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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매니아 Apr 16. 2023

EP1 모의시험

머릿속이 Blanc Blanc

   한 달 앞으로 다가온 CAP Pâtissier 시험. 2년 과정이라 까마득하니 길다고만 생각했는데, 늘 그렇듯 시험 날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에 다가와있다.


   CAP pâtissier 실기시험은 비오누와즈리, 브리오쉬, 타르트, 구움 과자 등을 만드는 EP1과 슈와 케이크를 만드는 EP2로 이루어져 이틀에 걸쳐 치르게 된다. 보통 EP1과 EP2는 연속 이틀 동안 치렀는데, 올해부터는 EP1은 5월에, EP2는 6월 중으로 정해졌다. 오전 7시부터 점심 휴식시간도 없이 오후까지 치르는 시험을 이틀에 걸쳐 보려니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을 텐데, 이렇게 시험을 나누어 봄으로써 합격률을 조금이나마 올려보자는 학교의 의도가 담긴 거 같다.


   실기시험에는 레시피를 정리해서 가져갈 수 있는데, 이 레시피에는 오로지 밀가루 몇 그램, 설탕 몇 그램과 같이 재료와 양만 기입되어 있어야 한다. 만드는 과정이나 오븐에서 굽는 온도 등이 적혀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양도 시험에서 요구하는 생산량이 8인분인지, 6인분인지에 따라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도록 기준을 정해 잘 정리해야 한다. 기존에 빵집에서 하듯이 한 번에 50인분 기준으로 해버리면 이 또한 경영 Gestion 점수에서 마이너스이다. 그런데 세상에 케이크 종류는 너무나 다양하고 학교에서 배운 것은 일부에 불과하니 몇 년 전 주제는 뭐였는지 비교 분석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고, 심지어 빵집에서 다루지도 않는데 시험에 출제된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더욱이 레시피로 정리하지 못한 제과품목이 나온다? 오늘 예상치 못했던 그 일이 일어났다...


    부활절 휴일 다음날이었던 5월 11일. 1차 모의고사가 있었다. 미처 레시피를 정리하지 못한 학생들이 있을까 봐 교수님이 재료와 양만 알려주셨는데, 평소에는 만드는 방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던 레시피 종이에는 허무하게도 재료와 양만 떡하니 나와 있었다.

텅텅 빈 레시피. 내 머릿속도 텅텅.

   주제는 여러 가지 종류의 브리오쉬, 크렘무슬린과 파트 수크레를 기본으로 한 산딸기 타르트 그리고 문제의 사블레 브레통이 나왔다. 만드는 과정도, 순서도 각자 자유지만 4시간 30분 안에 계량에서 생산, 데코레이션에 정리까지 마쳐야 한다.


    주제지를 받아보자 가슴도 쿵당쿵당 뛰고, 식은땀이 흘렀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먼저 순서를 정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발효가 필요한 브리오쉬 반죽부터 시작해서 타르트지 반죽, 그리고 데코에 필요한 크림은 제일 마지막으로 하는 것으로 대략 순서를 정했다. 다행히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학생들 모두 계량대로 달려가 밀가루, 설탕, 계란, 이스트, 버터를 가져와 반죽을 시작했다. 나도 서둘러 계량을 해서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내 자리에 놓인 반죽기가 잘 돌아가질 않았다. 버터를 넣기 전 15분 이상을 돌려 글루텐이 충분하게 생성되도록 해야 하는데 1분이 멀다 하고 기계 밖으로 반죽이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그때마다 기계를 멈추고 반죽을 긁어 내려야 했다. 앞에 학생은 벌써 버터를 넣었는데, 왜 하필 운도 없지! 기계와 내 손은 더러워져만 갔고 심사위원 역할을 하는 교수님의 눈은 내 반죽만 자꾸 지켜보는 것 같았다. 다른 학생들 모두 반죽을 끝내고 발효에 들어갔을 때에도 나는 반죽과의 씨름이 한창이었다. 버터를 미리 몇 조각 넣으면 반죽에 끈기가 생겨 그나마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어 몇 조각 넣어보았다. 그걸 또 지켜보고 있는 교수님. 긴장했는지 내 코에선 땀이 다 송골송골 맺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반죽을 당겨보니 종이처럼 얇은 조직이 보였다. 다행이다! 글루텐이 잘 형성되었다. 나머지 버터를 다 넣고서야 타르트지 계량을 시작했다. 이때 내 마음에 문득 든 생각. 기계 속 반죽을 긁어내고 손에 묻은 반죽을 씻어내고 한 양이 꽤 많을 텐데, 남들보다 적어 보이는 양에 양에 많이 부족하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다. 이 걱정 때문인지 또 실수를 저질렀다. 플라스틱 통에 반죽을 넣고 랩을 씌울 때 반죽과 접촉하게 하여 씌어야 하는데, 깜빡하고 반죽과 떨어지게 씌우고서 발효실에 넣어버린 것이었다. 반죽이 발효되며 나오는 수증기가 랩에 닿아 그대로 반죽으로 떨어지면 발효도 방해하거니와 반죽도 질척해져 버린다. 이건 나중에서야 교수님이 평가시간에 지적해 줘셔야 알았다. 여기서 얻은 교훈. 실기시험 때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걱정은 내려놓고 잊는 게 최고다!  


    다음은 타르트지 반죽. 기계가 말썽이었던 만큼 차라리 손으로 하는 반죽이 맘 편했다. 반죽을 다 하고 랩으로 씌어 냉장보관을 하려는 순간, 냉장고 위에 있는 아몬드 가루가 눈에 띄었다. 잠깐만. 레시피에 있는 아몬드가루를 깜빡한 게 아닌가. 펜으로 하나하나 체크하면서 배합했었어야 했는데, 아직 만회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다 된 반죽에 아몬드 가루를 넣고 조금 더 치댔다. 글루텐이 생기지 않게 조금만. 그리고 교수님의 눈을 피해 서둘러서!


    다음은 사블레 브레통. 이게 뭔지는 잘 몰랐지만 어쨌든 반죽을 만들었다. 다 만들고 보니 왠지 빵집에서 만드는 가또 바스크의 반죽과 비슷한 질감이었다. 회사에서는 이 반죽을 밀어 가운데 크렘 파티시에나 가나쉬 초콜릿을 넣고 굽는다. 하지만 주어진 레시피에는 딸랑 반죽만 있는 상황. 앞 학생을 보니 밀대로 반죽을 밀어 둥글게 찍어서 굽기용 철판에 올린 후 계란 물을 바르고 있다. 사블레 브레통을 먹어 본 적도 없고 심지어 본 적도 없으니 남들 하는 대로 하는 수밖에. 설거지를 하러 간 틈에 다른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도대체 사블레 브레통이 뭐야?, ' 나만 모르는 게 아니구나, 하고 괜히 안도가 됐다.


    냉장보관을 해두었던 타르트지를 꺼내 타르트 틀에 잘 퐁사쥬를 해준 후 냉장보관하여 휴지. 다행히 퐁사쥬는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매년마다 송편을 빚고 만두를 빚고 초등학교 때 지점토로 동물농장쯤 만들어 본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때부터 조금씩 긴장이 풀리고 페이스를 찾을 수 있었다. 사블레 브레통에 괜히 칼로 문양도 그려 넣고, 시간이 조금 있는 듯해서 다 구워진 타르트 곁면을 정성스럽게 갈아 표면도 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시작된 브리오쉬 성형. 발효실에서 꺼내 냉동보관해 두었던 반죽을 꺼내 무게만큼 잘라 성형을 할 차례였다. 저울에 재어 보니 많이 부족했다. 가령 60그램이 필요한 것에 45그램으로 밖에 나누지 못했다. 크기는 작아도 일단 정해진 숫자를 채우자는 생각으로 작아도 그대로 성형해 2차 발효에 들여보냈다. 순간순간이 선택의 과정이다. 그 선택을 한 배경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테고. 심사위원의 평가 때 당연히 이 부분을 지적할 테니 말이다. 점수는 잃겠지만 어쨌든 심사위원을 잘 설득하는 게 점수를 크게 잃지 않는 방법이다.


    그리고 문제의 크렘 무슬린. 크렘 파티시에에 버터를 첨가한 것으로 여기에 프랄리네를 넣으면 바로 파리 브레스트의 고소한 크림이다. 빵집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대량으로 만들면서도 한 번도 이 크림의 이름을 제대로 말해 본 적이 없다. 빵집에서는 크렘 무슬린이 아닌 크렘 파리 브레스트라고 불렀다. 정확한 용어의 사용은 참 중요하다는 걸 이때 깨달은 게, 프랄리네가 들어가지 않은 크렘 무슬린이 너무 낯설게 느껴져서 만드는 방법조차 머릿속에서 지워진 것이었다. 크렘 파티시에에 약간의 크림을 넣은 것까지는 잘했다. 급속 냉동해 살균처리한 크림을 꺼내 차가운 버터와 섞으려니 당연히 잘 안 되는 게 당연한데 크렘 파티시에를 휘핑기로 휘핑하면 조금 온도가 올라가겠지 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휘핑을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넣은 버터. 버터 조각들이 잘 섞이지 않고 덩어리 져 순간 '나는 망했다!' 란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버터를 먼저 휘핑해 크림처럼 부드럽게 만들어준 후에 크렘 파티시에를 넣어 줘야 하는 게 정석이다. 크림 속 버터 조각들을 보자마자 그 생각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교수님께 솔직하게 말하고 토치를 빌렸다. 휘핑기계 겉면을 토치로 슬슬 달구며 휘핑하자 다행히 버터 조각들이 사라졌다. 하지만 너무 많이 열을 가했던 것일까... 크림이 힘이 없다...


    브리오쉬를 굽고, 타르트를 장식하고 나서보니 4시간 30분이 후딱 지나갔다. 그렇게 나온 나의 결과물. 예상대로 크렘 무슬린은 힘이 없이 축 가라앉아 예쁘지 않았고, 처음 만들어 본 사블레 브레통은 너무 얇고 크게 만들어서 교수님이 보여준 사블레 브레통과는 전혀 다르게 생겼으며, 나의 브리오쉬들은 맛은 좋으나 크기가 너무 작다는 평가를 받았다. 브리오쉬 반죽을 할 때 임기응변으로 버터를 미리 넣은 거나 랩을 제대로 씌우지 않은 것, 브리오쉬 성형을 할 때 제대로 머리 형태를 만들지 않은 것도 지적받았다. 칭찬에 인색한 교수님인지라 그래도 '다 팔 수는 있을 정도다'라고 말씀해 주신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4시간 30분의 땀과 한숨, 긴장의 결과들.

    그리고 이어진 우리 반 전체 총평. Catastrophique. 재난 수준. 처참했다. 그 누구도 사블레 브레통을 재현해 내지 못했으며 반이나 시험에 통과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들은 우리들은 배우지도 않은 주제가 나온 것이 억울했고, 왜 빵집에서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지 속상했다. 그리고 당장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시험의 무게감에 긴장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청소를 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팅팅 부운 다리를 감싸 앉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모의고사를 뜻하는 Examen Blanc 하얀 시험이란 뜻이다. 이름 그대로 머리가 새하얗게 비었던 하루였다. 


    그리고 그 이튿날. 학생들의 시험 스트레스는 불똥이 되어 싸움으로 번지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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