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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 Dec 27. 2021

넌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나에게 물었다.

넌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나중에 묘비에 나를 어떤 사람으로 표현하고 싶어?

그 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만큼 삶의 의미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오히려 더 단순명쾌했다. 초등학생 때 내 꿈은 반에서 가장 웃긴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해서, 항상 무슨 대회에 나가면 상을 타야했고, 누군가가 알아봐주길 간절히 원했다. 인정욕구는 공부에서 뿐만 아니라 사교면에서도 강했는데, 다른 사람의 호감을 얻기 위해서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웃기기 위한 온갖 노력을 했다. 먼저 인상부터 바꾸기로 했다. 표정만으로도 사람들을 웃길 수 있다는 생각에, 매일 거울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웃는 연습을 했고, 요즘 유행하는 개그를 적재적소에 써먹었다. (덕분에 정말 얼굴만으로도 웃길 수 있었다ㅎㅎ)


그리고 남들과 항상 다른 아이디어를 가진 창의적인 사람이 되려고 온갖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뭔가 특별해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 엉뚱한 망상도 그때부터 시작이었던 것 같다. 나이로 치면 아마 12살부터였을 것이다. 아직도 희미하게 기억나는 것은 이런 삶의 목표를 가지고 그 당시 살게 된 계기는 한 선생님의 칭찬때문이였던 것 같다. 그 선생님이 누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해주신 말씀은 똑똑히 기억난다.


"oo이는, 참 창의적이구나!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니? 대단하구나~"


그 칭찬이 내가 받은 칭찬 중 가장 인상깊었고, 가장 나를 기분 좋게 했다.

그래서 그 뒤로, 진짜 창의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상상글짓기도 해보고, 난해한 질문도 해보고 나름 노력을 했던 것 같다. 일부러 남들과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느낀 점이나 감상평을 적을 때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참신한 비유법으로 나를 표현했다.


이렇게 10대 초반까지는 재미있고, 창의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세월이 흘러 10대 후반이 되었을 때는, 오로지 공부에만 미쳐있었다.

어떻게 하면 반 1등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쟤보다 성적이 잘 나올까?

아, 등급 빨리 올려야 하는데.. 얘는 왜 자꾸 이상한 농담을 하는거야..

이처럼 늘 조바심으로 긴장된 상태였고, 경주마를 타고 앞만 보며 달리고 있었다. 오로지 1등급을 위해.

어쩌다 그런 목표를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환경의 영향이 가장 컸던 것 같다.

학교에서는 항상 대학을 잘가야 성공한 인생. 이라는 분위기였고 그에 걸맞는 인재가 되기 위해 다들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다가가지 않아도 먼저 다가와주는 친구들에게 늘 냉정하게 대했고, 배려하기보다는 배려를 받는 쪽에 속했다. 물론 사람을 좋아하고 잘 따르는 성향이라, 친구들을 대차게 내치지는 못했지만 그 당시 나의 가치관은, 공부하는 데 감정적으로 훼방을 놓는 친구는 거리를 둬야겠어. 주의였다. 이성의 지배를 굉장히 받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때문에, 문과인데도 이과친구들과 훨씬 많은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감성을 건드리는 친구가 나타나면 방어모드로 무장하고, 스스로 바리게이트를 쳤다. 물론 그럼에도 내 마음을 툭툭 건드리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 극단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산지, 1년 정도 되었을까. 이렇게 계속 살다간 마음에 가뭄이 들어 곧 쓰러질 것 같았다. 결국 감정표현에 능한 친구들, 예를 들면 애초부터 애교를 기본으로 장착한 친구들, 틈틈히 보고싶다, 같이 놀자고 얘기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레 마음이 열리게 되었다. 그렇게 그 친구들 덕분에 내가 준 건 없지만, 사랑을 두 배, 세 배로 받는 고등학교 생활을 하게 되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껏 만났던 친구들과는 결이 달랐고, 가족들 다음으로 이렇게 무한정 사랑을 퍼줄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물론, 내가 너무 무뚝뚝한 편이여서 속으로는 엄청 고맙고, 가슴이 벅차올랐지만, 공부에 우선순위를 뒀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만큼 애정을 주지 못했다. 그렇게 그 친구들과 연을 끊게 됐지만 정말 인생에서 값진 경험을 하게 되었다. 왜 그들이 타인에게 사랑을 주면서도 기뻐하고 좋아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무한애정을 주니, 마음이 활짝 열릴 수 밖에 없었다

나 역시, 뭔가 받은만큼 줘야겠다는 묘한 의무감이 생겨 어떻게 그들에게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지 연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책상에 앉아있으면서도, 괜한 미안함이 들어 어떻게든 감정을 드러내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탐색하고 좋아하는 분야에 공감해주고, 가끔 진심어린 편지도 써 주고, 선물도 주고받으면서 사람 대 사람으로 교감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 마음도 터질듯한 기쁨으로 차오른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 나 자신에게도 이렇게나 큰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20여년만에 알게 되다니..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확실히 알았다. 이제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 같이 있으면 좋은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 그 덕분에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기고, 행복의 호르몬이 온 몸에 퍼지게 만드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때, 전제는 내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 줄 알고, 누군가에게 받는 것을 바라지 않고 무한정으로 사랑과 행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결국 고2 말에, 어릴 적부터 되고 싶었던 작가의 꿈을 접고, 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교사는 작가보다 더 많은 학생들에게 직접적으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어릴 때는 이렇게,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항상 고민하며 그 방향에 맞게 나아가려고 노력했었다. 그런데 대학에 온 뒤로 지금까지 목적없는 항해를 하고 있었다. 삶을 '그냥' 살아가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교사 일을 하면서 방향성이 없으면 하루하루가 얼마나 험난한지 깨달았고, 한 선생님의 물음으로 갑자기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어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서 교사 일을 시작한 거였더라..?'


자문자답의 시간을 가지며,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니 지금 나는 항해를 하다 잠시 무인도에 정박한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인도에서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살다가, 가야할 곳을 잊고 잠시 그 곳에 머물게 된 것이다.


사람들도 저마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 원래 가기로 했던 곳보다 더 마음에 드는 섬을 발견해 정착했을 수도 있고, 중간에 요동치는 파도에 휩쓸려 회오리 속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 누군가의 도움으로 혹은, 스스로 자각하여 내가 나아온 이 길을 한번 되돌아 보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야 다시 항해를 시작할건지, 잠시 쉬어갈건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환경에 의해서가 아닌, '나'의 의지로 말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인생을 끌고나가는 선장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정하는건 오로지 나의 몫이기에 명확한 목적지가 없을 수는 있지만, 그 목적지를 설정하지 않음도 결국 나의 선택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번쯤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고민해보고, 원하는 항로로 나아가면 좋겠다. 그러다보면 그 과정도, 보다 의미있는 일상이 되어 있지 않을까. 태어난 김에 사는, 주먹구구식의 삶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하루를 누구보다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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