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중집 회의는 아침 11시에 시작해서 새벽 3시에 끝났다. 발산에서 대충 자고 다음날 아침엔 용산 대통령실 앞에 모였다. 그리곤 선크림을 땀구멍으로 웩웩 토해내며 ‘공무원·교원 임금 인상’ 선전전을 벌였다. 실로 하드코어한 일정이었다.
요즘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다른 지부장들에게 묻는다. "밤이 되면 힘들잖아요, 그렇죠?", "저만 졸린가요? 그런건가요?" 일부 지부장들이 답했다. "몸에 배어서인지 크게 힘들지 않네요", "나이가 들어서인지 초저녁잠만 늘고 밤엔 오히려 괜찮아요".
그냥 스프링클러를 눌러버릴까. 몰래 전기차단기를 내리고 도망가버릴까. 비밀리에 고민해 봤지만 지금으로선 답이 없다. 건너편에서 꾸벅꾸벅 조는 다른 지부장들도 있는 걸 보면 확실히 나만 힘든 건 아니다.
사실 7월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 때문에 주먹을 불끈 쥐고 서울에 올라갔었다. 그런데 해당 안건을 논의할 시점이 되니 이미 새벽 2시였고, 나는 완전히 비몽사몽 상태가 돼버렸다. 초반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런 말로 시작했던 것 같다.
"우리를 운명공동체라고 생각한다. 본부 지부 경계 없이 조직 전체 그림을 보며 일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협업이 안되서야 되겠습니꽈아!"
말을 하다 보니 한 달 묵은 울화가 치밀어서 잠이 깼다.
"앞으로도 이렇게 칸막이를 치고 일한다면 조직의 미래가 어두울 것입니다!"
맹세코 특정 인물들을 향해 화가 났던 게 아니다. 협업하고 관점을 바꾸면 더 잘할 수 있는데, 사방팔방 올가미에 발목을 잡힌 듯한 상황이 나로선 답답하고 힘들 때가 많다.
오늘 아침, 유체이탈 상태로 선전전을 하며 문득 수년 전 학교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학교 사정으로 내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1년 간 체육교담을 맡은 적이 있다. 교육과정상 배구를 가르쳐야 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나는 배구를 전혀 못하고 싫어한다. 하지만 내 능력 부족으로 동영상이나 학생 시범으로 대체하는 건 부적절하단 생각이 들었다.
교장실에 찾아가 요청했다. '교장선생님이 배구를 잘하시니 수업을 함께해 주시죠'. 교장선생님은 다소 놀란 기색이었으나 결국 본인은 물론 지역사회 배구협회장까지 초청해 6학년 학생들에게 현란한 시범과 안내를 선보였다. 씨름 관련 내용을 가르쳐야 했을 때는 학교 공익요원과 함께 했다. 공익요원이 한국체대를 졸업한 교원자격 소지자인데다가 전국체전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레슬링 선수였기 때문이다. 나는 배구와 레슬링을 전혀 못하지만 주위의 자원을 활용하고 협업한 덕분에 아이들에게 꽤나 특별한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었다.
나는 (좋게 말하면) 대범하고 경계가 없는 성격인 것 같다. 국경도 내겐 별 의미가 없다. 아무 음식에나 바나나를 마구 때려 넣는 것도 칸막이 없는 성격 탓일 거다. 나는 이번 문제 상황에서 내가 공적으로 요구했던 내용이 정당했다고 생각한다. 협업체계를 긴밀히 하고, 탄력적으로 일하는 방식을 고민하지 않으면 조직의 미래는 암울할 것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최근의 사태에 내 개인의 성향과 기질이 얽혀 들어가 있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로선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었겠다, 라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유독 (혹은 언제나) 언쟁과 이견이 많았던 중집회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으며, 역시 우리는 동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라고 훈훈하게 마무리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간단히 정리될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태어나 가장 힘들고 더운 나날 위에 펼쳐진, 길고 긴 회의였다. 다음 날 아침 선전전 할 때 너무 더워서 비나 쏟아지길 바랐는데 마침 손등 위로 물방울이 호드득 떨어졌다. 나는 기대에 차서 외쳤다.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졌어요!”
생물교사 서울지부장님이 내 손등 위의 물방울 자국을 확인하고 담담히 말했다.
“매미 오줌입니다”
에라이..
(2024. 8.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