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그가
그날의 일이, 아직도 나에겐 생생하다. 유독 찌는 듯한 더위가 계속되던 1994년 7월 8일 점심께, 갑자기 길거리도, 관공서도, 학교도, 사람들의 수군거림으로 가득했다. 모두가 하나의 주제만을 이야기했다. 김일성이 죽었다고. 그리고 북한 사람들이 김일성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대성통곡을 하고 있다고. 불과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17일 남겨둔 시점이었어서 그의 죽음은 우리나라에서도 깜짝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연일 뉴스에서는 김일성 동상이나 기념비로 몰려가 이성을 잃고 슬퍼하는 북한 사람들의 모습을 비추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일부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의 사망을 받아들이지 못해 심장마비로 사망하거나 자진하기도 했다고 한다. 당최 그는 누구길래, 이렇게 여러 사람들을 집단적인 광신도로 만들었는가. 그리고 그는 누구길래, 전세계 독재자들의 우상이 되었는가.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이다. 아버지 김형직은 무면허 한의사로서, 만주에서 아편을 팔아 돈을 벌었다. 우습게도 김형직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여서 공산주의자에게는 물건도 내주지 않았는데, 이에 앙심을 품은 어느 공산주의자에 의해 암살된다. 불과 16세에 이렇게 아버지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려 김성주는 중학생 시절 레닌의 사상에 푹 빠졌으며, 조선공산청년회에 가입했다가 감옥에 투옥된다. 이로 인해 학교에서도 퇴학당하고 조선혁명군, 중국공산당 소속 동북항일연군을 전전하던 김성주의 인생은, 연군이 괴멸되면서 소련의 88 독립보병여단에 입단한 이후로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당시 만주 지역에 전설로 전해 내려오던 장군의 이름을 본따 스스로 김일성이라 개명한 그는, 러시아어를 금방 습득했으며 소련 장교들에게 순종했던 반면 부하들에게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여 금세 소련 여단의 1대대장까지 올라간다.
한국 전쟁 및 이후의 각종 실책,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 특유의 허세와 가식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북한의 최고 통치자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소련 군대 출신이었으며 스탈린과 그의 심복들에게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1945년 광복 당시 김일성은 일개 대대장일 뿐이었고, 지식 수준이나 명성에 있어 그보다 우위에 있던 공산주의자 활동가들은 박헌영, 조만식 등 여럿이었다. 그러나 38선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소련, 남쪽에는 미국이 진주했을 때부터 다른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을 당해내지 못했다. 전세계에 사회주의 사상을 퍼뜨리자는 목표 아래 공산주의 국가들은 전후 북한에 전폭적인 자금과 물자 지원을 퍼부어 북한의 경제 사정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김일성은 이를 자신의 업적으로 탈바꿈시켰으며, 계속적인 우상화 정책 및 반대파 숙청을 통해 마침내 종신 독재자로 등극한다. 그리고 반세기 가까이 절대권력과 최고급 저택, 최고급 음식, 여성 편력, 장수를 누렸고 죽은 후에도 무한한 숭배를 받았으며, 현재까지도 그의 후손이 권력을 세습하고 있다.
그간 루마니아, 시리아, 짐바브웨, 캄보디아 등 여러 나라의 독재자들이 김일성을 모방하여 유일체제를 확립하려 들었으나, 김일성만큼 성공적으로 지배력을 공고히 하고 천수를 누린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 유명한 스탈린도 마오쩌둥도 세습까지는 해내지 못했으니 말이다. 남한의 기록에 남은 김일성의 면모를 보면, 그는 결코 국가 최고 통치자에 오를 만한 인물이 아니었던 게 자명하다. 워낙 군인 시절부터 민가 수탈에 익숙했던 만큼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도 없었던데다, 전직 군인이었는데도 50일 만에 남침을 완료한다는 계획을 세워 단 한 톨의 식량 보급도 없이 진군만 감행했을 정도로 군사적 역량이 부족했다. 경제적 역량은 말할 것도 없어, 이미 평양을 제외한 지역에서 1960년대부터 서서히 식량 부족의 조짐이 보였는데도 국비가 생기면 대부분 중공업 발전이나 군비로 쏟아부었다. 김일성이 만든 조직화되고 부패한 관료주의, 경직된 집단농장 경영으로 인한 식량 생산 체계의 파괴, 어용화된 언론으로 인해 나라는 망가져 갔고 뒤를 이은 김정일이 ‘고난의 행군’ 등 더욱 어이없는 행보를 보이면서 끝내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김일성에게 하마터면 한반도 전체가 지배당할 뻔했다는 걸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북한의 남침에 정말 아무런 종류의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남한은 한국 전쟁 시작과 동시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수도 서울을 3일 만에 빼앗겼다. 어차피 남한엔 제대로 된 탱크나 전투기도 없었으므로, 북한군이 그대로 밀고 내려가면 한반도의 완전 정복도 가능할 상황이었다. 헌데 여기서 참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중앙청 앞에서 대규모 점령식과 퍼레이드를 벌이고, 이승만이 경무대에 남기고 간 미제 물건들을 챙기며 장장 3일 간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느라 전쟁의 골든타임을 날려버린 것이다. 서부 전선을 쉽사리 뚫은 인민군이 서울에 있던 3일 동안, 중동부전선의 인민군은 세간에 청성부대로 알려진 6사단의 치열한 저항에 막혀 강원도 남부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 ‘춘천-홍천 전투’로 인해 국군은 군을 재편하여 지연작전을 수행하고 낙동강 전선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전쟁 직전 붙잡은 무장공비를 통해 북한의 공격이 곧 시작될 거라는 정보를 얻었고, 화천과 양구에 북한의 보병부대와 수십 대의 차량이 집결되었다는 걸 알았기에 6사단에서는 이미 북한의 공격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인민군 2사단이 실제로 남침을 하자 6사단은 그들을 막는 데 총력을 기울였고, 소련제 도하 장비를 가지고 있던 2사단은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과 합류하지 못해 애초에 기획했던 북한의 합동 작전은 무산되고 말았다. 게다가 해당 6사단은 낙동강 전선을 지키기 위한 영천 전투에서도 인민군 8사단을 막아내어, 당시 김일성이 직접 ‘남조선의 사단 중 제대로 된 사단은 6사단밖에 없으니 그걸 깨부셔야 한다’고 언급할 정도였다고 한다. 6사단을 지휘했던 사단장 김종오는 훗날 백마고지 전투의 지휘를 맡아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을 막아내며 처절한 사투 끝에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남한은 38선 시절보다 강원도 쪽에 훨씬 많은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으며, 북한의 소유였던 연천, 철원, 화천, 양구 등의 지역은 남한의 소유가 되었다.
이 땅을 수복하기 위해 피 흘린 선조들에게 안타까움과 경외감을 표하며, 다음 목적지로 떠나본다. 산정호수에서 조금만 더 가면 화천 끄트머리에 위치한 조경철 천문대가 나타난다. 천문대에 서면 북녘 땅이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아스라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