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민재 Jan 11. 2024

한국 독립 영화들 속 프레임

함께 서있는 풍경들, 혹은 함께 있지 못하는 자들을 담아내는 프레임

*다루고자 하는 영화들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영화에서 카메라 안에 담기는 피사체의 의미는 곧 피사체를 바라보는 창작자의 태도와 직결된다. 동시에 그 대상들이 영화 안에서 어떤 유기적인 네트워킹과 상호작용을 거치는지에 따라 대상에 적용되는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프레임 안에 어떤 것을 담아내는지는 영화에서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단순히 미장센의 문제를 넘어 프레임의 존재론에 대한 질문이자 영화의 시선, 그리고 영화라는 예술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이 된다. 종종 영화를 보다 보면 전혀 공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대상들이 한 프레임 안에서 함께 공존하는 순간들을 보게 된다. 그럴 때 영화는 비로소 신비로운 순간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나는 여기서 나에게 그런 순간을 선사해 준 한국 영화들을 살펴보며 무엇이 그 공존을 가능하게 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소우주들의 공존 혹은 간극 – 장우진의 사회학적 미학


장우진의 최근작 두 편은 모두 춘천에서 촬영되었다. <춘천, 춘천>과 <겨울밤에>. 잘 알려져 있다시피 춘천은 장우진의 고향이다. 분명 그 어떤 곳보다 잘 알고 있고 많이 경험했을 이 공간을 장우진의 카메라는 리얼리즘적으로 바라보는 대신 추상화하여 담아낸다. 형식주의로 점철된 그의 연출 방식은 춘천이라는 공간에 대한 사실주의적 탐구 대신 추상화된 공간 안에 담긴 인물들의 표상을 관찰하게끔 만든다. 대부분의 비평은 이러한 그의 연출을 본 후 자연스럽게 홍상수를 떠올렸다. 지역성을 상실시키는 미학. 그러나 홍상수와 장우진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홍상수의 공간 속 인물들은 개별성을 상실한 채 인간의 욕망을 표면화하기 위한 도구적 존재로 환원된다면 장우진의 공간 속 인물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개별적 존재로서 공간 안에서 활동한다. 그러니 그의 인물들이 추상화된 공간 속에서 활동할지라도 장우진은 인물을 추상화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지역성이 사라진 공간에는 무엇이 남는가? 근본적으로 지역성은 특정한 공간이 하나의 시간대 안에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물적 토대이다. 그 시간 안에는 해당 공간을 존재하도록 하는 정치경제적 조건과 역사적 단층, 사회적 네트워크가 내포되어 있다. 장우진은 그 모든 것을 무효화한다. 대신 단선적인 시간을 배제한 후 여러 개의 시간대가 뒤섞여 있는 듯한 풍경을 드러낸다. 어떤 시간? 존재자가 체감하는 시간. 하나의 절대적인 시간을 받아들이는 개별적 존재들의 상대적 시간(장우진은 자신에게 영화적 영감을 준 인물 중 한 명으로 칼 세이건을 뽑았다). 이때 존재자의 상대적 시간은 추상화되는 절대적인 시간과 달리 영화 안에서 명백히 유물론적이다. 존재자 안에 내재된 사회학적 위치, 지정학적 조건. 그 모든 것이 축적된 시간. 그 시간의 운동이 펼쳐지는 스크린. 이 지점에서 그의 영화는 명백하게 세대론적인 영화가 된다. <춘천, 춘천>과 <겨울밤에>는 공통적으로 젊은 세대의 커플과 중년 세대의 커플이 등장한다. 그들은 비록 같은 지역 안에 위치하고 있지만 그들 안에 내재된 시간의 무게와 의미는 전혀 다르다. <춘천, 춘천>에서 1부의 젊은 주인공인 지현과 2부의 중년 주인공인 흥주와 세랑은 같은 춘천에 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한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들이 경험하는 춘천은 각기 다른 공간인 것이다. 1부의 지현에서 춘천은 어떤 곳인가? 서울에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지현은 아직 원하는 일자리를 얻지 못하며 막막한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그는 춘천에서 자신의 친구들과 만나거나 전화를 하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 여기서 장우진은 지현이라는 인물 개인의 고통이 아닌 한국이라는 사회를 살아가는 같은 세대의 청년들의 초상을 그려낸다. 이때 춘천이라는 공간은 지역성이 사라진 추상적 공간인 동시에 세계로부터 떨어져 있는 영화적 공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분명 일상 바깥에서 비로소 일상의 표면을 관찰할 수 있도록 하는 홍상수 영화의 방법론과 유사하다. 흥주와 세랑이 등장하는 2부에서도 춘천은 중년이라는 세대가 마주하는 삶의 비애를 표면으로 드러낸다. 그렇기에 1부와 2부의 인물들은 서로 만날 수 없다. 더 정확히 서로는 서로의 챕터에 등장할 수 없다. 그들 각자가 느끼는 춘천이라는 공간, 춘천을 경유한 세계의 이미지는 같을 수 없다. 영화는 그 명확한 차이를 반복의 방법을 통해 다시 한번 정식화한다. 1부와 2부에는 반복되는 요소들이 등장한다. 사마귀와 소양강의 선박. 1부에서 지현은 길 위의 사마귀를 말없이 내려다본다. 반면 2부에서 흥주와 세랑은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사마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지만 정작 사마귀는 카메라에 담기지 않는다. 사마귀는 메타포가 아니다. 대신 영화는 같은 대상에 대해서 다른 태도를 취하는 인물들의 차이 자체를 담아낸다. 지현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대신 명확히 볼 수 있다. 그에게는 아직 명확하고 또렷하게 내다볼 수 있는 미래가 있고 삶이 있다. 흥주와 세랑은 사마귀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지만 정작 사마귀를 보지는 못한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말뿐이고 과거뿐이다. 그들의 언어는 자신들이 돌아가고 싶은 과거를 지향할 뿐 불확실한 미래로 향하지 못한다. 시선과 언어의 교차. 소양강의 선박은 1부와 2부에서 모두 2번 등장한다. 1부에서 지현은 갑판에서 문을 열어달라는 여자를 위해 안쪽에서 문을 열어준다. 그런데 두 번째로 배를 탔을 때는 갑판에서 자신이 문을 열고자 한다. 하지만 문이 열리지 않자 갑자기 배 위쪽을 보며 구조 요청 하듯이 두 손을 흔든다. 그리고 1부는 여기서 끝난다. 이 장면은 마치 영화 속에 있는 지현이 영화 바깥에 구조 요청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영화 바깥으로 나가고자 하는 몸짓. 그건 지현이 젊은 세대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 아직 다가오지 않은 자신의 미래를 향한 요청이기도 하다. 불확실함과 불안정함의 현재로부터 자신의 구원해 달라는 몸짓. 반면 흥주와 세랑은 어떠한가? 첫 번째 선박을 탔을 때 그들은 선박의 안과 밖을 자유롭게 드나든다. 그리고 두 번째 탑승 때는 배 위를 바라보는 대신 포말이 부서지는 배 뒤편을 지그시 쳐다본다. 그들은 바라볼 미래가 없다. 더 정확히는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고 개척할 의지를 펼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의무가 남아있다. 흥주와 세랑이 연결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이 세대의 인물들에게는 자신들이 벗을 수 없는 사회적 위치와 책무가 주어져 있다. 그런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포말처럼 부서지며 사라지는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지현이 영화 바깥에 구조 요청한 것과 달리 흥주와 세랑은 영화 마지막에서 영화 안으로 영영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흥주와 세랑이 들어간 공중화장실을 응시하는 카메라. 거기서 장우진은 엔딩 크레딧을 올리며 영화를 끝낸다. 그들에게 남은 서사가 없기 때문이다. 삶의 권태를 체화하는 인물들. 영화조차 그 권태를 인정하며 물러난다. 



<춘천, 춘천>이 만날 수 없는 인물들을 통해 각 세대의 상대적 시간을 드러낸다면 <겨울밤에>는 그러한 시간들이 한 프레임 안에서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춘천, 춘천>과 마찬가지로 <겨울밤에>에도 중년의 커플과 젊은 커플이 등장한다. 이때 젊은 커플은 중년 커플의 과거가 아닌 개별적인 존재들이다. 이 영화에서도 장우진은 각 세대가 느끼는 상대적 시간을 프레임 안에 구현한다. 하지만 전작과 달리 <겨울밤에>에서는 젠더라는 요소를 추가한다. 영화에서 가장 신비로운 한 장면. 얼어붙은 폭포 위에 젊은 남녀가 서있다. 남녀 사이에는 얼어붙지 않은 강이 그들을 갈라놓고 있다. 이를 사이에 두고 남녀가 대화를 하던 도중 여자가 움직이자 얼음이 깨질 것 같아 걱정하는 남자는 움직이지 말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자가 아랑곳하지 않고 움직이자 남자는 여자가 있는 쪽으로 넘어온다. 그러다 자신의 말에 아무 대답이 없는 여자를 보며 남자는 소리친다. “얘기를 안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아무도 아니야? 나는 너한테 아무도 아니냐고?”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침묵한다. 남자는 울면서 바닥에 엎드리고 여자는 그런 남자를 위로한다. 장우진은 이 장면을 한 번의 롱테이크로 찍었다. 그리고 두 남녀는 함께 얼음 위를 누우며 하늘을 바라본다. 남자는 지금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반대로 여자는 아무것도 아닌 그들의 관계를 긍정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 현재 현현하게 존재하고 있는 자신들의 실존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 도식은 영화에 등장하는 흥주와 은주 부부에게도 적용된다. 은주는 잃어버린 휴대폰을 찾기 위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흥주는 그런 은주가 못마땅하다. 휴대폰을 찾는 은주의 행동은 그녀가 관계로부터 지속적으로 일탈하게 만든다. 흥주는 그러한 견디지 못하기에 자신의 과거 연인이었던 해란의 환상까지 동원하여 관계성을 유지한다. 이때 이 관계에서 중심은 언제나 흥주에게 있다. 그는 오직 자신이 주인의 자리에 있는 관계만을 원한다. 하지만 은주는 더 이상 그러한 관계를 원치 않는다. 그 관계로부터 일탈이 있기에 그녀는 흥주와 달리 젊은 커플을 만날 수 있다. 그녀는 아무것도 아닌 상태를 긍정할 수 있다. 그건 그녀가 젊은 커플을 만났기에 배울 수 있던 것이다. 관계를 소유해야 안정될 수 있는 중년. 아무것도 아닌 관계를 긍정할 수 있는 청년. 이렇게 세대론으로 진행되던 영화는 마지막 순간 이 방법론을 멈춘다. 첫 장면과 유사하게 택시를 타고 가던 흥주와 은주. 그러다 갑자기 은주가 택시에서 내린다. 흥주가 따라 내리면서 이유를 묻지만 은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마치 젊은 커플처럼. 이 순간 이들을 묶어주던 세대의 프레임이 사라지고 젠더의 프레임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중년의 남성과 중년의 여성은 그렇게 갈라진다. 이들은 분명 한 프레임 안에 함께 서있지만 함께 있지 않다. 장우진은 세대라는 접근법에 젠더의 시선을 더하여 공존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인물들을 한 프레임 안에 담아내고 동시에 한 프레임 안에서 공존하지 않는 풍경을 담아냈다. 나는 이것이 곧 장우진의 사회학적 미학이라고 믿는다. 각자의 자리에서 체감하는 세계, 혹은 한국이라는 사회. 그것을 감각하도록 이끄는 카메라. 이 방법론이 더 다양화될수록 더 많은 신비로운 풍경들이 장우진의 카메라에 담길 것이다. 



연대로서의 공존 – 김대환의 프레임


김대환의 <철원기행>과 <초행>은 전혀 다른 방식의 영화처럼 보인다. <철원기행>은 대부분의 장면이 스테디 캠으로 촬영되었고 쇼트와 리버스 쇼트의 일반적인 편집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초행>은 거의 모든 장면이 핸드헬드 카메라에 롱테이크로 촬영되었다. 그렇기에 <철원기행>은 대부분의 장면들이 안정적인 반면 <초행>의 장면들은 핸드헬드의 불안정한 손떨림이 내내 지속된다. 이 차이는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가? <철원기행>은 철원에서 성근이라는 노년의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초행>은 서울에서 살고 있는 젊은 커플인 지영과 수현의 이야기이다. 두 가지 차이. 공간의 차이와 세대의 차이. <철원기행>의 철원은 노인들의 지역이고 <초행>의 서울은 청년들의 지역이다. 그리고 <철원기행>이 가족의 해체를 다룬 영화라면 <초행>은 가족의 탄생을 바라보는 영화이다. 시골의 노인과 도시의 청년. 선명한 지역성과 세대론. 언뜻 보면 이 단순한 도식이 영화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를 보다 보면 영화가 이 도식에서 벗어나 신비로워지는 순간들이 나타난다. 먼저 <철원기행>. 영화는 성근이 학교에서 정년 퇴임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뒤풀이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이혼을 선언한다. 이 장면만 보면 이 이혼이 성근과 여정 사이의 개인적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일 것이다(김대환은 의도적으로 이 두 인물의 성격을 대조시킨다). 하지만 이곳은 노인들의 공간인 철원이다. 이곳에서 이혼을 선언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성근은 가족 공동체에서 서열상 가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가 가장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곳이 철원이기 때문이다. 노인에게 권력을 주는 곳. 비록 그가 교사의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여기는 노인에게 힘을 주는 곳이다. 세대라는 권력. 지역이라는 메커니즘. 이 권력은 한 개인이 자신의 힘을 통해 성취한 것이 아닌 하나의 지역이 자신의 권력을 대물림하고 유지하는 방식이다. 그런 곳에서 성근은 스스로 가장의 자리와 권력을 포기한다. 이건 성근 스스로가 그 권력이 얼마나 추한 민낯을 하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김대환은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동문회 장면에서 이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러니 성근의 이혼 선언은 단순히 여정과의 결별이 아닌 철원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저항이다. 이 상황의 관점을 바꿔보자. 성근의 이혼은 성근에게는 자신의 자리를 포기하는 것이지만 가족들에게는 가족 공동체 자체의 해체를 선언하는 것이다. 선택의 의지가 향하는 곳과 결과가 향하는 곳 사이의 괴리. 성근 본인이 저항하고자 하는 철원이라는 공동체는 (흔들리지 않는 김대환의 카메라처럼) 성근의 부재에도 흔들리지 않지만 그와 가장 가까운 가족 공동체의 그의 선택 하나에 송두리째 흔들린다. 그러니 성근이 가족들에게 이혼의 이유를 말하지 않는 건 당연할 일일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부재. 흔들리는 공동체. 그럴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단순한 설명. 공동체가 흔들리는 순간 그 공동체의 미명 하에 유지되던 도덕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이는 곧 도덕 아래에서 억압당하던 개인의 욕망이 표출되기 시작한다는 의미이다. 이 욕망은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동시에 서로 공존하기도 한다. 김대환은 이 충돌과 공존의 순간을 담고자 한다. 영화에서 인물들은 각자 한 번씩 갈등을 겪는다. 그러나 김대환은 이 갈등을 해결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대신 그 갈등 속에서 인물들이 한 번씩 프레임 안에서 신비롭게 공존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한 가지 장면. 막내아들 수현이 나무에 눈을 던지면서 놀고 있다. 그러다가 전 장면에서 서로 싸웠던 큰아들 상욱이 함께 눈을 던지면 논다. 또 다른 장면. 늦은 밤 잠을 설치는 여정은 며느리인 혜정과 함께 길에서 담배를 피운다.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눈보라를 맞으며 함께 길을 걷는다. 이 장면에서 그전까지 까칠하고 냉소적이던 여정이 처음으로 웃는다. 마지막 장면. 동문회에서 나온 뒤 술에 취한 성근을 두 아들이 부축하며 집으로 돌아간다. 그 모습을 우연히 혜정과 여정이 지켜보게 된다. 두 여자는 이들에게 합류하는 대신 뒤에서 거리를 둔 채 조용히 따라간다. 카메라는 이들의 뒷모습을 풀샷으로 담아낸다. 이때 김대환은 세 개의 장면의 앞 혹은 뒤에 인물들이 갈등을 겪는 장면을 붙여놓는다. 수현과 상욱은 바로 직전에 말다툼을 했고 혜정과 여정이 함께 있는 장면 직후 여정과 성근이 싸우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리고 세 번째 장면 직전에 성근과 아들들은 동문회 사람들과 갈등을 겪은 뒤 빠져나온다. 여기서 두 계열의 장면들은 단순히 인물들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 두 명의 인물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어떤 인물들? 공동체 안의 인물들과 바깥의 인물들. 그 차이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인물들은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는 충돌하지만 공동체 바깥에서는 함께 공존한다. 세 장면을 이어주는 것은 겨울이라는 환경과 눈이라는 물성이다. 혹독한 계절. 차가운 세계. 그 앞에서 인물들은 가족이라는 이름 대신 세계 앞에선 실존으로써 함께 서있게 된다. 그때 비로소 인물 자신이 서있는 사회적 토대와 위치가 작동한다. 바로 직전까지 서로 싸웠던 두 형제도 나무에 눈을 던지며 천진난만하게 놀 때 한국이라는 사회를 살아가야만 하는 같은 세대의 남성으로서, 아버지의 우산을 벗어난 아들로서 같은 프레임에 있을 수 있게 된다. 전혀 다른 세대인 시어머니와 며느리도 눈보라 속에서 담배를 태우며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함께 서있는다. 그리고 아버지가 부조리한 권력의 세속을 거부할 때 이 가족은 단순한 가족을 넘어 세계를 새롭게 대면하고 동시에 함께 견뎌야만 하는 존재자들로서 걸어간다. 영화 안에서 그것은 일시적이나 영화가 끝난 뒤, 아버지가 완전히 가족을 떠난 뒤 그러한 삶이 앞으로 그들에게 다가올 것이다. 



두 번째 작품인 <초행>은 마치 그러한 <철원기행> 이후 인물들의 삶에 대한 영화처럼 보인다. 아버지의 저항에도 굳건히 그들은 바라보던 스테디 캠의 카메라는 이제 작은 손떨림에도 흔들리는 핸드헬드의 카메라도 바뀐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여기는 청년들의 도시인 서울이다. 모든 것이 불안정한 도시. 불안정한 삶. <철원기행>의 가족과 달리 <초행>의 지영과 수현은 불완전한, 아직 미숙한 가족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걸어갈 길을 먼저 걸어간 부모 세대를 찾아가 답을 얻고자 한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답을 얻지 못하고 돌아온다. <철원기행>의 성근처럼 그들은 자신의 부모 세대의 부조리를 직면하고 이로부터 저항한다. 흥미로운 점은 지영과 수현 모두 자신의 부모에게서 저항감은 느끼는 반면 상대의 부모와는 연대감을 느낀다. 지영의 부모와 만났을 때 지영은 결혼을 강요하는 어머니와 갈등을 빚지만 수현은 그녀의 아버지와 어떤 동질감을 느낀다.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며 대화를 나누는 두 남자. 세대도, 경제적 위치도 다른 두 사람을 이어주고 있는 것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 그들이 차지해야 하는 가장이라는 자리이다. 가장의 책임감. 가장으로서의 불안. 이건 삼척에서 지영이 수현의 부모와 만났을 때 역시 마찬가지이다. 술잔을 나누는 수현의 어머니와 지영. 그들을 이어주는 아내라는 자리.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중간에 중단되고 잠시 연대하던 그들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세대라는 간극. 결국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은 같은 세대를 살고 있는 지영과 수현이다. 그들은 언제 진정으로 프레임 안에 함께 서있는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 차를 타고 가던 중 촛불 시위로 인해 길이 막히자 지영과 수현은 차에서 내려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광화문 광장을 함께 걷는다. 처음에는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걷던 그들도 어느새 방향을 바꿔 시위 행렬에 자연스럽게 합류한다. 서울 한복판. 모든 것이 불안정한 도시에서 함께 걷는 불안정한 삶의 존재들. 그들은 과거로부터 아무런 답을 얻지 못했지만 함께 나아간다. 불완전하지만 아름다운 행렬. 김대환은 한국이라는 사회 앞에서 초행길을 걷는 청년 세대의 모습을 프레임에 담아내면서 영화를 끝낸다. (장우진의 영화가 건네는 위로처럼)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기에. 



타자와의 공존 – 김덕중 영화 속 언어와 육체


김덕중의 두 편의 영화 <에듀케이션>과 <컨버세이션>은 곧 대화의 영화이다. 하지만 이 대화는 소통의 창구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영화에서 대화는 인물들 사이에서 미끄러지고 빗나가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대화와 소통 사이의 간극. 그건 화자의 언어가 청자를 향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을 향하기 때문이다. 화자와 청자 사이의 간극. 그 간극은 곧 화자와 청자가 각각 위치해 있는 사회적 위치와 토대의 간극에서 온다. 그럴 때 화자와 청자는 서로를 서로에 대한 타자로서 마주한다. 김덕중은 이 문제를 단순히 계급이나 세대, 젠더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고 사회 안의 개별적 주체들의 문제로서 질문한다. 범주가 아닌 관계의 문제. 끊임없이 엇나가고 미끄러지는 언어를 어떻게 소통의 매개체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인가? 김덕중은 두 편의 영화에서 이 질문을 밀고 나아간다. <에듀케이션>은 그런 의미에서 교육 영화이다. 어떤 교육? 타자와 마주하기 위한 교육. 영화 속에서 사회복지사 성희는 현목과 시시각각 갈등을 빚는다. 성희는 장애인 활동 보조라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만 현목은 매번 그 이상의 역할을 요구한다. 근본적으로 이 갈등은 서로에 대한 일말의 이해와 공감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현목에게 사회복지사는 단순한 장애인 활동 보조를 넘어 가정부이고 파출부이다. 그는 사회복지사라는 자리를 전혀 이해할 생각이 없다. 타자에 대한 무지. 성희 역시 현목이 처한 처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병든 어머니와 집을 돌보기에는 아직 어린 학생이다. 그럼에도 성희는 그 이상으로 현목과 그의 어머니를 도울 생각이 없다. 이해와 공감의 부재는 인물 간의 대화를 미끄러지게 하는 장벽이다. 그리고 이 장벽을 뛰어넘는 것은 언어가 아닌 몸짓이다. 성희와 현목이 가까워지는 순간. 현목이 성희를 도와 어머니를 돌보고 성희가 현목의 학업을 도와줄 때. 그 순간 성희와 현목은 서로의 언어 안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한 한계를 지닌 방법이다. 인물들은 일시적으로 서로의 언어 안에서 규정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상대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의 한 장면. 함께 소풍을 다녀온 후 계단을 오르는 성희와 현목. 어머니를 업고 계단을 오르던 중 현목은 어머니를 떨어뜨리고 어머니의 얼굴에는 상처가 생긴다. 하지만 현목은 상황의 심각성을 축소하기에 바쁘다. 이 행위는 단순히 자신의 실수를 축소하는 것을 넘어 성희가 행하는 역할의 의미를 축소하는 것이다. 성희가 119에 도움을 청하자 현목이 하는 말. “왜 이렇게 착한 척해요 갑자기? 이거 진짜 모습 아니잖아요.” 그에게 있어 사회복지사가 하는 일은 그저 착한 척에 불과하다(물론 성희 역시 사회복지사를 본인의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여전히 타자를 이해할 생각이 없는 현목. 자신의 학업을 도와준 성희는 가깝게 여기지만 사회복지사 성희에 대해서는 끝까지 무지하다. 이 말은 들은 성희는 곧 현목을 떠난다. 여기서 끝났다면 <에듀케이션>은 교육 영화로서 실패한 것이다. 성희도, 현목도, 관객인 우리도 교육받은 것이 없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성희와 현목은 다시 재회한다. 현목의 어머니는 자리에 누워있다. 그 후 집으로 들어온 현목이 성희에게 말한다. “너무 힘들었어요.” 그제서야 현목은 성희가 하는 일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뒤 성희는 갑자기 현목을 때리기 시작한다. 당황한 현목이 저항하고 두 인물이 서로 싸우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난다. 혹시 이것은 자신에게 무지했던 현목에 대한 성희의 복수인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에듀케이션>은 현목을 위한 교육 영화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해석을 하고 싶다. 현목이 성희라는 타자를 비로소 이해했을 때 두 인물은 함께 공존할 수 있다. 이때 두 인물은 서로에 대한 타자로 존재하기에 끊임없이 다투고 갈등하는 상황을 반복해야 한다. 김덕중은 그 갈등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다. 타자와의 공존. 끝없는 갈등. 그럼에도 함께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 그것이 김덕중이 성희와 현목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육이다. 



<컨버세이션>은 그러한 주제의식을 좀 더 형식적인 측면으로 전달한다. 제목에서 잘 드러나듯이 영화는 내내 대화로만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화의 내용이 아닌 대화를 담아내는 방법론에 있다. <컨버세이션>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리만큼 영화가 폐쇄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하나의 신은 대부분 원 테이크로 촬영된 원 신, 원 쇼트의 방식으로 연출되었고 신과 신 사이에는 어떠한 연결점도 없다. 신은 영화 안으로 흡수되지 않고 그저 신 자체적으로 끝난다. 그렇기에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은영과 승진의 만남은 영화적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만남이 아닌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보이던 두 개의 세계가 하나로 만나 통합되는 것만 같다. 은영의 세계와 승진의 세계. 여성들의 세계와 남성들의 세계. 그들의 언어는 그들의 세계 안에서는 아무런 막힘없이 통용되지만 서로의 세계에서는 계속 빗나가고 겉돈다. 영화의 초반부. 프랑스에서의 회상 장면에서 은영이 울고 있는 명숙을 위로하던 도중 한 프랑스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건다. 남자는 그녀들과 대화를 하고자 하지만 은영과 명숙을 냉정하게 그를 내쫓는다. 여기는 여자들의 세계이다. 그 세계에서는 남자를 위한 자리가 없다. 혹은 필요하지 않다. 그건 승진이 속한 남성들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각자의 세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느낀다. 그렇게 완결적으로 보였던 세계의 두 인물이 갑자기 만나게 된다. 그것은 두 인물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두 인물이 마주했을 때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고자 하는 김덕중의 형식적 실험처럼 보인다. 타자로서 마주하는 인물들. 각자의 세계 안에서는 잘 통하던 그들의 언어도 서로 다른 세계 앞에서는 미끄러진다. 그들은 프레임 안에서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마지막 세 장면을 살펴보자. 첫 번째 장면. 해진이라는 여성과 상담하는 은영. 두 명의 여성. 여성들의 세계가 구축되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두 인물은 쉽게 소통하지 못한다. 사실상 두 인물을 이어주는 교집합은 여성이라는 점이 유일하다. 앞서 은영이 명숙과 다혜와는 소통이 가능했던 것은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넘어 프랑스에서의 경험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건 뒤집어 얘기하면 세 인물들은 이어주는 그 경험조차 배제되는 순간 세 여성들도 서로 간의 타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두 번째 장면. 기차를 타고 있는 승진이 필재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의 내용은 자신과 필재 사이의 관계가 위선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다. 누군가 잘못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승진은 그저 그들 사이에 메울 수 없는 타자성이라는 간극을 깨달은 것이다. 상대를 위해 위선적으로 행동해야만 했던 과거. 그 순간 평화롭게 보였던 두 세계의 위선이 드러나고 친밀해 보였던 두 세계 속 인물들 사이의 간극 역시 표면 위로 나타난다. 그리고 세 번째 장면. 함께 등산을 온 뒤 이야기를 나누는 은영과 승진. 대화 도중 은영이 이런 얘기를 꺼낸다.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는 다 보여.” 그 말을 들은 승진이 자신의 생각을 맞춰보라고 하자 은영은 말을 해야 안다며 뭐든지 말해보라고 시킨다. 그러자 승진이 하는 말. “내가 너 사랑한다.” 그 순간 은영이 화를 내며 자리를 떠난다. 그때 승진이 그 뒤를 따라가고 카메라 역시 처음으로 움직인다. 승진이 이유를 묻자 은영이 말한다. “내가 장난치지 말랬지?” 무슨 장난? 감정적인 장난. 그리고 언어적인 장난. 승진은 은영과 자신 사이의 간극을 통해 장난을 치는 것이다. 다르게 얘기하면 상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간극. 은영은 그러한 간극을 견디지 못한다. 그녀는 오히려 단순한 관계를 더 선호한다. 상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관계. 하지만 그녀도 곧 인정한다. “나 진짜 너 모르겠어. 모르니까 막 미치겠어.” 그제서야 그녀도 승진과 자신 사이의 간극을 인정한다. 그런 그녀에게 승진이 다가와 신발끈을 묶어준다. 거기서 승진이 다시 한번 그녀에게 장난친다. “너 신발도 정말 끝내준다.” 그러자 은영이 짜증을 내며 그에게 발길질을 한다. 승진은 그녀 때문에 눈에 뭔가 들어갔다고 말한다. 은영은 승진의 눈을 확인하며 아무것도 없다고 하고 승진은 여전히 뭔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김덕중은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불확실성을 남기며 영화를 마무리한다. <에듀케이션>과 마찬가지로 <컨버세이션>도 몸의 대화로 마무리된다. 타자와의 공존. 그것은 언어의 대화를 넘어 몸의 대화의 연속이다. 그 안에서 끊임없이 부딪힐지 언정 미끄러지지 않고 함께 서있는 것. 진정한 의미에서의 ‘컨버세이션’. 그것이야말로 김덕중의 ‘에듀케이션’ 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밀의 언덕 리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