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서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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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스레드에서 많이들 추천한 책이다. 1998년에 초판이 나와서 지금까지 143쇄가 발행 됐으니 사반세기동안 꾸준하게 대중의 사랑을 받은 셈이다. 학창시절 <원미동 사람들>을 인상깊게 읽기도 했고, 제목이 무려 <모순>이라니 큰 기대를 하고 책을 집었으나 드라마 같은 전개와 식상한 형식에 적잖이 실망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남편과 아들의 지리멸렬한 삶을 뒷바라지해온 어머니와, 부자집에서 두 유학생 남매를 두고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사는 이모는 십분 차이로 태어난 쌍둥이다. 주인공 안진진은 비슷한 시기에 두 남자와 연애를 하는데 유복한 집안에 인생을 계획한 대로 사는 나영규와, 일찍 부모를 여이고 형과 의지하며 근근히 벌어사는 사진작가 김장우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나영규는 매사 대범하고 이성적인데 반해 김장우는 소심하고 섬세하다. 나영규는 매사 자기 중심적이지만 김장우는 배려심이 많다. 안진진은 이들 사이를 오가며 정답 없는 인생을 탐구한다.
역설적이게도 <모순>에는 부정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모와 엄마, 이모부와 아버지, 나영규와 김장우, 주희와 진진은 완벽하게 대칭을 이룰 뿐 결코 부딛치지 않는다. 때문에 창과 방패라는 고유의 긍정성은 훼손되지 않고 끝까지 유지되는데 이러한 서사적 구조는 삶의 역설을 밝히는 대신 현실을 고착시키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 장에서 안진진이 '삶은 원래 그런거니까' 라는 식의 독백을 하는 장면에 이르르면 책은 오히려 모순이라는 이름으로 정답을 제시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역사가 그러하듯 부정성을 상실한 서사는 전체주의적 구조를 강화한다. 질서에 대한 강박이 새로운 가능성을 말살하기 때문인데 이 같은 총체성의 담론에서 개별자는 고유한 존재의 무게를 상실하고 그저 구조를 위한 도구적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모순>에서 보자면 중심 인물로 등장하는 이모마저도 단지 후반부의 장면과 주인공의 각성을 위해 존재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어떤 존재도 몇마디 말로 정리되어선 안되고 결코 그럴 수도 없다고 보기에 책의 시선이 여러모로 불편했다.
그런가하면 부자는 자기중심적이고 틀에 갇혀 있으며 삶이 지루한데 반해, 빈자는 생각이 깊고 주체적 삶을 산다는 식의 무리한 설정들은 몰입을 방해하기도 한다. 사르트르가 요구하는 '참여'적 기능까지는 아니더라도 존재의 틈, 생의 틈을 열어 밝히는 게 문학의 역할이라고 보는데 <모순>에는 그런 틈이 없다. 오히려 행복과 불행의 밸런스에 몰입한 나머지 문학이 담아야할 일말의 현실성을 놓져버린 듯 하다. 틈이 보이지 않는 서사는 세상에 대한 예술적 재현에 실패할 뿐 아니라 현실의 모순 (혹은 부조리)을 가리운다.
삶이 과연 모순이라면 그건 예측 불가능성과 무정형성 때문일테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담하게도 모순을 그려보고자 했던 작가의 노력은 실패하고 만다. 이분법적 구도에서 펼쳐지는 공식적인 서사 대신 책에 필요했던 것은 여백과 혼돈, 그리고 불쾌감이었을 것이다. 부조리는 리듬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최근에 주목받은 한강의 작품들을 보라. 그야말로 부정성의 문학이다.
비판만 주구장창 했는데 책은 재밌게 읽힌다. 드라마로 나왔어도 흥행했을 것 같다. 드라마가 있었다면, 굳이 책으로 읽지 않았어도 좋았을 법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