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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영 Nov 10. 2024

<소년이 온다> 한강

2024-11-10

<소년이 온다> 한강


“네 중학교 학생증에서 사진만 오려갖고 지갑 속에 넣어놨다이. 낮이나 밤이나 텅 빈 집이지마는 아무도 찾아올 일 없는 새벽에. 하얀 습자지로 여러번 접어 싸놓은 네 얼굴을 펼쳐본다이. 아무도 엿들을 사람이 없지마는 가만가만 부른다이. …… 동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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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하고 그녀의 책 몇권을 연달아 읽었다. 그리고 <소년이 온다>를 여러 번 읽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목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두텁게 쌓이고 얽힌 그 세계를 뒤로하고 내 삶을 가볍게 펼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읽으며 처음엔 속상했고, 이따금 아리었고, 마지막엔 슬펐다. 그리고 내내 감탄했다. 이 책에서 나는 내가 문학에서 기대하는 모든 것을 발견했다. 노벨상 수상자를 내가 평가하는 게 우습지만,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이제껏 오월의 광주를 다루는 책이라 하여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역사적 비극이 문학의 소재로 사용된 게 머뜩치 않았기 때문이다. 읽고난 지금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그 열흘간 광주에 나도 함께 있었던 것만 같다. 소년이 짊어진 나의 책임을 보았다.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간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인 물음이 우렁우렁 울려온다. <소년이 온다>는 그에 대한 작가의 대답일테다.


유고 시절 인종청소라는 비극을 겪었던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는 망각 대신 기억의 중요성을 말한다. 기억이란 과거 사건을 단순히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는 주장이다. 상처의 기억은 잊거나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영원의 관점에서, 최종적인 회복과 평화로 나가는 길에서 끊임없이 전승되고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비극 당사자에게 기억의 요구는 또다른 폭력이다. 야만적인 고문을 당했던 김진수에게 기억은 삶보다 고통스러운 것이었고, 선주에게 기억은 도저히 마주할 수 없어 저 편으로 밀어낸 악몽이었기 때문이다. 증언이라는 작업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 지 알지 못하지만 그 무엇도 그들의 깨어진 영혼을 다시 이어붙이지 못하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날 이후 밤의 눈동자가 선주의 삶에 비추는 것은 신의 보호가 아닌 죽음의 공포였다.


책에는 영혼들이 등장한다. 영혼은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의 삶에서 여전히 살아 존재한다. 프로이트는 애도를 망자를 떠나보냄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라 보았지만, 데리다는 영원히 불가능에 머무르는 것이라 보았다. 상실된 사람을 여전히 고유한 타자로 머물게 하는 것이야 말로 그를 존중하는 진정한 애도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애도는 진정 불가능에 성공한다. 동호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넋과 목소리가 우리에게 ‘와서’ 현상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한강이 여러 책에서 조명하는 폭력의 문제를 차라리 다큐멘터리로 다루는 게 효과적일 거라고 말한다. 분명 다큐멘터리가 담보하는 사실성과 객관성의 힘이 있겠으나, 역설적이게도 다큐멘터리는 실제 인물과 사건들을 대상화한다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희생자가 분명하게 보여질 수록 희생자와, 그를 안방에서 시청하고 있는 나 사이에 간극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희생자들의 경험적 진술이 언제나 진실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다. 트라우마라는 구멍은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문학에는 다양한 경험의 가능성들이 존재한다. 이 책에서 작가는 각 장마다 화자와 형식, 그리고 시점을 달리 하여 오월의 광주라는 사건을 하나의 평면 텍스트가 아닌 고유한 입체의 세계로 확장시킨다. 뿐만 아니라 여러 장에서 이인칭 서술을 함으로써 독자들을 사건 당사자로 여러 시간속에 개입 시키기도 한다. 너무나도 여리고 섬세한 표현들은 폭력의 야만성을 도드라지게 하고, 평화롭고 따뜻하던 일상의 기억은 쓸쓸한 독백을 한 없이 차갑게 만든다. 중간 중간 구덩이처럼 등장하는 악몽의 장면이나 유령의 목소리는 호흡을 자꾸만 훼방놓는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작가 대신 대답해 보자면, 인간은 야만이지 않기 위해 기억해야만 한다. 남은 자들이 이야기를 이어나가야 한다. 그리고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고통받는 이들에게 진 빚을 잊어버리지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포개어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치 피어오르는 잎처럼. 꽃이 핀 쪽으로 소년이 온다.


#소년이온다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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