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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빛찬란 Sep 14. 2021

완전연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상상, 호기심 그리고 치열했던

상상想像은 내게 친구이자 놀이였다. 부부 싸움이 시작되면 어린 나는 상상의 세계로 숨바꼭질하듯 숨곤 했다. 시시비비는 폭언이 되고 폭언은 폭력이 됐다. 일상처럼 불안정한 날들이 계속되었고 엄마와 아빠가 결국 갈라서기로 하자 이젠 누가 아이들을 키울 건지로 싸우기 시작했다. 양육권을 서로 가지려는 아름다운 싸움 따윈 없었다.

법원에서 양육자가 지정될 때까지 우리들은 엄마와 아빠의 고향을 짐짝처럼 오갔다. 숱한 전학으로 낯설게 펼쳐진 시골 풍경과 서먹한 또래들과 정들 새 없이 옮겨 다녔다. 지루한 시간을 견디는 동안 상상은 내 친구이자 놀이였다. 상상의 세계에 곧잘 들어가기도, 빠지기도, 숨기도 하면서 나름 현실의 고통을 이리저리 피해 갔다.

그런 떠돌이 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건 아빠였다. 선심을 쓰듯 했지만 돌이켜보면 교묘하고도 비굴한 제안이었다.

“아이들을 내가 키우겠다. 단, 초등학교를 졸업시키면 모두 공장에 보내겠다”라고 선언한 것! 마음 여리고 교육열 높았던 대학을 졸업한 엄마는 이 말에 기겁을 하며 백기를 들고 말았다. 용감하게도 30대에 딸 셋을 키우는 싱글맘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엄마가 우리를 버리지 않고 함께 살게 되어서 몹시 행복했지만 고단하고 가난한 삶이 시작되었다.  

  

10대 


1987년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때 열네 살이었다. 기습시위 중인 대학생들에게 건네받은 전단지에는 5.18 광주 학살 사진이 실려 있었다. 잔인하게 공권력에 의해 살해된 임산부의 사진이었다. 국가는 정의롭다고 굳게 믿었던 내 인식에 첫 균열을 가한 사건이었다. 이듬해 담임선생님이 해직되었다. 존경하는 선생님이 전교조라는 이유로 교실에서 사라진 것이다. 5.18과 전교조 해직교사. 이 두 사건을 계기로 한국 사회 모순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첫사랑이 시작되었다. 열여섯 겨울이었다. 한 소년이 별자리에 얽힌 신화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주었는데. 밤하늘 무수한 별들이 쏟아질 듯 내 가슴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사랑이었다. 소년은 내성적이고 말수도 적었으며 무뚝뚝하며 퉁명스럽고 좀처럼 웃지 않았다. 워낙 수줍음이 많아서 한동안 친구들을 데리고 나와서 나를 만날 정도였다. 평범하고, 평범하고, 평범했지만 내겐 유일하게 특별한 사람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상상像想이 친구이자 놀이였던 내게 첫사랑은 세상 전부인 존재가 되어 주었다. 첫사랑에게 기댄 채 나는 조금씩 내 존재와 인식의 세계를 넓혀 갔다. 학교 안에서는 문예부와 교지편집부 활동을, 학교 밖에서는 풍물동아리와 독서 토론회에 가입했다. 노동 연극에 빠져 지내기도 했다.   

 

20대 


나의 20대는 치열했다. 사범대학 특수교육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살겠다 다짐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미국 장애인 교육법을 달달 외워 받아쓰기를 했다. 한국 장애 현실은 엉망인데 미국 법만 외우고 있는 내가 한심했다. 현장에서 답을 찾고 싶었다. 한 학기를 마치고 대학을 자퇴했다. 충북 음성 꽃동네에 들어갔다. 노숙자 숙소, 버려진 아기들과 할머니들이 함께 기거하는 집, 정신병동, 호스피스 병동까지 두루두루 옮겨 다니며 수개월을 살았다.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밤마다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못에 찔린 환자가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파상풍으로 죽는 일도 있었다. 꽃동네에 지내면서 가난과 죽음, 교육과 의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다시 부산의 국립대 특수교육과에 입학했다. 장애인 야학 교사로 활동했다. 학생은 많고 교사는 없었다.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5년간 야학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일했다. 대학 졸업반이 되었을 때 “나는 교사가 되지 않겠다. 야학 간사로 남겠다”라고 결심했다. 하지만 39세 이혼 후 혼자 딸 셋을 키워 어렵사리 대학교육까지 공부시킨 엄마가 실망할게 뻔했다. 엄마랑 단둘이 떠난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지 중국에 가서 어렵사리. 결심을 꺼냈다. 엄마는 펑펑 우셨다. 삶의 갈래길에서.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길이 있고.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길이 있을 때 그래도 한 사람쯤은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가야 하지 않겠냐고. 나는 그 길을 가고 싶다고 했다. 엄마는 왜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그 한 사람이 하필 내 딸이어야 하냐며 편하게 살 길 바란다며 눈물을 흘리셨다.


하지만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가게 된 계기는 엉뚱하게도 첫사랑의 죽음이었다. 오토바이 사고였다. 단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내 세계가 무너졌다. 대학교 졸업을 한 학기 앞둔 1999년 5월이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학교를 자퇴해 속리산 어느 암자로 출가했다. 그곳에서도 오래 있지 못했다. 무작정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에서 터키까지 2년 간 아시아 여기저기 노매드가 되어 떠돌았다. “한국에 있으면 말라죽고 얼어 죽으니 일본으로 가라”는 예언자의 말에 홀려 3년 간 일본에 머물기도 했다. 아시아에서 머문 시간을 계기로 이주민을 위한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며 이주노동자와 이주여성의 삶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일본 유학생활을 거치면서 조금씩 나는 회복되었다. 귀국 후 남은 학기를 마저 채워 졸업했다. 다시 한국을 떠났다. 외교통상부 산하 국제협력단 한국 해외봉사단 KOICA로 카자흐스탄에 특수교사를 지원했다. 딸띠꼬르간과 까라블락 지역에서 장애유아를 위한 유치원과 고아원, 고려인 청년 문화원,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미술활동을 했다. 특히 카자흐스탄에서는 급류가 흐르는 카라탈 강에서 장애아동들이 위험하게 수영을 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아 장애 청소년들을 위한 수영장과 놀이터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카자흐스탄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30대 


30대는 결혼, 임신, 출산의 시기였다. 어쩔 수 없이 몸이 가정에 묶이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사회로” 나가려 무던히도 애썼다. 성공회대 엔지오대학원에도 진학했고, 지역아동센터, 생계형 기간제 교사 또는 비정규직 교육노동자,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특수학급에서 2년 남짓 일하기도 했다. 제주 강정마을에 평화의 공간을 짓기 위해 프로젝트를 준비해 책 2천 권과 천만 원을 펀딩 해서 제주 강정마을로 내려가. 구럼비 인근 중덕삼거리 캠핑카에서 다섯 살 아이와 한겨울을 살았다. 하지만 둘째 아이를 임신하는 바람에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아쉬움에 출산 후 내가 사는 망우동에 작은 홍차 가게를 열었다.   

 

40대 


마흔이 넘어 뜻하지 않게 셋째를 가졌다. 모든 게 끝난 것 같았다. 사회생활은 더 이상 어려울 것 같았다.  

“애 셋 잘 키우면 됐지. 더 이상 뭘 바라니. 네 인생은 실패했다. 언니 봐라. 애들 다 키워 놓고. 지금은 해외여행 다니지. 골프 치러 다니지. 너는 뭐하나 제대로 한 게 있니?”   

나는 교사가 되길 바랬던 엄마의 기대에 못 미친 딸이었다. 절망했다. 아이 셋을 데리고서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았다. 한국사회의 변혁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살고 있는 마을” 하나쯤은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셋째가 초등학교를 들어갈 무렵까지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을 위해 일하기로 했다. “마을오년”이라는 계획을 세웠다. 딱 그 정도면 아이들을 키우면서 돈을 받지 않고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살고 있는 중랑구 망우동에서 도시재생, 사회적 경제, 마을공동체 영역에서 마을활동을 했다. 홍차 가게에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공동육아 등에 관심이 있는 사람을 찾는다는 문구를 적어 사람들을 모았다. 2016년 <마을과아이들>이라는 마을교육공동체를 만들었다.  2016년 <꽃망우리협동조합>을 설립하여 마을식당 <느티나무그늘아래평상>, 2018년 마을활력소 <들락날락>, 2019년 주민공용시설 <꽃망우리마을학교>등 다섯 개의 공유공간을 주민들과 함께 만들었다. 마을장터와 마을축제도 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공동체의 기쁨을 함께 할 이웃들이 생겼다. 삶의 막다른 길목에서 마을을 만난 것이다.  


마흔여덟, 여전히, 상상 想像은 내 친구이자 놀이이며,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길을 가고 있으며, 친구들에 비하면 실패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완전 연소하는 삶을 살았으며 내 삶에 최선을 다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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