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영화다. 삶의 미학적인 면들을 4:3 액자에 담아 스크인으로 보여준다. 관객은 영화를 통해, 영화 속에 흐르는 삶의 일상성을 경험한다.
도쿄의 공원 청소부 히라야마는 매일 아침에 눈뜨는 순간부터 잠들 때까지 자신만의 리듬으로 하루를 보낸다. 양치와 면도를 하고, 캔커피를 마시고, 카세트 테잎을 들으며 출근하고, 청소일을 하고, 퇴근해 목욕탕엘 가 씻고, 자전거 타고 시내에 들려 저녁을 먹고, 책을 읽다 잠에 들고 꿈을 꾼다.
이렇게 말로서 요약해 보자면 동일한 날의 연속이라 볼 수 있지만, 영화를 보면 그의 어느 하루도 다른 날과 동일하지 않다. 날씨가 그렇고, 그가 듣는 음악이, 펼쳐보는 쪽지와 책이, 만나는 사람들이, 포착하는 '코모레비'의 순간들이 그렇다.
혼자 사는 히라야마 씨에게 삶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영화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감독은 이러저러한 말 대신 과묵한 주인공을 통해 그가 바라보는 시선에 주목하게 한다.
영화 속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히라야마가 문득문득 고개를 들어 무언가를 응시하는 장면들이다. 그의 '친구 나무'와, 화장실 벽에 비친 햇살, 목욕탕의 그림, 어떤 공원에 늘 나타나는 이상한 행동의 사내, 출근길에 떠오르는 태양 등등. 특별하지 않지만 그의 시선에 들어온 이미지들은 밤새 그의 꿈 속에서 중첩되고, 연결되며, 흐른다.
주목할 것은 우리가 서로 다른 대상을 동일한 눈으로 바라볼 때 생성되는 것이 바로 '의미'란 사실이다. 의미란 본래 여러 이미지가 겹쳐지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때 겹쳐지는 장소 혹은 시선을 기표라 부를 수 있겠다.
하나의 장에서 기표들이 연속되면 언어, 곧 세계가 발생한다. 바꿔 말하면 언어/세계가 발생하는 그 순간에 주체가 탄생한다. 시선 없는 이미지나 이미지 없는 시선이 불가능하듯, 주체 없는 세계와 세계 없는 주체란 불가능하다.
기표를 음표로 바꿔놓고 보면 세계란 곧 음악과 같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그러하듯 음표들의 시간성에서 리듬과 멜로디가, 공간성에서 화음이 발행하는 것이다. 삶과 음악은 오직 주목하는 시선이 있을 때만 삶과 음악으로 흐른다. 사르트르의 통찰대로 시선 없는 즉자의 세계란 무한한 시공간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러한 점에서 무수한 이미지들로 가득찬 히라야마 씨의 일상은 의미로 충만하다고 볼 수 있다. 비록 그 의미가 다른 세계의 문법에 맞지 않는 것이라 해도 그의 말대로 "서로 연결된 세상이 있고, 그렇지 않은 세상도" 있을 따름이다.
과연 문법은 의미를 해석할 수 있게 하지만, 무수한 의미들을 탈락시키기도 하다는 점에서 영화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친구, 종교, 가족 등 표준적인 '의미 지평' 들로부터 벗어나 살아가는 히라야마 씨의 삶은 보기에 따라서 불안해 보이기도, 충만해 보이기도 하다.
한편, 디지털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 히라야마 씨의 생활을 보며 나는 거의 경험해본 적이 없음에도 어떤 근원적인 향수를 느꼈다. 아날로그가 미학적인 것은 노스텔지어 때문만이 아니라, 여백 속에서 다른 '시선'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디지털은 불안할 틈을 허락하는 대신 수 많은 규정성으로 우리를 붙잡아 매는 가장 강력한 의미 지평인 것이다.
나의 이러저러한 해석과는 상관없이 영화도 삶도 흘러가고 해는 다시 떠오를 것이다. 그러다 문득 삶에 허무가 찾아오면 이 영화가 생각날 것 같다. 어느 하루도 동일하지 않기에 모든 날은 의미 사건으로 가득찬 날들이겠다. 잠재된 것은 무한하다. 그래서 'pefect days' 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