받아서 2시간 가까이의 거리를 총 12회기 다니기로 했다. 이젠 제법 정규직 티를 내며 다니는 직장인이 되었지만 프리랜서 미술치료사로 살면서 불안정한 수입에도 내담자를 만날 때 나는 충만하게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나의 전문성과 임상 경력을 내세우긴 여전히 부끄럽지만 실존적 인간으로 마주하는 내담자에게 나의 시간을 온전히 내어주고 공감해주고 들어주는 행위는 평소에 가까운 이들, 굳이 일컫자면 가족, 그리고 가까운 특정인에게는 외려 어려운 일이다. 2년 전인가, 아직 코로나가 우리를 잠식했을 때, 온라인 학술대회에서 미국의 미술치료사를 통해 직접 접하게 된 '반응미술치료 작업'. 그러니까 말로 내담자에게 반응하고 공감해주는 상담의 방식을 미술치료사는 그림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시도해보고 싶었고 의미있을 것이다 생각했고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내담자를 만나며 과거의 나와 직면하는 나를 위한 치유도 필요했기에, 그래서 이번 모녀에게 적용해보기로 했다. 


외국 생활, 이방인의 삶, 자녀 둘, 나이를 불문하고 삶의 결이 통한다면 친구가 될 수 있는 태도, 즉흥적이면서 조급한 성향, 느긋하면서 쉴새없이 바쁜 두 눈 그리고 마음, 열릴만큼 열려 있다가 갑자기 닫히는 마음, 어두움이 익숙하면서 밝은 척 하는 어쩔 수 없는 이중성. 중국 국적의 그녀의 이야기, 이혼을 겪고 한 아이는 키우고 한 아이는 조건 하에 만나야 하는 그녀의 젊은 날. 그녀의 지난 시간. 그녀의 엄마됨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상담사, 미술치료사로서의 내 아이덴티티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기록되지 않는 아픔이 꾸역 꾸역 새어나올 때 그림을 그릴 수 밖에 없는 그녀. 아픔을 토해내고 토해내다가 결국은 파랗게 질려버릴 만큼 창백해진 심장의 박동을 들을 수 있는 나. 




그녀가 그린 동적가족화에 영감을 받아 그린 protect, safe, mother nature 라는 작품이다. 

<보호, 해줄게. 지켜줄게, 안전하게. 엄마 품에서> even though my heart is torn apart and shattered into pieces, protecting you from inside out has always been my priorty. 


Undescrible pain goes away, it is still in your palm because you are holding it. Once you let go of it, it shall go away. It is meant to be that way. Pain isn't holding you, you are holding on to it. 


고통이 주는 의미를 찾으려고 애를 써서 더 고통스러웠던 건지도 몰라. 

의미를 찾지 않고 고통이 온 것을, 그 자체 만을 받아들이는 게 실존주의적 삶일텐데. 나는 아직 이론만 되뇌이고 있다. 그렇게 살아가지를 못하고. 부족하다. 늘. 목마르다. 아직 덜 디었나. 아직 고통이 견딜만한가. 

씁쓸하고도 사실다워서 아릅답다. 고통의 본질인가 이것이... 






작가의 이전글 #16. 그들은 아직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