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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경 Oct 07. 2024

호버링

chapter17

 “누나.”

 “뭐하고 있었어?”

 그간 거짓말을 한 거냐며 만나자마자 따지겠다는 다짐은 어디로 가고, 생뚱맞은 말이 튀어나갔다. 

 “나 그냥 더 잤어.”

 그런 말을 해놓고 잠이 왔구나. 비아냥거리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했다. 질문을 던진 건 내 쪽인데도 막상 답을 들으니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어디 갈래.”

 “그냥 여기서 얘기하고 끝내자.”

 황당함을 넘어서 서러웠다. 한나절 만에 사람이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변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눈물을 흘릴 때가 아니었다. 물어야 할 게 남아있었다. 로비 밖 대로변에는 짐을 맡기고 체크인 하는 여행객들이 계속해서 오가고 있었다. 

 “설명 좀 해주라, 갑자기 이게 다 뭔지.”

 “말 그대로야. 못하겠다고. 그게 뭐든.”

 태형의 고저 없는 담담한 말투가 좋다고 생각해왔다. 뭐든 별 일 아닌 것처럼 만들어주는 담백한 태도는 내가 동경하는 것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보고 싶은 모습은 아니었다. 

 “다합에 더 있든 뭘 하든 그건 누나 자유지만, 더 이상 예전처럼 지내진 못할 것 같아. 누나 말대로 희망고문하기 싫은데, 우리가 장거리 연애를 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한국 갈 것도 아니고.”

 “장거리 연애는 왜 못하는데, 한국은 왜 못 가는데, 너도 나한테 마음 있다면서.”

 “우긴다고 되는 일이 아니잖아.”

 늘 앳되게 보였던 태형이 단호하게 말하는 모습이 낯설게 다가왔다. 하늘은 점점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입술은 바짝 말라가는데, 뒷덜미부터 열이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너 내가 처음 아니지.”

 내 목소리가 이렇게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던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다이빙 샵 여자들이랑 가깝게 지내고 연애한 거, 내가 처음 아니잖아.”

“그게 지금 여기서 중요해? 그리고 연애한 적 없어.”

 그럼 도대체 중요한 게 뭔데, 나 다 봤어, 넌 연애가 뭐라고 생각하는데. 할 말이 너무 많으면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곤 했다. 말문이 막혀 버린 나를 대신해 태형이 말을 이었다. 

 “오늘 펀 다이빙 못 간 건 미안해. 근데 처음부터 확실하게 말한 적 없잖아. 나도 내 마음 정했을 뿐이야. 한국 가기엔 이르다고 느꼈고, 장거리 연애는 하고 싶지 않아. 누나 좋은 사람인 거 아니까 이쯤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

 좋은 분이신 것 같은데 저랑은 안 맞는 것 같아서요, 다른 좋은 인연 만나셨으면 좋겠어요. 언젠가 보냈던 소개팅 거절 메시지가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냥 내가 그 정도가 아닌 거네.”

 “꼭 그렇게 말해야겠어?”

 “응, 그렇게 말해야겠어. 너 지금처럼 돌아다니면서 스릴 즐기고 그런 거 한국 가서 취업준비하고 고생하면 다 못하겠지. 안정적인 삶 찾는데 한참 걸리겠지. 근데 내가 도와준다는 거잖아. 같이 있어주겠다고 했잖아.”

 말하면서도 소용이 없다는 게 느껴졌다. 태형에게선 어떤 말을 해도 설득되지 않을 것 같다는 기운이 나오고 있었다. 

 “그만 얘기하자. 더 얘기해도 소용없을 것 같네. 들어가. 가는 거 보고 갈게.”

 “팔로우는 왜 끊었어?”

 이미 구차해지기로 선택하기로 한 이상 못할 말은 없었다.

 “더 이상 서로 근황 확인하는 게 의미가 있어? 신경 쓰이기만 하지.”

 “넌 참 깔끔하다. 깔끔해서 좋겠다.”

 “들어가.”


 화장실에서는 벽간 소음이 더 잘 들렸다. 웅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드문드문 노래를 부르는 듯한 고성이 타일을 타고 전해져 왔다. 오늘따라 거슬리는 소음에, 핸드폰을 두드려 마츠바라 미키의「Stay With Me」를 재생시켰다. 시티 팝을 듣는 건 재현의 취향이었다. 우리는 삼 년간 음원 재생 계정을 공유했었다. 그 결과 재현은 외국 힙합을, 나는 지나간 일본 노래를 듣는 뒤섞인 취향을 갖게 되었다. 사람은 떠났지만 플레이리스트는 남았다. 문득 재현도 여전히 포스트 말론을 들을 지 궁금해졌다. 

‘사랑과 연애는 다른 거라고 어젯밤에 들은 것 같아요.’

 저런 가사가 있었던가. 통통거리는 음율에 맞추어 폼 클렌징을 손바닥에 짰다. 수전을 틀자 마츠바라 미키의 목소리가 물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조금 탄 것 같기도. 선크림을 발랐는데도 그을린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물로 얼굴을 헹구고 수건으로 닦으면서도 머릿속은 그간 태형이 한 말들을 복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쩌면 나도 태형에게 조금은 특별한 존재가 아닐까. 서율이는 애초에 거절당했고, 인스타그램 속 여자와는 오히려 더 가벼운 관계였을지도 몰랐다. 고백한 날 밤, 나와는 그런 가볍게 지나가는 관계가 되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 따지고 보면 진지한 건 내 쪽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태형이 그런 가벼운 관계를 가진 여자가 인스타그램 속 여자 한 명 뿐일까?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게를 정하지 못하는 마음의 추가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좌우로 휘청댔다. 


 다이빙 샵은 비어 있었다. 오스트리아 부부가 어드밴스 코스를 시작한 탓에 자파리와 무스타파, 재희 언니가 다 같이 오전 레슨에 나섰다. 급한 마음은 없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 펀 다이빙을 나가면 시간 분배가 적절할 것 같았다. 소파에 앉아 선풍기를 내 쪽으로 돌렸다. 열이 오를 때까지 생각했던 어제와 달리 샵에 나오니 마음이 조금이나마 진정되는 듯했다. 벽을 타고 들어오는 웃음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아, 이 오빠 대박 웃겨.”

 벽 바깥의 작은 방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처음 듣는 여자의 목소리가 태형의 목소리와 뒤섞여 있었다. 예민하게 곤두선 신경이 온통 벽 바깥으로 향했다. 윙윙 소리를 내는 선풍기의 스위치를 슬리퍼로 밟아 껐다. 무언가에 이끌린 듯 발걸음이 벽 밖으로 향했다. 엿듣는 건 질색이었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작은 방 옆에 붙어 있는 수돗가로 가 쪼그리고 앉았다. 소리가 나지 않을 만큼 약하게 물을 틀고 그 밑으로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니까 호흡기가 레귤레이터, 보조 호흡기는 옥토퍼스. 아, 영어 너무 어렵다.”

 “내가 같이 나가서 다시 알려줄게.”

 “진짜? 다행이다. 나 현지인들이랑 소통 거의 못해. 수영도 잘 못하고.”

 “하면 다 해. 딱 보니까 넌 잘 할 것 같은데.”

 얇은 물줄기가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렸다. 물은 쉬지 않고 손을 튕겨나가 수돗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바닥에 고인 물은 잠시간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냈다가 이내 흩어졌다. 처음 본 사람과 말을 스스럼없이 편하게 하는 것이 태형다웠다. 동시에 오픈워터는 자신의 담당이 아니라던 태형의 말이 떠올라 헛웃음이 났다.

 “오빠, 그럼 나 여기 가이드도 해 주면 안 돼? 나 진짜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내가 밥 사줄게.”

 “그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여자의 목소리는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자연히 생각은 태형을 처음 만나던 때로 흘러갔다. 원래부터의 다합의 구성원인인 양 자연스러워 보이던 태형을 동경했었다. 친근하게 구는 태형이 경계되면서도 내심 마음이 갔었다. 그러자 지금 방 안에 있는 여자가 나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지 내심 궁금해졌다. 태형만큼은 아니어도 이 곳에 속하는 사람처럼 보일까. 물이 계속해서 수돗가 바닥으로 흐르고 있었다. 굽혔던 무릎을 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연 여자는 영어를 하지 못했다. 오전 다이빙을 끝내고 돌아온 자파리, 무스타파와 거의 바디 랭귀지로 소통해야했고, 오스트리아 부부와는 대화다운 대화를 하지 못했다. 9급 공무원 준비를 하다가 때려치운 뒤 적금을 깨 여행을 시작했다는 여자는 붙임성이 좋았다. 영어 실력은 부족했지만 분위기를 읽어 제때 반응했고, 리액션도 큰 편이었다. 자신에 대한 정보를 쉴 틈 없이 쏟아내면서도 태형에게 눈길을 떼지 않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소희는 그럼 우선 한 달 잡고 온 거야? 다음은 어디 갈지 모르고?”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밥을 섞으며 재희 언니가 말했다.

 “아마 그리스 가지 않을까 싶은데, 이틀 지냈는데 쉐어 하우스 사람들 너무 좋아서 더 있을지도 몰라. 다합 너무 좋아. 여기 온 거 운명적이야.”

 소희는 한 마디로 성격이 좋았다. 코샤리를 볼이 불룩하게 물고 미간을 찌푸린 채 엄지 척을 내미는 모습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소희를 바라보는 태형의 표정 역시 웃음기가 가득했다. 나 역시 상황에 맞추어 웃고 싶었지만 미소가 나오지 않았다. 오늘 태형은 내게 말을 한 마디도 걸지 않았다. 늘상 실없는 농담을 먼저 걸곤 했던 평소와 달리 본 체 만 체 하는 모습이 기가 막혔다. 

 “어, 우리 담배 똑같은 거다.”

 담배에 불을 붙이던 태형이 소희의 담배 곽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그러네? 나랑 똑같은 것 피는 사람 처음 본다. 신기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태형과 소희를 가리키며 오스트리아 부부가 서로 눈짓을 했다. 재희 언니는 내 눈치를 보듯 저거 피는 사람 많은데, 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불청객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냥 카이로에 갈 걸.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다합에 남아서 이런 꼴을 보나. 적어도 내가 있는 동안에는 이러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원망스러운 마음이 치고 올라왔지만 내겐 탓할 수 있는 자격도 무엇도 없었다. 단지 마음을 고백한 뒤 차였을 뿐이었다. 그 사실에 얼굴이 더 화끈거렸다. 

 처음으로 재희 언니와 버디가 되어 펀 다이빙을 했다. 라이트하우스 앞바다에서 하는 다이빙은 헤엄쳐서 들어가는 것으로, 수심이 깊은 곳에 도달하면 부력조절장치로 공기를 빼 잠수하는 식이었다.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차가워지는 바닷물은 언제나 몸을 떨리게 했지만, 이젠 그마저도 익숙해질 참이었다. 적응이 될 무렵에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 아쉬워졌다. 재희 언니와 나는 손을 잡고 산호 위를 유영했다. 바다 속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반짝이는 공기방울이 유난히 아름다웠다. 해양 생물을 다치게 할까봐 자갈 위로만 다녔던 처음과는 달리 호버링에 익숙해진 지금은 보다 자유롭게 산호 위로 헤엄칠 수 있었다. 

 색색으로 반짝이는 물고기와 산호들이 시간이 지나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까. 해수면 아래에서 고요히 호흡하던 이 감각과 무수히 스쳐가는 지느러미들의 느낌이 영원히 내 안에 남아 있을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한 번은 내 안에 투과해 갔었다는 것이, 나를 뚫고 지나갔었다는 사실이 언제고 나에게 힘을 실어줄 것 같았다. 오리발을 힘껏 휘두르며, 나는 내가 바다 속에서 자유를 찾았던 사람이었다는 그 사실이 언제고 되찾을 수 있는 편린으로 남아있기를 바랐다. 

 “태형이가 말 안 해줬어? 안 쉬고 바로 비행기 타면 감압 때문에 문제 생겨.”

  계획이 차질이 생겼다. 마지막 스쿠버 다이빙을 하고 나서 열여섯 시간 이후에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정보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몸속에 쌓이는 질소와 기압 차이 때문에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공항을 가는 당일까지 다이빙을 하려던 계획은 자동으로 무산되었다. 그렇다면 내일이 마지막 스쿠버 다이빙이었다.

 “아쉬워서 어쩐대. 그래도 내일 다같이 블루 홀 갔다가 마무리하면 깔끔하겠다.”

재희 언니와 내가 지나가는 곳마다 작은 물웅덩이가 생겼다. 간이 샤워실로 가는 길목에 다다르자 언니가 다이빙 수트의 지퍼를 내렸다.

 “태형이도 간대?”

 “소희 오픈워터 봐준다했던 것 같은데, 모르겠다.”

 대답을 않자 재희 언니가 말을 보탰다.

 “지연아, 내가 태형이 인기 많다고 했잖아.”

 “응, 언니. 진짜더라. 근데 어쩔 수 없는 게 있더라고.”

 간이 샤워실 수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소금기에 찌든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을 감고 뿜어져 나오는 물에 몸을 맡겼다. 태형이 돌변한 이유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보다 여행지에서 여자들과 어울리며 다녔을 거라는 상상이 들어맞은 것이 우스웠다. 오늘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던가. 친절한 듯 흘리는 말투는 습관적인 것임에 분명했다. 그래도 그 중 나는 특별하지 않았을까,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럼에도 이대로 스쳐 지나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더 손을 뻗어봐야 했다. 

 외벽을 지나쳐 방 안쪽으로 들어가자 벽에 걸린 조끼들을 정리하고 있는 태형의 뒷모습이 보였다. 물기 하나 없는 태형과 달리 꼴이 말이 아니었다. 미처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빗지 못한 머리는 엉킨 채 엉망인데다가 추위에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있을 게 분명했다.

 “태형아.”

 쿵쿵 빠르게 질주했던 심장이 정박자로 뛰는 게 느껴졌다. 복잡했던 생각들이 파도에 휩쓸려나간 것처럼 마음이 잔잔했다. 비로소 하고 싶은 말을 꺼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일 나랑 버디하자.”

 “누나.”

 “나 내일 마지막 스쿠버야. 모레 밤에 다합 떠나는 거 알잖아.”

 “얘기 다 끝났잖아.”

 말을 끝낸 태형은 다시 등을 돌려 조끼를 옷걸이에 걸기 시작했다. 고요한 공간에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와 탁탁 옷걸이 거는 소리만이 퍼졌다.

 “그래도 기다릴게. 내일까지 생각해봐.”


 대답을 하지 않는 태형을 두고 카운터를 지나쳐 샵을 벗어났다. 거리에 나오고서 아직 손에 수건이 들려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부끄러울 겨를이 없었다. 대각선으로 내리쬐는 햇살을 받자 꽁꽁 얼어있던 몸이 해동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목적지는 없었으므로 일직선으로 쭉 뻗은 길을 따라 슬리퍼를 끌었다. 늘 다니던 바다 옆 큰 길을 벗어나 골목으로 접어들자 황토빛 주택들 사이로 과일 음료를 파는 가판대와 꼬치를 파는 트럭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페달을 밟았다. 

 돌아갈 날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책상에 대용량 커피를 올려두고 파티션에 갇혀있던 과거가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만큼, 다가올 현실도 남의 일처럼 생각되었다. 쌓여있을 업무를 생각하면 골치가 아픈 게 정상이건만 붕 뜬 기분은 이성적인 사고를 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눈물이 오른쪽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그제서야 소리 내어 내뱉을 수 있었다. 나쁜 놈. 

 쉼 없이 차오르는 눈물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마침 들고 있던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문질렀지만 눈물이 나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바람둥이 같은 자식. 처음부터 알아봤는데. 마음을 다 내어줄 것 같은 행동들을 했으면서, 그렇게 다정한 말들을 해놓고, 사람을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눈물과 함께 하지 못한 말들이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해는 천천히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구름 뒤로 물들어가는 하늘은 파스텔로 그린 듯한 주황빛과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처음 관광을 온 사람처럼 거리를 쏘다녔다. 한 쪽 손에 수건을 든 채로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는 모양새가 관광객 같아 보이진 않았겠지만. 요란한 그래피티가 그려진 골목을 지나 주택가로 접어들자,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현지인들이 보였다. 다시 바다를 보고 싶었다. 눈물은 멈춘 지 오래였다. 

 나무 펜스에 기대어 상체를 반쯤 내밀고 눈을 감았다. 눅눅한 공기가 폐부에 가득차면서 동시에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서울에 있을 때의 내가 지금의 홍지연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서울의 홍지연은 사람들에게 배타적인 편에 가까웠다. 루틴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쉽게 염증을 느꼈다. 다합에 와서 다이빙을 하고, 태형을 만나면서는 어땠나. 돌발 행동을 했고, 태형에게 최선을 다해 돌진했다.

 내심 알았다.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걸. 태형은 단 한 번도 확신을 준 적이 없었다. 태형 안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의 정체를 명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끝내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예감했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덮쳐오는 배신감은 어쩔 수 없었지만. 처음부터 눈치 챘던 부분들도 애써 모른 척 했었지 않았던가. 그러자 누구를 탓할 것도, 원망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잔잔한 파도가 치는 바다는 이제 어둠 속으로 잠겨들고 있었다. 태형 앞에서 등신 같아진다는 말을 철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형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를 여전히 다는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 자신만을 생각해보았을 때는 달랐다. 한 톨도 남김없이 마음을 다 내어보여주었다. 찝찝한 잔여물도, 아쉬운 뒷말도 남아 있지 않았다. 태형과의 묘한 기류가 시작된 뒤 늘 날뛰던 마음이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습하게 느껴졌던 공기가 산뜻하게 주변을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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