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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Feb 25. 2024

캘리포니아(2)_사막, 선인장

작년 2월 서울에서 1박 2일 중집 회의를 마치고 울면서 내려왔다. 피곤과 스트레스에 절은 상태로 기차에서 실장님과 통화를 하다가 갑자기 터져 버렸다. '지부장이 된 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나 때문에 대전지부가 망할 것 같다' 나의 횡설수설에 실장님은 지금 당장 대전역으로 데리러 오겠다고 난리를 치셨다. 혼자 갈 수 있다고 주장하며 대전역에서 흑흑 청승을 떨고 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여기서 울고 있어?" 


예고 없이 나타나 놀라게 하길 좋아하는 배우자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질문에 아무 대답도 못했다. 실제 아무 일도 없었을 뿐더러 진이 빠져 입술을 달싹거릴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작년 초반에는 중집에 참여할 때마다 외계에 던져진 신생아가 된 기분이었다. 낯선 용어와 절차들이 각양각색의 짙은 방언 억양과 어우러져 나로선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조차 없었다. 나는 영어가 모국어인 외국인들 사이에서 홀로 전투하듯 공부한 경험이 있는데 당시의 고독했던 상황조차 중집 회의의 언어 환경만큼 낯설거나 힘들진 않았었다. 중집위원들의 발언은 길고 장황했고, 절차는 말도 안 되게 복잡하고 관료주의적이었다. 앞으로 매달 이런 기나긴 회의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공포감이 몰려왔다. 나의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서툰 내가 적응하지 못해 대전지부가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도 컸다. 지금 생각하면 자기중심적이고 우스운 걱정이다. 나 하나 때문에 망할 조직이었다면 망해도 벌써 망했을 거다. 


대전역 눈물바다 사태 이후 정확히 일 년이 흘렀다. 멋모르고 시작한 지부장 역할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결국 살아남았다. 매달 열리는 중집회의는 여전히 내가 볼 때 괴상하고 비효율적이며, 나를 포함한 지부장들이 다들 정상은 아니다(도대체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지부장 따위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대대적 혁신이 필요한 것과 별개로, 그들 ‘한 명 한 명’ 모두에게 배우고 존경할 지점이 있다는 생각은 자주 한다. 정책 설계 능력, 조직 능력, 끈기, 포용, 내게 부족한 헌신과 희생 정신 같은 것들.


2년 차인 올해 2월 중집회의도 매우 힘들었다. 귀국하자마자 시차적응도 못한 상태로 늦은 밤까지 일정이 이어졌고 회의 중에 기절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 지부장의 증언에 의하면 '대전지부장은 정말 그러할 것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1박 2일 중집 다음 날 이른 아침에는 공주로 날아가 신규 임용 교사 연수까지 무사히 마쳤다. 예전 같으면 소화해 낼 수 없는 강행군이었다.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닌 중집위원들이 얼마나 성실히 일하고 있는지, 조합원들이 우리에게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는지, 또 많은 활동가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헌신과 희생이 이 조직을 어떻게 지탱하고 있는지 알게 된 이상 나 역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간이 된 것 같다. 그 헌신의 조직적, 구조적 지속가능성에 관한 의구심과 별개로 말이다. 


정확히 일주일 전까지 나는 캘리포니아 사막을 이리저리 통과하고 있었다. 선인장이 빽빽한 사막, 정말 모래밖에 없는 사막 위를 두서없이 거닐었다. 사막에서 작년 이맘때 내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나는 사막에 갓 태어난 아기 선인장이었다. 이제 나는 사막을 품은 한 마리의 선인장이고 급기야 사막의 아름다움도 알 것 같다. 지난 일 년 동안 나는 정말 많이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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