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마케터 : 직무는 핑계고, 일단 사야겠어?
마감이 코앞인데 며칠째 빈 문서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다. 오늘은 글의 신께서 찾아와 주지 않으시려나. 저녁 즈음엔 물이라도 한 사발 떠 놓고 빌어야 하나. 그도 아니면 굽신굽신 모드를 장착하고 이번엔 마감 일정을 미루는 게 어떻냐는 달콤한 유혹을 퍼트려 봐야 하나. 이리저리 잔머리를 굴려보지만 이렇다 할 멋진 문장이 생각나진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에피소드의 주제는 그동안 직무를 해내며 겪었던 디깅에 관한 것인데 카메라 매거진에서 얼추 10년의 시간을 보낸 디그다와 나오에 비해 내가 근무한 기간은 2년이 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입도 아니고 경력직으로 입사했지만 저서며 강의며 다방면으로 활약 중인 고명한 마케터들과 나를 동일 선상에 둔 모습을 상상해 보니 어딘지 모르게 이질감이 들어서 말이다.
매거진 B는 에디터를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좋은 것을 골라내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반면 마케터는 조금 다르다. 에디터가 추려낸 좋은 것들을 맛깔나게 포장하고 파는 일에 집중한다. 모 기업의 한 마케터가 자신은 ‘일종의 취향을 파는 사람’이라 했는데 이 표현이 딱 맞다. 최종 소비자의 입맛에 맞게 상품이나 서비스를 멋스럽게 꾸미는 것을 원론적인 목표로 두고, 홍보 플랜을 짜서 실행하며 그에 따른 지표를 분석하고, 때로는 필요한 자료를 직접 만들어내기도 한다. 언젠가 가까운 후배가 언젠가 내게 정확히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나는 “MD=AE=PM=Editor=Marketer”라는 답을 내놓았다. 우스갯소리로 했지만 마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너나 나나 매한가지니까.
그동안 스스로 ‘나는 취향을 파는 사람이 맞는가’라는 질문을 여러 번 했다. 직업적인 딜레마나 근무 환경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은 아니고 일하는 나와 원래의 나, 그러니까 두 자아가 이따금씩 상충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중요한 건 팔지도 못하면서 사기만 오지게 해 대는 내 모습에 현타가 온다는 것이다. 이 에세이의 소개글에도 남에게 취향을 팔기보단 매번 본인이 사기만 하는 전직 마케터라고 나를 표현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덕후의 마음을 두근두근하게 만드는 굿즈들은 단순히 예쁘기만 한 게 아니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많은 고민을 안고 크고 작은 인력들이 투입되어 밤낮으로 노동을 쥐어짜 결국 세상에 나왔다는 스토리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역으로 하나씩 짚어보면 공정 과정까지 눈앞에 그려진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양한 브랜드의 굿즈와 서비스를 접하며 당장 다음 주에 발행할 홍보용 카드뉴스에 디자인을 수정하거나 영감을 얻은 것을 자료화 해 종종 회의 때 공유하기도 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직무를 가장한 핑계 같지만 일단 나는 지금 눈앞에 놓인 이걸 사는 수밖에!
나는 영화라는 매체를 비디오테이프로 처음 접한 세대이다. 요즘이야 OTT 서비스가 잘 되어 있어서 시공간의 제약 없이 소비자가 원하면 언제든 볼 수 있는 게 영화지만 그때는 동네에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이 하나씩은 꼭 있었고 신작이 나오면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할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는 엄마를 따라다니며 비디오를 빌려다 봤는데 종종 혼자 가서 “엄마 심부름이요.”라는 거짓말로 사장님을 속여가며 나이에 맞지 않는 영화들을 섭렵하곤 했다. 아마 그즈음부터 영화를 향한 나의 애정이 시작된 것 같다. 수집병이 남달랐던 플레이 어린이는 영화를 한 권의 책처럼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고 살았는데, 그러던 어느 날 비디오테이프가 아니라 얇고 가벼운 한 장의 CD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DVD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오직 영화만 수록된 일반판, 배우들의 스페셜 인터뷰나 메이킹필름을 부가영상으로 담은 SE(Special Edition) 버전, 나 같은 시네필들의 소장 욕구를 마구 상승시키는 패키지를 가진 CE(Collector’s Edition) 버전, 그리고 출시부터 넘버링을 박아 한정된 수량만을 제작해 판매하는 LE(Limited Edition) 버전까지 DVD의 전성시대는 그야말로 다채로웠다. 시리즈물을 엮은 박스 세트도 출시됐고 대본집이나 포스터 카드를 구성품으로 끼워주는 특별판도 많았다. 본격적으로 이 수집에 동참하기 시작한 건 소비에 제약이 없는 성인이 되면서부터라 그전에 출시된 DVD들은 전부 중고로 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서점사에 연 300만 원 이상 소비하며 가장 높은 멤버십 등급을 늘 유지하는 호구가 아닌가. 감사하게도 친절한 A사는 중고 매장마다 입고된 상품들을 언제 어디서든 검색해 볼 수 있는 데이터를 제공한다. 종로나 동묘 등의 구제시장에서도 중고 DVD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그곳은 아직까지도 불법 복제판이 정식판으로 둔갑해 숨어 있는 위험이 있다. A사의 중고 매장에서 서적이나 음반을 팔아 본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스크래치는 없는지, 구성품은 모두 다 있는지 직원이 꼼꼼히 확인 작업을 거친 후에 매입 작업이 이루어진다. DVD나 음반의 경우 구매 후 집으로 가서 재생을 했을 때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환불도 해 준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제도인가.
<타이타닉>(1998) 디럭스 콜렉터스 에디션! 매물이 잘 들어오지 않아서 3개월이 넘게 매일 검색을 해 보다 밤늦게 인천 소재의 한 매장에 입고된 것을 확인하고 다음 날 오픈 시간을 맞춰 방문했다. 안에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코멘터리와 스토리보드 제작 과정, 배우들의 캐스팅 비하인드, VFX와 포스터 작업 과정, NG모음 등의 부가 영상이 수록되어 있다.
<쉰들러 리스트>(1994)의 개봉 10주년 기념으로 출시된 SE 버전. 함께 동봉된 북클릿에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영화를 촬영하게 된 경위, 그리고 촬영 방식에 대한 설명이 쓰여 있다.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은 매물을 겨우 구해서 추가로 손상이 가지 않게 잘 보관 중이다.
<쥬라기 공원>(1993)부터 <쥬라기 월드>(2005)까지 총 4편의 시리즈가 함께 들어 있는 컬렉션 2. 부가영상으로는 삭제씬과 공룡 제작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2022)까지 포함된 박스 세트를 기다리고 있는데 스틸북 형태의 블루레이만 출시되고 더 이상 소식이 없다.
최초의 유성영화인 <재즈 싱어>(1927)를 고화질로 리마스터링 한 판. 눈에 띄는 희귀한 부가 영상은 없지만 소장가치가 충분해서 구매했다. 2013년에 제작된 DVD라서 다행히 중고가 아닌 새 상품을 살 수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박스 세트는 이런 형식이다. 애니메이션 버전과 실사영화를 함께 묶어 출시한 구성은 정말 두고두고 칭찬하고 싶다.
안타깝게도 DVD는 사양산업으로 분류되어 이제는 예전만큼 활발하게 출시를 하지 않는 추세이다. 파일 형태로 영화를 불법 공유하는 P2P식 플랫폼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이에 대안과도 같았던 블루레이가 등장했지만 더 나은 화질과 음질로 감상할 수 있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전용플레이어가 따로 있어야 한다는 번거로움과 꽤나 가격 때문에 그저 아는 사람들만 수집하는 문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다 현재의 OTT 시대가 열렸고 얼마 전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는 <오펜하이머>(2023)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블루레이의 생산은 없을 것이라 발표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본 후 장당 천 원에 출력할 수 있는 포토 티켓은 DVD의 빈자리를 채우기에 충분했다. 대부분 영화의 포스터나 좋았던 장면들을 선정해서 넣지만 나는 미니멀하게 꾸며진 아트 포스터나 팬 메이드 포스터 위주로 뽑은 것이 많다. 특히 외국의 금손님들께서 만든 아트 포스터는 <킬 빌>(2003)의 칼이나 <베이비 드라이버>(2017)의 MP3 플레이어처럼 영화 속 상징이 되는 아이템들에 초점을 맞춰서 디자인하는 콘셉트가 많은데 이게 또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이 작은 게 뭐라고 어느 지점의 몇 번째 기계가 프린팅이 잘 되는지까지 달달 외오고 다닐 정도로 미쳐 있었는데, 영화를 보러 갈 여유가 되지 않을 때는 지인들에게 대리 출력 부탁까지 하다가 결국 사진 인화 업체에 직접 주문을 넣어 영화관에서 소비를 하지 않고도 굿즈를 챙길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2018)가 개봉했을 땐 실제 퀸이 참여했던 라이브 에이드 공연의 실물 티켓 이미지도 커뮤니티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역시나 덕후는 이런 떡밥을 놓치지 않지.
가끔은 포스터 대신 영화의 한 장면을 선택해서 넣었다. 영화관에서 제공하는 포토 티켓은 가장자리에 여백이 있지만, 주문 제작한 포토 티켓은 이렇게 여백 없이 사진을 채워 넣을 수 있어서 더 좋았다. 게다가 양면 인쇄도 가능하고, 용지의 유/무광 여부도 선택이 가능하다. S 업체는 제 절을 받으세요.
<기생충>(2019)의 국내 개봉을 앞두고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이 송강호 배우에게 무릎을 꿇고 상을 바치는 듯한 모습의 사진을 보게 됐다. 포토 티켓으로 뽑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또 친절한 금손님께서 해당 이미지를 포스터처럼 만들어 커뮤니티에 배포해 주셨다. 한국 영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정말 잘 만든 포토 티켓이다.
M 브랜드에서 판매하는 300칸짜리 홀더에 극장에서만 뽑은 포토 티켓을 가득 채웠다. 따로 제작 주문한 포토티켓은 아직 100매 정도.
사실 굿즈는 가격이 좀 비싼 편이어도 해당 영화를 만든 제작사에서 공식으로 발매해 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판매이자 곧 소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가 큰 인기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판매용을 제작하지 않는 경우가 꽤 많은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이 머그컵 되시겠다. 영화 <나이브스 아웃>(2019)에서 씬 스틸러의 역할을 제대로 해 낸 이 머그컵은 영화 초반 크리스토퍼 플러머(할란 역)의 죽은 모습이 발견되기 직전 처음 등장하는데 'My House, My Rules, My Coffee!!’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극 중 할란의 성격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이 컵은 엔딩 씬에서도 등장한다. 가정부인 아나 디 아르마스(마르타 역)가 할란의 유산을 단 한 푼도 받지 못한 유가족들을 2층에서 여유롭게 내려다보며 사용하는 바로 그 머그컵.
이리저리 구글링을 해가며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서 이미 판매 중이 아닐까 찾아봤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라이언 존슨 감독이 개봉 후 첫 인터뷰를 할 때 바로 옆 테이블에 자랑스럽게 이 머그컵을 뒀는데 마치 나를 조롱하는 것만 같아서 어찌나 얄밉던지. 당시의 구남친이자 현재 거실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주무시고 계신 내 남편께서 당시에 끙끙거리던 내 모습을 보시더니 그냥 우리가 만들면 그만 아니냐고 솔깃한 제안을 해줬다. 하긴 비공식굿즈로 가방이며 옷이며 못 만드는 게 없는 시대인데 머그컵이라고 못 만들겠어? 다행히 머그컵 안의 문구는 고화질의 이미지가 있던지라 하나하나 누끼를 따서 주문을 넣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앞면은 영화 속 머그컵과 동일하게, 뒷 면에는 아트 포스터 속 이미지를 활용했다.
배송을 받은 후 아까워서 책장에 고이 모셔두기만 하다 몇 번 쓰지 못했는데 신혼집에 입주한 후 식세기 이모님께 컵을 맡겼다가 인쇄가 홀라당 다 번져서 나왔다. 나머지 하나는 손잡이 부분이 깨져서 눈물을 머금고 재활용 쓰레기장으로 보내드렸지만 이 컵과 함께하는 동안 마신 모든 음료는 참 시원했고, 따듯했으며 가끔은 달달하고 때때로 씁쓸했다.
두어 달 뒤면 새 보금자리로 이사를 간다. 그동안 직무를 핑계로 더욱 열심히 소비했던 수집품은 결국 수집을 위한 수집이 되어 버린 게 대부분이지만 보관할 공간이 넓어지니 소유할 수 있는 수집의 카테고리 역시 더욱 늘어나지 않을까. 살면서 모은 DVD와 블루레이가 만 장 가까이 된다는 나의 대학원 지도교수님은 수업 때 자료로 들고 오시면서도 저걸 다 어쩌냐고, 나 죽으면 같이 묻어 달라고 할 수도 없다며 수집을 위한 수집은 되도록이면 자제하라고 조언하셨지만 나는 그것이 디깅의 기본 덕목이 아닐까 생각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가득 찬 서가를 보면서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고 하지 않는가.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게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또 사야겠어?
매주 목요일 발행
현직 에디터와 번역가, 남에게 취향을 팔기보단 매번 본인이 사기만 하는 전직 마케터가 풀어내는 디깅의, 디깅에 의한, 디깅을 위한 에세이. 디깅을 처음 시작하는 분, 다수가 인정하는 프로 덕질러, 이 장르 저 장르 최애는 없고 차애만 가득한 우리 옆집 사는 분까지 두루두루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지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