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PO 업계에 떠도는 이야기 하나

취중잡담(醉中雜談) - 술김에 적는 솔직한 이야기들

by iid 이드

※ ‘취중잡담(醉中雜談) - 술김에 적는 솔직한 이야기들’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지인들이 익명으로 참여해, 술자리에서나 나눌 법한 솔직한 생각과 이야기를 가볍지만 진지한 시선으로 풀어내는 프로젝트입니다.



팀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이 바닥에 떠도는 말이 있다.
“상장은 회사가 하는 게 아니라, 팀이 한다.”
처음 들으면 허세처럼 들리지만, 몇 번만 현장을 겪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중심에는 늘 타락한 회계사 하나가 있다.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예전엔 규정 잘 지키고, 숫자 깔끔하게 맞추던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상장이라는 이벤트의 맛을 본다. 그때부터 방향이 조금씩 틀어진다. 회사 성장보다는 상장 자체를 완성하는 일이 목적이 된다. 그렇게 상장만 전문으로 하는 패거리가 만들어진다.


구성은 늘 비슷하다. CFO는 숫자 만지는 주포다. 회계사 출신이고, 재무제표로 스토리를 만드는 데 능숙하다. CTO는 기술평가서, 사업설명서를 수십 번 써본 아재다. 기술을 깊이 이해하진 못해도, 어떤 표현이 심사위원을 안심시키는지는 몸으로 안다. 여기에 똘마니 둘이 붙는다. 한 명은 재경 실무를 돌리며 숫자와 증빙을 맞추는 역할이고, 다른 한 명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사람을 붙이고 분위기를 만드는 행동대장이다.


이 조합이 첫 회사에서 상장을 한 번 같이 해본다. 밤샘하고, 욕먹고, 서류 다시 쓰고, 심사 대응하면서 고생을 함께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술자리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야, 우리 합이 너무 좋은데?” 그날 이후부터 생각이 바뀐다. 회사 하나에 묶여 있을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렇게 이들은 회사가 아니라 팀 단위로 움직이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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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잇감은 늘 가까이에 있다

다음 타겟은 멀리서 찾지 않는다. 타락한 회계사가 주변을 훑다가, 대학교 동기 하나를 떠올린다. 어수룩하고 착한 친구다. 욕심도 많지 않고, 사람도 좋다. 중소기업을 운영 중인데 매출이 100억대, 이익은 20억 정도 난다. 숫자만 보면 나쁘지 않다. 오히려 이 정도면 웬만한 중소기업 중에서는 상위권이다.


회계사는 계산이 선다. 이 회사는 이미 기본 체력은 있다. 다만 포장이 안 돼 있을 뿐이다. 머릿속에서는 시나리오가 돌아간다. “이 정도면 포장만 잘 하면 한 번 더 할 수 있겠는데?” 회사를 키우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키우는 작업이 머릿속에서 시작된다.


술자리가 모든 걸 바꾼다

연락은 가볍게 온다. “야, 얼굴이나 보자.” 처음 술자리는 그냥 옛날 얘기다. 학교 다닐 때 얘기, 군대 얘기, 회사 얘기. 술이 몇 잔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회사 얘기로 넘어간다. 그다음부터는 늘 같은 방향이다.


“요즘 이 정도면 상장 각이다. 니 회사 지금 너무 저평가야. 너만 마음먹으면 판이 달라진다.”


그 친구는 처음엔 손사래를 친다. 상장 생각도 없고, 지금 있는 회사 운영하기도 빠듯하다고 한다. 직원 월급 챙기는 것도 버거운데 무슨 상장이냐고 말한다. 하지만 술자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몇 달 동안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술자리에서 돈지랄도 한다. 좋은 술, 좋은 자리, 과한 계산. 꿈을 심고, 그림을 그리고, 숫자를 보여준다. 사람은 반복에 약하다. 어느 순간부터 그 친구 입에서도 “만약에…”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다. 결국 흐름에 올라타고, CFO 패거리에 입성하게 된다.


상장 준비는 속도가 생명이다

패거리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일은 빨라진다. 주관사를 선임하고, CFO가 아는 투자사를 끌어온다. 지금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투자를 받는다. 사업 확장을 위한 자금이라기보다는 기업가치를 찍기 위한 자금이다. 목적은 하나다. 숫자를 예쁘게 만드는 것.


매출을 키우기 시작한다. 정상적인 방법만 쓰지 않는다. 매출을 높이기 위해 비정상 거래가 시작된다. 관계사 거래, 구조만 맞춘 거래, 실질보다 과장된 매출 인식. 동시에 비용이 줄어든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비정상 거래도 시작된다. 비용을 뒤로 미루고, 계정만 바꾸고, 타이밍을 조정한다.


이 모든 과정 뒤에는 CFO 팀을 지원하는 로컬 회계법인 한 팀이 붙어 있다. 이 팀은 숫자를 직접 만들기보다는, 만들어진 숫자가 문서와 증빙으로 무너지지 않게 받쳐준다. 구조를 짜고, 설명 논리를 만들고, 질문에 대비한다.


문제는 없어 보인다

겉으로 보면 다 완벽하다. 숫자도 맞고, 문서도 맞고, 설명도 그럴듯하다. 의심할 정황은 있다. 하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모든 거래 문서와 증빙이 맞아떨어진다. 이 바닥에서 제일 무서운 말이 나온다. “딱히 뭐라고 할 수는 없네요.” 문제는 있는데, 문제라고 말할 수 없는 상태. 그게 가장 안전한 상태다.


주관사가 멈칫하면

주관사가 중간에 잠깐 멈칫하는 순간이 온다. 그럼 대응은 늘 같다. 술을 졸라 먹인다. 골프 접대를 돌린다. 목소리를 높인다. “이거 다 관행입니다.다들 이렇게 합니다.” 이 말을 반복하면서 어떻게든 청구하자고 밀어붙인다.


거래소 심사 국면에 들어가면 판은 더 커진다. 이번엔 정치권 인맥까지 총동원된다. 누가 누구를 안다는 이야기가 오가고, 전화 한 통이 분위기를 바꾼다. 이쯤 되면 회사의 미래를 논하는 자리인지, 사람의 관계를 관리하는 자리인지 헷갈린다.


숫자는 기적을 만든다

결과는 화려하다. 매출 100억짜리 회사가 갑자기 300억이 된다. 이익은 70억을 찍는다. 기염이다. 몇 년 걸릴 성장처럼 보이지만, 서류 위에서는 한두 해 만에 완성된다. 적어도 문서와 발표 자료 안에서는 완벽한 성공 스토리다.


특허 설명만 길어진다

기존 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특허 기술에 대한 설명이 갑자기 길어진다. 예전에는 내부 문서 한 줄로 끝나던 기술이, 어느 순간부터는 몇 페이지짜리 설명으로 확장된다. 용어는 더 정교해지고 표현은 학술적으로 바뀐다. 같은 기술인데 말만 어려워진다. 그 특허가 실제로 회사의 경쟁력인지, 핵심 기술인지 분간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설명과 특허 리스트만 놓고 보면 글로벌 기업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기술 포트폴리오가 완성된다. 적어도 문서 위에서는 그렇다.


언론은 마지막 퍼즐이다

마지막 퍼즐은 언론이다. “유럽 굴지의 바이오 기업 ‘P’사와 협업 논의 중” 같은 기사들이 슬슬 뿌려진다.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논의 중’이라는 말은 언제나 안전하다. 부정도 아니고, 확정도 아니다. 읽는 사람 마음속에서만 기대가 커질 뿐이다.




이게 다 사실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모르겠다. 누군가는 과장이라고 할 거고, 누군가는 음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 이야기 안에는 소문도 섞여 있고, 누군가의 기억이 덧칠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건, 이 바닥 술자리에서 이 구조가 회사 이름만 바뀐 채로 반복해서 들린다는 사실이다. 업종이 조금씩 다르고, 규모가 다를 뿐, 등장인물의 역할과 순서는 놀랍도록 비슷하다.


취중잡담은 늘 그렇다. 누구도 실명을 말하지 않는다. 다들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설마 그런 회사가 있겠냐”는 말로 마무리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야기를 듣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머릿속에 몇 개의 회사 이름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뉴스에서 봤던 기업, 상장 직후 갑자기 조용해진 회사, 숫자만 화려했던 기업들이 겹쳐진다. 더 씁쓸한 건, 이 이야기가 아주 특별한 악인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등장하는 사람들도 괴물이 아니다. 회계사는 자기 일을 잘한다고 믿고, CTO는 문서를 완성한다고 생각하며, 대표는 회사를 키운다고 믿는다. 각자의 자리에서는 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문제는 그 이유들이 모여 한 방향으로만 밀려간다는 것이다. 그 방향이 회사의 지속성인지, 아니면 이벤트 하나를 위한 질주인지는 그다음 문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항상 끝이 흐릿하다. 누군가는 상장을 하고, 누군가는 빠져나오고, 누군가는 다음 회사를 찾는다. 남는 사람은 회사와 직원들인데, 그 이후 이야기는 술자리에서 잘 나오지 않는다. 다들 다음 술자리, 다음 딜, 다음 이벤트로 관심이 옮겨간다. 이 바닥에 오래 있다 보면 알게 된다. 진짜 무서운 건 불법이 아니라 합법처럼 보이는 회색지대라는 걸. 문제를 만들지 않는 게 아니라, 문제라고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구조가 가장 강력하다는 걸. 그리고 그런 구조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술자리 한 번, 타협 한 번, 관행이라는 말 한 번씩 쌓여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고발도 아니고, 폭로도 아니다. 그냥 술자리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 술자리를 몇 번 반복해서 듣다 보면, 한 가지 감각은 분명해진다. 이건 특정 회사의 문제가 아니라, 이 업계가 스스로 만들어온 풍경이라는 감각이다. 그 풍경이 익숙해질수록, 더 이상 놀라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가장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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