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너머는 북녘
1969년 7월 20일, 인류는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첫 발자국을 내딛었다. 국영방송이었던 KBS는 당시 미국에 특파원을 보내지 못해 AFKN 방송을 받아 스튜디오에서 직역하여 내보냈는데, 그때 능숙한 영어로 방송을 동시통역하고 중계 장면을 해설한 이는 연세대학교 천문기상학과 교수였던 조경철이었다. 이 중계를 계기로 조경철은 ‘아폴로 박사’로 세간에 유명세를 얻게 된다. 그는 꽤 특이한 경력을 가졌는데, 평안북도 선천 출신으로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김일성종합대학 광산공학과에 진학했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독재화가 점점 심해지자 이에 조경철은 반대 성명서를 쓰고 옥살이를 한 후 단신으로 월남하여 연희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한다. 이후 한국 전쟁이 터지자 장교로 참전하였으며,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전두환, 노태우 등의 생도를 가르치기도 했고, 그 뒤에는 미국 유학을 떠나 미 항공우주국(NASA) 우주과학부 주임연구원을 지냈다.
화천의 조경철 천문대는 국내의 시민 천문대 가운데 가장 높은 곳(해발 1,010m)에 있고, 구경 1m에 달하는 큰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다. 고도가 높으므로 사방이 트였으며, 운무나 광해 및 강수량의 영향을 덜 받아 연간 관측 일수가 130일 이상이므로 밤하늘을 관측하는 데 최적인 곳으로 꼽힌다. 조경철 교수가 천문대 부지로 추천한 광덕산에서 북녘 땅이 바라다보인다는 건, 그 자신이 실향민이라는 사실과 겹쳐 애틋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또 다른 애틋한 사항을 덧붙이자면, 광덕산 뿐 아니라 DMZ 권역 대부분이 밤하늘 관측 명소라는 사실이다. DMZ 근방에는 군사 전략적으로도, 교통이나 제반 상황으로도 큰 도시나 공단이 들어서기 어려운 데다가 개발도 제한되어 있으니 자연히 인공 불빛이 없는 까닭이다. 역 운영이 중단된 후로 백마고지역이 서울 사는 천체관측 동호인들에게 각광받는 장소가 된 것 또한 동일한 이치이다. 온갖 오염물질과 매연, 눈을 찔러오는 강렬한 조명 등으로 별이 있는지조차 알기 힘든 서울에 있다가 화천이나 양구에 오면, 밤하늘은 정말 눈부시게 빛나는 존재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천문대에서 내려와 화천군청 쪽으로 오면 불과 2년 전인 2022년 운영을 시작한 백암산 케이블카를 탈 수 있다. 백암산 케이블카는 해발 1,178m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북단 및 최고 높이의 케이블카로서, 남한의 평화의 댐과 북한의 임남댐, 금강산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백암산은 한국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금성전투를 치른 전장으로, 민통선 이북에 있어 출입신청을 해야 케이블카를 이용할 수 있다. 우선 화천체육관에 버스 출발 20분 전 도착하여, 촬영 금지 등의 주의사항을 들은 후에야 비로소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가는 버스 탑승이 가능하다. 케이블카가 지나가는 곳은 군사지역이므로 사진 촬영을 할 수 없다. 화천체육관과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칠성전망대도 마찬가지로 군사지역 안에 있어, 허가된 장소가 아니면 사진 촬영이 불가하다. 전망대 안내소에서 신청서와 서약서를 작성한 뒤, 오전 10시 혹은 오후 2시인 방문 시각에 맞추어 인솔자와 함께 자동차로 전망대에 가야 한다. 여기는 칠성부대로 알려진 7사단의 관리 지역으로, 북한의 초소와 금성천이 전망대에서 보인다.
어린 자녀를 두고 있는 부모들에겐 조경철 천문대나 산천어축제로 화천이 기억에 남을는지 모르지만, 그리고 백암산 케이블카도 개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알고 있는 이들이 드물지만, 실은 어르신들에게 화천에서 가장 유명한 곳을 꼽으라 하면 단연 파로호다. 파로호 하면 화천이고, 화천 하면 파로호다. 1944년 일제는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의 북한강 협곡을 막아 수력 발전이 가능한 화천댐을 축조하였다. 화천댐의 축조로 생겨난 인공 호수를 당시엔 화천호, 화천저수지 혹은 대붕호라 불렀다 한다. 대붕은 전설 속 새의 이름으로, 호수 모양이 이 새를 닮았다는 거다. 해방 이후 38선이 그어졌을 때 화천은 북한의 땅이었고, 북한은 1948년 화천에서부터 내려가는 북한강 물길을 막아 남한의 전력 생산을 방해하여 하류의 청평 지역은 극심한 가뭄과 전력난에 시달렸다. 그러다 한국 전쟁이 터지고, 앞서 소개한 금성전투에서 국군이 승리함으로써 화천댐을 포함한 호수 전체가 남한에 수복되어 비로소 가뭄과 전력난까지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화천의 역사는 파로호안보전시관에 들르면 보다 세세하게 학습할 수 있다.
파로호(破虜湖)란 이름은 이승만 대통령이 지은 것으로,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란 뜻이며 1955년 11월 18일 기념비 제막식까지 거행했다. 전쟁 당시 여기에서 죽음을 맞이하여 수장된 군인들 가운데 중공군만 해도 약 2만 4천 명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시체를 방치하면 악취와 전염병 창궐의 우려가 있어 전쟁 당시 죽은 이들은 죄다 수장시켰고, 그런 탓에 대부분의 유해는 수습되지 못한 채 파로호 밑에 가라앉아 있다고 한다. 이에 남한에선 호수를 파로호라 부르지만 북한에서는 화천저수지라 부르며, 중국 정부에서는 주중대사에게 파로호 명칭을 변경해달라고 요구하는 등 걸핏하면 불편함을 표시하고 있다. 한때 이에 따라 예전 이름인 대붕호로 바꾸자는 움직임도 벌어졌다고 하나, 국민관광지로서 파로호가 워낙 화천의 상징처럼 유명하여 바꾸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파로호 유원지 선착장에서는 평화의 댐까지 24km를 운항하는 물빛누리호를 타볼 수 있는데, 피로 물들었을 역사의 기억이 무색하도록 시원한 풍광을 구경할 수 있다. 물빛누리호는 이용객이 10명 이상은 되어야 출발하며, 4~10월은 주말과 법정 공휴일에 하루 2회 운항한다. 물빛누리호는 85t급으로 인근 주민의 화물과 차량까지도 운송할 수 있으며, 이외에 40t급의 더 작지만 빠른 쾌속 유람선 평화누리호도 있다. 평화누리호의 경우 평화의 댐까지 1시간 안에 도착할 만큼 빠르다.
파로호는 동서로 길게 뻗어 있어, 시원한 호수 풍광을 옆에 두고 국도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보면 어느새 자동차는 화천을 지나 양구에 닿는다. 또 다른 DMZ 권역인 양구에서 다음 여정을 계속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