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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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리얼리즘'의 맛을 제대로 보았다. 레이먼드 카먼의 단편소설들은 그가 경험했던 엄혹한 삶의 현실들을 비추어 낸다. 장편소설의 예술성이 세계를 하나의 장대한 서사로써 재현해내는 데 있다면, <대성당>에 실린 그의 단편들은 오히려 서사에 녹아들어가지 않는 삶의 순간들을 조명하고 있다. 이야기 속에서 화자들은 그런 '낯선' 사건들을 해석하려 들지 않는데, 바로 그럼으로써 작가는 재현되지 않는 세계를 '현실적으로' 재현하고자 한다.
모든 사실은 동일한 역사적 지평 위에 펼쳐지지만 경험하는 이에게 새겨진 흔적은 결코 같지 않다. 어떤 경험은 그저 스쳐지나갈 뿐인가 하면 다른 경험은 나의 경험세계를 해체하는 '트라우마'를 남기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나의 세계를 재구성하는 결정적인 '사건'도 존재한다.
프로이트는 그의 히스테리 환자들에게서 '트라우마'의 지연된 효과에 주목했는데, 아이가 발달 단계에서 겪는 트라우마는 그 당시에는 별다른 증상이 없다가 나중에 그가 해석가능한 언어를 갖게 되었을 때 발작 증세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지연이 모든 경험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사물/사태 자체는 언제나 언어로 환원되거나 어떤 한 줄의 의미로 완전히 해석될 수 없기에 그 효과(현전)는 지연(차연)되고 타자로 남아있는 것이다. 사태가 낯선 것일 수록 타자는 완전히 드러나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유령처럼 존재한다. 트라우마든 유령이든 우리는 삶에서 이러한 불편한 조우를 피할 수 없다.
카먼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통해 반복적으로 주지하듯 우리는 저마다 '나'의 경험(생활)세계 속에서만 살아간다. 기차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타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배우자나 자식의 세계 조차도 대리 경험할 수 없다. 심지어 '나'조차도 내게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나'의 세계가 곧 세상과 동일하다는 환상 속에 살아가다가 공작새가 집안으로 들어오고, 머리를 다치고, 아이를 잃고, 냉장고가 고장나고, 잘린 귀를 목격하고, 방향을 놓지고, 맹인의 손을 잡는 따위의 '사건'을 마주하며 세계의 한계, 환상 밖의 무엇, 언어 너머의 실재, 물자체, 혹은 어떤 '낯섦'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은 각자에게 긍정도 부정도 아닌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밝힌다.
우리 삶 속에 있었던 초월의 순간들을 떠올려 보았다. 낯선 경험 자체가 희귀해진 시대일수록 타자의 시간은 도둑같이 찾아오리라. 다만 그 시간이 트라우마가 아닌 '사건'이 되려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삶의 양식들이 있어야 하겠다. 카먼에게는 그것이 바로 글쓰기였던 것 같다. 그의 글에 어딘가 싸늘한 기운이 서는 것은 어쩌면 바로 '유령'의 흔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