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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진 Jan 31. 2020

점 위의 티끌

그곳에서 살아가는 우리

The pale blue dot

코스모스 이전 작품 이름이기도 한 창백한 푸른 점이다.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로 사진을 보면 무엇이 떠오르는지 궁금해져서 주위 사람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이게 뭐 같냐고 물어보고 다녔다. 그중 인상 깊었던 대답 몇 가지를 추려보도록 하겠다.


"핸드폰에 뭍은 먼지인가? 아니면 액정에 이상 생긴 거 아냐? 번인이라던지.. 아 사진이구나?"


"머리카락을 확대해서 찍은 건가? 뭔데 여기 동그라미를 쳐뒀지?"


"현대미술작품인가? 뭐지 이건?"




위 사진에 있는 티끌 같은 창백한 점은 바로 지구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지구(Earth)다.

명왕성을 지나 태양계를 벗어나고 있는 보이저 1호를 이용해 찍은 사진으로 지구에서 약 64억 km 지점에서 찍은 사진이다.  티끌처럼 보이는 저 부분이 지구라는 것은 그렇다 치고 저 검은 공간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무의 공간은 아닐 것이다. 검은 공간이어도 방향을 잡고 계속 나아가다 보면 너무 멀어서 보이지 않던 별이 나타날 수 도 있을 것이다. 단지 그 시간이 정말 말도 안 되게 오래 걸려서 그렇지


 이런 우주적 스케일을 느껴볼 수 있는 사진을 보면 내가 지금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되는 겸손한 마음과 함께 우주적 단위에 비하면 찰나를 살아가는 우리가 고민하는 것이 다 부질없어 보이기도 한다. 인류의 역사 전체를 조망해보아도 우주의 역사에 비하면 정말 찰나일 뿐이다. 이런 무력감과 공포 때문일까? 공포의 한 장르에도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 혹은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강조하는 장르가 있다. 바로 Cosmic Horror 혹은 Cosmicism이라고 불리는 장르이다. 


 이 장르에서 등장하는 존재들은 선의를 가진 존재인지 악의를 가진 존재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벌어지는 상황도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불분명하다. 우리의 인지 범위를 벗어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이 분명할 뿐. 작품 속에서는 이 미지의 존재와 현상에 대한 공포를 그려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장르이다. 쉽게 접해볼 수 있는 작품으로 넷플릭스에서 시청 가능한 서던 리치-소멸의 땅이라는 작품이 있다.


넷플릭스 - 서던 리치, 소멸의 땅


이런 작품에서 그려지는 인류는 발달한 문명을 가지고 있지만 번개를 두려워하고 천적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남는데 집중했던 초창기 인류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장르의 이름에 들어있는 Cosmos라는 단어는 조화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장르는 극한의 혼돈인 Chaos를 그려내고 있다. 이런 작품들은 초기 인류의 근원적인 공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작품의 세계를 떠나 실제 우리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자. 초기 인류에게 자연을 물론 우주도 혼돈 그 자체였음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그 공포와 경외심을 담아 자연과 우주는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이미지화하고 이야기를 붙여 신화를 만들어 냈다. 신화 속에 머물던 우주는 어느 철학자들에 의해 이해하고 분석 가능한 대상이 되었다.


고대 이오니아 인들은 우주에 내재적 질서가 있으므로 우주도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자연현상에서 볼 수 있는 모종의 규칙성을 통해 자연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은 완전히 예측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자연에게도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주의 이렇게 훌륭하게 정돈된 질서를 '코스모스'라고 불렀다.
<코스모스, 칼 세이건>

    

이오니아 인들의 우주에 대한 분석의 시도는 창대했으나 그 결과가 후세까지 전해지지는 않았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화재가 바로 그 원인이다. 이 도서관에는 당시 세계의 모든 지식이 총정리되어있다고 볼 수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화재로 인해 모두 소실되었고 과학에 있어 암흑기가 찾아온다. 하지만 인류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지식을 쌓아 나가 현재 지구를 떠나 우주로 탐사를 시작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우리 인류의 끊임없는 도전과 성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천문학의 역사 속에서 우주를 들여다보는 이들은 미지의 영역에 발을 내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외계 문명과의 조우를 상상하는 모습은 그중에서도 단연 백미이다.


지구문명이 악의에 찬 외계 문명과 만났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걱정할 필요조차 없다. 그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동족이나 다른 문명권과 잘 어울려 살 줄 모른다면 그렇게 오랜 세월을 견뎌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외계 문명과의 만남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후진성에서 유래한 것이다.
<코스모스, 칼 세이건>


칼 세이건이 말하는 코스모스는 연결 속에 존재한다. 악의에 찬 외계 문명은 존재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호전적인 문명이 몇 억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어질 수 있을까? 자연과 우주에 대해 두려움만 느끼던 인류가 지금은 우주를 활동영역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 우주적 스케일에서 보자면 우리 인류는 점 위의 티끌에서 찰나를 반짝이다 사라져 가는 존재들이다. 이런 존재들이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지구를 비롯한 우주 전체가 혼돈을 피하고 조화로움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우주를 이야기 하지만 우주를 이해하기 위한 인류의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책이다. 그 과정을 살펴보며 뿌듯함과 일종의 인류애를 느낄 수 있었음은 물론 삶에 적용할 수 있는 통찰도 얻을 수 있었다.


과학교양도서로 훌륭하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읽어보니 우주에 대한 이해라는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매크로 히스토리 역사서로도 굉장히 훌륭한 책이었다. 


두께에 놀라 아직 읽어보지 못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챕터별로 읽으면 생각보다 쉽게 읽히니 도전해보시길 꼭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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