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실로 위대한 것!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공부도 못하는 녀석이 수많은 개똥철학으로 가득 차서 고래 심줄 같은 고집과 더불어 옹졸한 마음으로 중무장되어 있던 사람이다. 이게 어느 정도인가 하면, 친구들끼리 여행을 계획하는 자리에서 대부분 설악산을 가자고 할 경우에 괜스레 이 흐름을 한번 뒤집어보고자 갑자기 속리산으로 가자고 대차게 주장할 정도이다. 사실은 나도 설악산이 더 가고 싶기도 하고 간 김에 바다도 보고 싶기도 하고 그러자면 설악산이 당연히 맞는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 같이 즐겁게 설악산으로 쉽게 결정되는 그 상황이 실어서 훼방을 놓는 것이다. 청개구리 심보를 갖고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럴 때면 온갖 핑계를 다 댄다. 아무래도 강원도는 너무 사람이 많아서 이 계절에는 별로라고 하거나, 설악산과 속초는 너무 흔하고 닭강정과 물회는 더 흔하니 우리는 남들과 다르게 가보자는 헛소리를 늘어놓기 일쑤다. 재미난 것은 또 그런 청개구리 같은 녀석의 친구들은 순하디 순해서 그 말에 또 고개를 주억거리며 속리산으로 가자고 한다. 그런데 또 대개의 경우, 2주 후에 우리는 속초 앞바다에서 닭강정을 먹으며 소주를 마시고 있다. 내가 봐도, 옹졸하고 별난 녀석이다.
나도 나를 아는 지라 간혹 가다 나 같은 녀석과 함께 살아갈 미래의 아내가 참 답답도 하겠다는 걱정과 함께, 이쯤 되면 가능하다면 연애만 하고 결혼은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심각하게 하곤 했었다. 그런데 어른들 말씀이 틀린 것이 없다. 사람은 살아봐야 한다고,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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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06년 4월 정도였다. 나는 잠시 캐나다에 체류하며 인생에 두 번 없을 호사를 누리던 중이었다. 2월에 캐나다로 넘어왔는데 넘어오기 전에 여자 사람 친구와 2주 정도를 종종 만나며 술을 기울였었다. 이 여자 사람 친구는 가장 친한 남자 사람 친구로부터 친구로서 소개받은 친구였다. 즉, 서로 그냥 알고나 지내라는 차원에서 소개받았던 여자 사람 친구라는 것이다. 그런데 남녀 사이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라, 열심히 얼굴을 봤더니 나도 모르게 이 친구가 좋아졌던 모양이다. 첫 직장을 그만두고 캐나다로 넘어온 이후, 가끔 꼬셨다. 일주일에 세 번 정도면 가끔이려나? 여하튼 꼬셨다. 캐나다 여행 한번 하러 온다면, 내가 준비 한번 제대로 하겠노라 장담을 했다.
노력이 가상했던지 당시의 여자 친구는 나를 만나고자, 부모님께는 이런저런 거짓 사유를 대고 토론토로 날아왔다. 그 이후 한 달간 우리는 정말 많은 추억을 차곡차곡 쌓았다. 토론토 구경으로 시작해서 동부 캐나다까지 여행하고, 현지에 사는 사람들처럼 시간을 보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생각해보시라. 첫 직장을 그만둔 서른도 되지 않은 남자의 미래란 얼마나 불안함으로 가득 차 있었겠는가. 지금보다야 덜할 수 있다고 생각도 되지만, IMF로부터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당시에도 취업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나의 머리에는 불확실한 많은 상황들로 가득 차 있을 때였다. 영어도 잘 못하는 문과 출신의 내가 한국에서 다시 직장을 구할 수 있을까? 아니면 차라리 캐나다에서 좀 더 공부를 하면서 후일을 도모해 볼까? 그 후일에는 캐나다에서 눌러앉는 것 또한 옵션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의 여자 친구라고 그 상황을 모를리는 없었다. 스물 후반의 젊은 커플들이 속삭이는 미래에 대한 약속을 섣불리 할 수 없었다. 한국에 언제 갈 것이라는 말도, 자신 있게 취업에 성공할 테니 우리 계속 행복하자는 말도 할 수 없이 그저 좋은 말만 하고 좋은 생각만 서로 나눌 수밖에 없었다.
여자 친구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이주 전에 우리는 토론토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무작정 몬트리올과 오타와를 가기로 한 여행이었다. 북미의 번잡함과는 거리가 먼 오타와에서 오랜 시간 산책을 하다가 위의 사진을 찍었다. 다리를 건너다가 찍은 사진인데, 그때 나는 속으로 기도를 했다. 이 여자를 내 아내로 꼭 허락해 달라는 기도를 속으로 했다. 아마 여자 친구는 전혀 몰랐을 것이다. 음악을 전공한 여자 친구는 잘 모르는 외국 오페라를 신나는 목소리로 작게 흥얼거려주고 있을 때였다. 나로서는 보내기 싫었던 마음, 다시 보고 싶은 기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자신 없음에 대한 자괴감 등이 온통 뒤섞인 상황에서 웃고 있는 여자 친구를 보니 절로 하게 된 기도였다.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란 쉽게 눈에 보이는 결과로 드러나지 않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품어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지금, 옹졸한 나를 품어주고 여전히 불안한 나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대인배 여자 친구와 부부가 되어 잘 살고 있다. 싸우기도 하고 실컷 여행도 다니면서 즐겁게 사는 중이다.
옆의 사진은 2014년 결혼기념일에 아내가 써준 편지이다. 얼마 전까지는 항상 가방에 넣고 다녔었고, 지금은 내 책상 독서대에 올려져 있다. 이 고백을 글로 쓰다가 문득 책상 한쪽에 놓여있는 편지가 눈에 들어와 사진을 찍었다. 이 힘든 시기에도 아내에 대한 마음 때문에 슬프고 지친 모습으로 있고 싶지가 않다. 힘들어도 아내가 있어서 또 웃을 일이 생긴다. 어느 때보다 자주 기도를 한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는 누워서 기도를 하다가 그대로 잠에 들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다시 기도를 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저 아내와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우리가 꿈꿨던 어린 시절의 상상을 실행에 옮길 그날까지 사랑으로 버티고 기도하며 나아가고 싶다. 아마 언젠가 내게 그 응답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여기까지 쓰고 며칠이 흘렀다>
아,,, 술 한잔 걸치고 늦었다고 어제 혼나고 아직 용서받지 못했는데, 위에 쓴 글의 아내와 지금의 아내가 과연 같은 사람인지 약간의 충격이 왔다. 그래 내가 잘못했지, 마눌님 사랑하오. 용서해 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