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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이 Mar 07. 2024

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Part 4. 탐조



     ‘탐조’를 알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몇 년 전 여름 모 브랜드에서 작가 전시 취재 의뢰가 들어와 디그다와 함께 외근을 나갔을 때였다. 당시 편집부에는 취재 담당 에디터가 따로 있었지만 어차피 그에게 자료를 요청해 홍보용 카드뉴스를 만들어야 하는 게 내 몫이었고, 마침 사진전을 본 경험이라곤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머릿속에 환기나 시킬 겸 대신 가겠다고 했다. 무슨 ‘새 사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조류 사진은 어르신들이 주로 찍는 장르 아닌가. 내일은 그쪽으로 바로 출근하니까 늦잠이나 푹 자둬야겠다며 남편에게 깨우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한 뒤 잠을 청했다. 모든 덕통사고의 순간이 그렇듯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작가 L은 전시 타이틀로 <풍찬노숙>이라는 사자성어를 택했다. 바람 풍, 밥 찬, 이슬 로, 잘 숙. 직역하자면 바람을 먹고 이슬을 맞으며 잔다는 뜻이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셔터를 남발하고 그중에서 겨우 몇 장을 건져내는 나와는 달리 최고의 한 컷을 위해 모진 바람과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담아낸 그의 사진들은 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3년여의 시간 동안 군부대를 설득한 끝에 비무장지대 안쪽 임진강변을 날아가는 두루미 가족을 촬영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새들의 경계심을 풀고 최대한 자연스러운 모습을 남기기 위해 함께 동숙을 하며 교감했던 순간까지. 한 점 한 점 전시된 사진들의 촬영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던 그의 눈빛은 꿈을 좇는 소년처럼 반짝였다.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경력을 축적해 온 장인들을 마주할 때면 내가 무언가를 탐했던 것은 그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괜스레 숙연해지곤 하는데, 나는 그날 새 이야기를 할 때마다 빛나는 그의 눈빛에서 이 사람의 덕력은 아마도 만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디그다는 자연환경에 개입하는 것을 최소화하는 촬영 태도가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3) 속 사진작가인 숀 오코넬과 닮았다고 했다. 단순히 역동적인 새 사진이 목적인 이들과는 확연히 달랐으니 말이다. 


     처음엔 탐조가 뭐길래 한 청년이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빠져있는 것일까 궁금했다. 그러다 울음소리가 생경하게 들리는 것만 같은 사진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고, 마침내 취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언젠가 여유가 된다면 탐조에 입문해 봐야겠다는 막연한 꿈으로 일렁였다. 당장 이번 주말 필드에 나간다고 해서 L 작가님의 사진 속 단발머리 저어새를 만날 리는 만무하지만, N사와 D사의 다큐멘터리 영상을 즐겨 보고 N년째 환경보호단체에 월 정기후원을 이어오고 있는 나의 가슴속엔 이미 불씨가 화르륵 타오르다 못해 곧 너른 들판으로 번지기 직전이었다! 위험하다 위험해. 그 사이 디그다는 쌍안경을 구입해 집 근처 호수에서 종종 새들을 관찰한 후기를 전했다. 어느 날은 <프롬 스태프>에 새 사진이 올라오기도, 또 어떤 달은 조류 촬영에 대한 기획 기사를 쓰기도 했다.(아니 이 언니가.. 정말 너무 부러웠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 달 뒤, 해가 바뀌고 봄이 되어서야 나는 ‘퇴사=자유’라는 공식을 품에 안고 탐조에 입문할 수 있었다. 




지금은 새와 생태 관련 서적들로 책장이 터지기 직전이다.


     필드에 나가기 전 탐조에 관련된 서적을 몇 차례 구매했다. 마침 감사하게도 SNS 알고리즘이 적중한 덕분에 나는 책과 해시태그를 통해 탐조 매너와 용어, 준비물, 초보자가 돌아보기 좋은 탐조지 등의 방대한 정보들을 후루룩 흡수했다. 새 덕후들이 모여있는 모 커뮤니티에도 가입했다. 하루에도 수백 장씩 올라오는 고화질의 새 사진들이 어찌나 귀엽고 아름답던지. 새들도 종별로 성격이 조금씩 다른데, 그게 고스란히 느껴져서 또 얼마나 재미있던지. 밤낮으로 보던 유튜브 쇼츠 대신 이제 커뮤질을 놓지 못하는 나를 본 남편이 말했다. “꽤 진심이네?” 응 오빠. 나 지금 누구보다 진심이야. 


내가 탐조에 입문했던 5월 초는 빠르면 육추*를 엿볼 수 있는 시즌이다. 집 앞을 따라 이어지는 작은 하천에서 흰뺨검둥오리 가족의 이동을 발견했다. 총 열 마리의 새끼오리들은 츄파츕스 초코바나나맛 사탕 같았다. 너무 작아서 금방이라도 사르르 녹아내일 것 같은.


지나가며 구경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신경이 쓰였는지 어미는 새끼들을 데리고 상류 쪽 풀숲으로 이동했다. 마침 슈퍼줌 렌즈를 들고 나온 덕분에 반대편에서 조용히 관찰할 수 있었다. 새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탐조의 기본 매너이다.


은밀한 폴더명으로 유명한 직박구리. 이름은 익숙해도 실제로 직박구리가 이렇게 예쁘게 생겼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초망원 렌즈를 대여해 찍은 이 사진은 얼마 전 F브랜드의 전시회에 작게나마 함께 하는 영광을 가져다주었다. 고마워 직박구리야.


     동네에서 텃새들을 관찰하던 나는 더 많은 물새들을 보기 위해 디그다를 왕송호수로 불러내 함께 새를 구경했다.(만삭인 임신부를 무려 한 시간이 넘게 걷게 하다니. 다시 생각해 보니 형부한테 욕을 한 바가지로 먹을만한..) 탐조 메이트가 생긴 그날 저녁 퇴근 후 들어온 남편에게 강아지처럼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셔터스피드는 최소한 화각의 두 배 이상이어야 해. AF는 광각 추적 모드로! 이건 물닭이라는 새고 저건 민물가마우지야. 신기하지? 날개를 푸드덕푸드덕 말리더라고!” 남편은 하루 이틀 정도면 끝날 줄 알았던 나의 새 덕질이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가도록 식을 줄 모른다며 돌아오는 다음 주말 함께 탐조를 약속했다. 무엇이든 내게 응원을 아끼지 않는 우리 집 INFP와 그의 멱살을 잡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길 좋아하는 ENFP의 새로운 취미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남편이 사 준 물총새 티셔츠와 검은머리물떼새 양말. 그리고 저어새 키링까지! 탐조인들 사이에선 이런 류의 아이템을 지니고 있으면 조복이 상승해 멋진 새들을 많이 볼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사건의 발단은 공릉천에서였다. 경기도 양주와 파주, 고양시를 잇는 공릉천은 한강까지 이어지는 큰 하천으로, 그중 탐조 명소로 알려진 하류 부근은 길이만 총 30km에 달한다. 정확히 어느 포인트에서 탐조를 시작해야 많은 새를 볼 수 있는지 위치 정보가 매우 중요한 상황. 그런데 블로그며 커뮤니티며 아무리 검색을 해 봐도 공릉천 탐조 대박이라는 후기만 전해질뿐 스폿은 알 수가 없었다. 남편은 그래도 우리가 결혼 전 주말엔 항상 파주에서 살다시피 데이트를 했으니, 우선은 한 번 가서 가볍게 걸어보자고 했다. ‘그래 일단 가보는 거지 뭐. 강가에 새가 별로 없다면 근처 논에서 저어새나 뜸부기라도 볼 수 있지 않겠어?’ 근거 없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날 우리는 세 시간이 넘도록 풀숲에서 헤매다 머리 위로 날아가는 까치 한 마리를 겨우 볼 수 있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멸종위기종이 아니더라도 서식지 보호를 위해 새들의 정확한 위치 정보는 공유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탐조에는 관심이 없고 사진만이 목적인 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진짜 저어새를 본 건 그다음 주말이었다. 백로인 줄 알고 차를 세운 후 쌍안경으로 확인해 보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L 작가님의 전시회에서 봤던 바로 그 단발머리 저어새였던 것이다! 늘 사진으로만 보던 새를 실제로 필드에서 마주치는 순간, 그 느낌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녀석들은 부리로 논 바닥을 열심히 휘저으며 먹이 활동에 집중하다 어디선가 나타난 백로 한 마리를 보고 깜짝 놀라 날아가버렸다. 뭐야. 덩치만 컸지 완전 순둥이들이잖아?


     여름이 다 지나기 전, 탐조에 제대로 맛이 들린 우리는 요단강에 발 한 번 담가보자며 무리하게 장비 업그레이드를 했다. 둘 다 메인으로 쓰던 바디를 두어 단계 상위 모델로 바꾸고 단렌즈 몇 개를 정리하는 조건으로 망원렌즈도 각각 구매했다. 신혼집 입주 당시 소형으로 구매한 제습함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모습으로 살려달라 아우성치는 듯했다. 남편은 SNS에 사진용 계정을 새로 만들어 차근차근 자신만의 기록을 늘려가기 시작했고, 나는 주중에도 혼자 탐조를 즐겼다. 


남편이 발견한 한여름날의 개개비. 우거진 풀숲 사이로 우렁찬 울음소리는 잘 들리는데 몸체가 워낙 작고 빨라서 모습을 온전히 보여 줄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 여름 탐조는 무더운 날씨 속에 이렇듯 작은 시원함을 가져다주었다. 




     신기하게도 탐조의 매력은 단순히 새를 관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 새가 어디에서 살고 주로 무엇을 먹는지, 번식은 언제 즈음이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하나의 생태계를 알아감과 동시에 더 나아가 지구 환경과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마음까지 들게 했다. 쇼핑을 가면 예쁜 옷 보다 재활용을 한 섬유이면서 기능성인 의류가 눈에 더 들어왔고, 평상시엔 분리배출을 더 신경 쓰게 됐다. 일본의 오염수 방류 결정 소식에 당장 다음 해에 돌아올 도요물떼새들의 개체수가 급감하면 어쩌나 하고 분통을 터트렸다. 한쪽에서는 어떻게든 개발을 막아보려고 안 된다며 외치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그저 집 값 상승에만 관심 있는 것이 한탄스러웠다. 그리고 결국엔 내가 저들과 별 다를 것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마음 아팠다. 


두건 쓴 쇠박새. 가끔은 이렇게 뷰 파인더 너머로 새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한다. 처음엔 이 모습이 마냥 귀여웠는데 종종 같은 경험이 계속되다 보니 혹시 내가 새들의 휴식을 방해한 것은 아닐까 하는 미안함이 들었다. 나름 신경을 쓴다고 했지만 그마저도 인간인 나의 입장이 아닌가. 이날 이후 셔터음을 무음으로 설정했고 조금이라도 새들이 불편한 것 같으면 카메라를 내리고 그저 눈으로만 감상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지난겨울 이곳에서는 촬영을 포기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새들과의 거리가 5미터도 채 안 되는 곳이라 쌍안경도 필요가 없었다. “어떤 때는 찍지 않아. 그저 순간 속에 머물고 싶지.”영화 속 숀 오코넬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이해되는 듯했다.




가을이 되자 파주에 많은 기러기떼가 도착했다. 쇠기러기와 큰기러기, 흰이마기러기 등으로 섞인 무리는 논과 강바닥에서 수초류의 뿌리를 먹고 쉬다가 봄이 되면 북상한다. 해 질 녘 무렵 기러기떼의 V자 비행을 지켜보다 감동의 눈물을 찔끔거렸다. 


     가을-겨울 탐조는 그야말로 천국이다. 기온이 떨어지면 체온 유지를 위해 새들은 몸을 빵실빵실하게 부풀리는데 같은 종이어도 여름엔 날렵한 모습인 반면 가을 겨울엔 둥글둥글한 공이 따로 없다. 딱새는 딱구공, 박새는 넥타이공, 동박새는 흡사 테니스공을 떠올리게 한다. 퍼 코트를 두른 것 같이 생긴 독수리는 눈도 크고 몸체도 크고 아주 그냥 왕왕 귀엽다. 그런데 누군가 의도적으로 뿌려놓은 농약에 중독되어 늘 힘이 없고 구조되는 경우가 많다. 1년 전 농약 중독으로 구조되어 치료를 받고 방사한 개체가 또다시 농약에 중독되어 재활치료시설에 들어갔다는 기사를 접했다. 독수리는 살아있는 다른 생물체를 사냥하지 않고 죽은 사체를 먹고 살아가기 때문에 부패된 병원균이 퍼지지 않게 한다는 이점이 있다. 사람을 공격하지도 않을뿐더러 들판의 청소부의 역할까지 해 주는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렇듯 탐조를 계속하다 보면 자연에 대한 고마움과, 경이로운 마음은 끝없이 상승하는데 반대로 인류애는 자꾸만 줄어들게 된다. 사진만이 목적인 이들도 큰 문제이다. 야생의 새를 불법 포획해 촬영 세트장을 열거나 육추 장면 촬영을 위해 나무를 베는 사진작가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북쪽이 추워지면 더 많이 내려온다는 나무발발이와 흰머리오목눈이.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새를 처음으로 보는 것을 ‘종추’라고 한다. 지난겨울 조복은 매일 아침 리셋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은 새들을 만났다. (아. 그래서 내가 로또가 안 되는 거구나. 그렇구나..)


탐조를 하다 보면 새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 친구들도 만날 수 있다. 일종의 덤이랄까. 그런데, 청설모 너.. 혹시 벌크업 했니?




     며칠 전, 경기도 안산 소재의 한 습지에서 L 작가님을 다시 만났다. 많은 매체에서 그 일대를 관광 명소로 조명하고 있는 탓에 훼손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습지만큼은 아직까지 출입에 제한을 두고 있어 다양한 철새들이 온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잠시나마 엿본 그곳의 모습은 참 고요했고, 유유히 떠 다니는 물새들의 정취에서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진을 찍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그 순간 속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 큰 기쁨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반짝이는 눈으로 새들을 바라보던 작가님의 등 뒤로 앞으로도 올바른 사진만을 찍겠노라 작은 다짐의 약속을 드렸다. 나 역시 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 육추 : 알에서 부화한 가금의 새끼를 기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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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에디터와 번역가, 남에게 취향을 팔기보단 매번 본인이 사기만 하는 전직 마케터가 풀어내는 디깅의, 디깅에 의한, 디깅을 위한 에세이. 디깅을 처음 시작하는 분, 다수가 인정하는 프로 덕질러, 이 장르 저 장르 최애는 없고 차애만 가득한 우리 옆집 사는 분까지 두루두루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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