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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Aug 08. 2023

카우보이의 노래 리뷰

신화 없는 서부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 조엘 코엔의 최근작 두 편은 모두 OTT 플랫폼을 통해 공개되었다.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카우보이의 노래>, 애플 tv에서 제작한 <맥베스의 비극>(나는 의도적으로 코엔 형제가 아닌 조엘 코엔이라고 말했다. <맥베스의 비극>은 이선 코엔이 참여하지 않고 조엘 코엔이 단독으로 연출했다). 두 작품은 분명 완전히 다른 영화이지만 이상하게 두 영화 사이에서는 어떤 기시감이 느껴진다. 단순히 OTT라는 관람 환경만의 문제는 아니다. 영화는 철저하게 자본의 예술이다. 플랫폼이 바뀌고, 영화의 상영 환경이 바뀔 때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 그 안에서 적응할 것인가의 문제와 마주하게 되어있다. 그것은 산업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변화된 산업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미학의 문제가 되기도 할 것이다. 많은 영화감독들이 최근 넷플릭스 등의 OTT 플랫폼에서 영화가 아닌 시리즈를 연출하는 경우가 늘어난 것도 그러한 움직임의 일환처럼 보인다. 자본 안에서의 적응이라는 문제. 화폐의 미학. 

그렇다면 조엘 코엔(과 이선 코엔)은 변화된 환경 안에서 어떤 미학적 변화를 보였는가? <카우보이의 노래>는 옴니버스 영화이다. 그것은 단순히 형식의 변화가 아니다. 옴니버스 영화의 특징. 짧은 이야기들의 연쇄. 그럴 때 영화는 하나의 단일한 내러티브가 아닌 단편적이고 파편화된 내러티브만으로 견뎌내야 한다.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내러티브의 통일성을 포기한다는 것은 영화에서 리듬의 구성을 다르게 가져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기 위한 리듬. 게다가 코엔 형제는 영화에서 다른 무엇보다 드라마와 그 드라마의 리듬을 중요시하는 감독이다. 쇼트의 리듬. 신과 시퀀스의 리듬. 그들이 보기에 OTT라는 플랫폼은 자신들이 그동안 보여줘 왔던 서사의 리듬을 구성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극장과 OTT의 차이. 극장에 앉은 순간 관객은 온전히 영화에 의존하고 몰입해야 한다. 영화만이 전부인 공간. 우리는 영화를 멈출 수도, 되돌아갈 수도 없다. 

하지만 OTT에서 관객은 어떠한가? 관객은 영화를 보다가 자의적으로 영화를 멈출 수도 있고, 놓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되돌아갈 수도 있다. 말하자면 시간의 주권이라는 권력의 문제. 그 권력관계의 이동. 또 다른 차이. 극장 안에서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그 극장은 그 영화만을 상영해야 한다. 하지만 OTT에서 영화 한 편은 그저 그 플랫폼 안에 소속되어 있는 여러 편의 영화들 중 하나일 뿐이다. 영화들의 집합체. 이야기들의 집합체. 그 집합체의 일부로서의 지위(나는 이 변화를 퇴행이나 전락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영화 자체를 소비하는 것을 넘어 영화를 보여주는 OTT라는 플랫폼 자체를 소비하게 된다. 다시 말해 관객은 이 영화를 보던 중 다른 영화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 말은 곧 영화 한 편에 대한 관람을 거부한다고 해도 이전과 달리 어떠한 경제적 손실도 생기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더 이상 관객들은 2시간짜리 이야기에 온전히 몰입할 필요가 없다. 영화가 재미없다고 느껴지는 순간 영화를 멈출 수 있는 힘이 주어졌다(물론 이러한 변화를 반대로 이용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마틴 스콜세지의 <아이리시맨>). 

코엔 형제는 마치 그 변화를 인지한 듯이 자신들의 첫 OTT 영화를 옴니버스로 만들었다. 단편들의 집합체. 거기다 이 단편들은 서로 어떠한 서사적 연관성도 지니지 않았다. 6개의 단편들 중 일부만 본다고 해도 단지 몇 개의 이야기를 더 보았는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움직임. 코엔 형제는 하나의 긴 서사를 내세우는 대신 단편적인 서사를 연결함으로써 이야기가 관객의 머릿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연장하였다. 거기다 단편들 사이에서 영화를 멈춘다고 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도록 영화를 만들었다. 이야기를 살리기 위한 사투. 새로운 환경 안에서 이야기가 살아남는 법. 

조엘 코엔은 이후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애플 tv에서 공개된 <맥베스의 비극>.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 <맥베스의 비극>은 서사에 대한 설명이 불필요한 영화이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그대로 가져온 서사. 그러니 <맥베스의 비극>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영화의 서사를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럴 때 영화는 무엇으로 버틸 것인가? 조엘 코엔의 선택. <맥베스의 비극>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영화의 미장센에 압도되었을 것이다. 흑백의 선명한 대조. 마치 연극 세트를 보는 것만 같은 인공적 화면. <맥베스의 비극>은 서사가 아닌 미장센 그 자체로 움직이는 영화이다. 그럴 때 영화의 서사가 미장센을 구축하는 것이 아닌 반대로 서사가 미장센에 업혀가는 것처럼 보인다. 구조의 전복. OTT에 적응하는 또 다른 방법. 조엘 코엔은 이야기가 살아남기 어려워진 시대에 이야기 자체가 아닌 미장센에 모든 힘을 쏟아부으며 영화를 관객 앞에 존재하도록 했다. 이야기 대신 화면 그 자체를 봐달라는 호소.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맥베스의 비극>은 성공한 영화이다. 다만 이러한 방법론이 앞으로도 그들의 필모그래피에서 이어질 것인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2. <카우보이의 노래>(영어 원제는 <The Ballad of Buster Scruggs>)는 서부극이다. 제목부터 샘 페킨파의 <케이블 호그의 발라드>(The Ballad of Cable Hogue>)를 연상시키는 이 영화는 여섯 개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책을 펼치며 시작한다. 책의 제목 밑에는 영화의 부제가 적혀 있다. “카우보이의 노래, 그리고 그 외 미국 개척자 이야기.”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 부제는 무언가 영화와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영화 속 이야기 어디에도 서부의 개척자라고 단정 지을 만한 인물은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은 존 웨인처럼 용맹하게 인디언과 싸우지도 않고 제임스 스튜어트처럼 문명의 법과 질서를 서부로 가져오지도 않는다. 오히려 여섯 개의 에피소드를 이어주는 교집합은 죽음이다. 이 죽음은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뿐만이 아니라 상징적 죽음까지 포함하고 있다. 무슨 의미인가? 영화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들은 죽음과 동시에 서부라는 세계로부터 가차 없이 버림받는다. 그들을 위한 어떠한 애도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세계에서 사라지는 즉시 다른 인물로 대체되거나 그들을 따라가던 이야기가 끝나며 영화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만약 영화가 진정으로 미국 개척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다면 그들의 죽음 이후에도 남아있는 이야기를 담아내면서 애도받지 못한 유령들을 찍고자 했을 것이다. 그것이 영화가 영웅을 기억하는 태도이자 유령을 담아내는 방법이다. 

하지만 코엔 형제는 이야기의 주인이 사라지자 망설임 없이 이야기를 끝낸다. 나는 이 여섯 개의 이야기가 위대한 미국 개척자의 이야기가 아닌 서부 개척의 역사 안에서 버림받은 자들의 이야기라고 부르고 싶다. 애도받지 못하는 자들. 그들이 세계에서 사라지자 그들을 세계 안에서 기억하기 위한 이야기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이것은 실패한 이야기들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되지 못한 이야기. 세계가 기억하지 않는 자들의 이야기. 신화가 되지 못한 서사. <카우보이의 노래>가 옴니버스 영화인 것인 OTT라는 산업적인 측면 이외에도 이러한 실패한 서사들을 담아내기 위한 미학적 선택 역시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서사를 실패하도록 하는가? 달리 말하면 영화 속 인물들은 왜 애도를 받지 못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그들이 있는 곳이 서부이기 때문이다. 서부라는 세계. 아직 문명이 완전히 도달하지 않은 세계. 첫 에피소드에서 버스터 스크럭스는 서부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한다. “지역 간 거리가 멀고 경치가 단조로운 곳이죠.” 이 단조로운 세계에서는 시간이 곧 역사가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죽음은 사건이 되지 않고 시간 속에서 묻힌다. 애도의 외면. 이곳에서 죽음은 특정한 사건이 아닌 일상 그 자체이다. 이건 무슨 의미인가? 영화에서 따라가야 할 사건이 없음에도 카메라가 그곳에 있다는 것은 곧 카메라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사건이 된다는 의미이다. 일상을 사건으로 만드는 카메라의 응시. 물론 이 존재론은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것이기는 하나 코엔 형제는 여기서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대신 서부라는 세계 안에서 일상화된 죽음을 바라보면서 서부의 존재론에 대해서 질문하고자 한다. 그럴 때 카메라는 단순히 인물이나 서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 세계 자체에 대한 관찰자가 된다. 죽음이 일상이 된 세계에 대한 관찰. 한 마디로 <카우보이의 노래>는 서부를 찍은 영화이다. 서부 안에서의 서사가 아닌 서부라는 세계 자체에 대한 영화. 

돌이켜보면 코엔 형제는 언제나 인물이 아닌 인물 앞에 놓여있는 세계를 찍어왔다. 인물을 압도하는 세계. 그 세계 안에서 발버둥 치는 인물의 우습고도 공허한 초상. 그러한 측면에서 <카우보이의 노래>가 옴니버스 영화인 것은 서부 안에서 실패한 서사들을 최대한 많이 담아내면서 서부의 총체성에 다가가고자 하는 노력처럼 보인다. 이것은 미학의 문제가 아닌 태도의 문제이다. 세계에 다가서는 방법. 나는 지금까지 <카우보이의 노래>가 옴니버스 영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각각 산업적, 미학적, 그리고 태도의 차원에서 설명하고 나열했다. 이제부터는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이러한 메커니즘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3. 버스터 스크럭스는 제목처럼 노래하며 등장한다. 첫 쇼트에서 카메라는 익스트림 롱쇼트로 까마득히 멀리서 말을 타고 다가오는 버스터 스크럭스를 바라본다. 그다음 쇼트부터 카메라는 노래하는 버스터 스크럭스를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담아낸다. 풍광 안의 버스터 스크럭스를 롱쇼트로 찍다가 연주하는 그의 손을 클로즈업으로 찍기도 하고 심지어 기타 안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여기서 카메라의 움직임은 단순히 역동적인 것을 넘어 카메라 자체가 한 명의 인물처럼 느껴진다. 서부 안으로 들어온 카메라. 그걸 알기라도 하듯이 노래를 마친 버스터 스크럭스는 갑자기 카메라에 말을 걸기 시작한다. 코엔 형제는 이러한 연출을 통해 버스터 스크럭스가 속해 있는 세계가 영화 속 세계임을 관객들에게 강조한다. 왜 그래야 하는가? 다시 한번 환기하자면 여기는 서부이다. 서부극에서 서부는 특정한 지역이 아닌 미국 역사의 축소판이자 미국적 가치관이 내재한 관념적 세계이다. 영화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세계. 여기에서는 어떠한 유물론적 토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카메라는 어떤 세계에서보다도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감독이 창조한 세계를 담아낼 수 있다. 버스터 스크럭스 역시 그 세계가 영화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세계이고 자신이 그 안에 속한다는 것을 알기에 카메라의 존재를 알 수 있다. 그럴 때 카메라는 버스터 스크럭스의 동행자이자 전지적인 위치에서 내려와 세계 내에 던져진 존재자로 보인다. 신적인 지위를 내려놓는 카메라. 이때의 카메라는 코엔 형제의 시점이 아닌 완벽한 관객의 시점이다. 우리는 신의 자리에서 세계를 완벽하게 알 수 없다. 그저 버스터 스크럭스의 여정을 따라가며 세계를 파악해야만 한다. 관찰자로서의 카메라. 세계를 관찰한다는 사건. 버스터 스크럭스가 첫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한 것은 우리를 서부의 세계로 안내할 가이드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버스터 스크럭스는 어떤 인물인가? 영화 속에서 그는 노래와 총질에 능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샌사바의 노래하는 새’이면서 ‘리아타패스의 쥐새끼’이자 ‘서부 텍사스의 새대가리’, 그리고 (본인은 싫어하지만)’인간혐오자’라고도 알려진 이 인물은 서부를 그대로 체화한 인물이다. 서부를 체화했다는 것은 서부를 지배하는 규칙과 논리를 체화했다는 의미이다. 서부의 규칙은 무엇인가? 첫 장면에서 버스터 스크럭스가 부르는 노래는 물을 찾아 돌아다닌다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그는 지금 생존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생존이라는 규칙.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모든 행위가 용인되는 세계. 다시 한번 말하자면 여기는 아직 문명이 도착하지 않은 세계이다. 그러니 사람을 죽여도 살인이 되지 않고 죽은 이를 위한 어떠한 애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서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총질은 모든 인물들에게 필수적이다. 먼저 살인을 해야 죽지 않는 곳. 살인이 죄가 되지 않는 곳. 

버스터 스크럭스는 에피소드의 두 번째 신에서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위스키를  마시기 위해 술집으로 들어간 버스터 스크럭스. 그 안에서 그는 낯선 자이다. 버스트 스크럭스는 주인에게 술을 요구하지만 그는 버스터 스크럭스가 무법자가 아니라며 거절한다. 그리고 옆에 있던 한 남자가 거들면서 말한다. “자네는 무법자가 아니야. 우리는 허풍쟁이와 술 안 마셔.” 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무법자가 어떤 의미인지 파고드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요점은 버스터 스크럭스라는 낯선 타자가 그들의 세계로 처음 들어왔을 때 환대받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이 무법자들은 그를 자신들의 세계에 받아줄 의향이 없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작은 술집은 그들만을 위한 폐쇄적인 세계처럼 보인다. 하지만 버스터 스크럭스 역시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 환대받을 생각이 없다. 자신을 허풍쟁이라 부르는 남자에게 버스터 스크럭스는 거침없이 도발한다. 그러자 남자가 일어나 총대에 있는 총을 보여주며 위협한다. “총질할 줄 아나?” 그 순간 버스터 스크럭스가 순식간에 총을 쏘며 남자를 죽인다. 이윽고 남자와 함께 있던 무리들과 술집 주인 역시 화려한 사격 실력을 뽐내며 죽이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버스터 스크럭스는 완전히 폐쇄되어 있던 무법자들의 세계를 완벽히 장악한다. 이건 단순히 버스터 스크럭스가 더 뛰어난 사격 능력을 지녔기 때문만은 아니다. 버스터 스크럭스의 승리는 마치 폐쇄되어 있던 작은 세계를 더 거대한 세계가 정복한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어떤 세계? 버스터 스크럭스가 체화한 세계. 다시 말해 서부의 세계. 무법자들의 작고 폐쇄적인 세계는 더 거대한 세계를 체화하고 등에 업은 버스터 스크럭스에 의해서 정복되고 파괴된다. 무법자들의 무리 중 버스터 스크럭스가 급소를 맞히지 못해 숨이 끊어지지 않은 한 인물이 힘겹게 바닥을 기어가자 버스터 스크럭스가 그를 위해 문을 열어준다. 이건 마치 폐쇄된 세계에 갇혀 있던 인물에게 자신의 세계의 논리를 가르쳐주고 더 거대한 자신의 세계를 향하여 인물을 개방시켜 준 것만 같이 보인다. 서부의 논리. 반복해서 말하자면 생존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 바꿔 말하자면 죽음으로 가득 찬 세계. 죽음을 거부하던 이들에게 죽음을 선물하는 것만 같은 버스터 스크럭스. 그렇게 그는 자신이 파괴하고 정복한 세계를 뒤로 하고 다시 떠난다. 

그렇다면 노래는 왜 필요한가? 물론 버스터 스크럭스라면 노래가 자신과 자신의 말 댄의 마음을 달래준다고 말할 것이나 그건 우리에게는 충분하지 않은 설명이다. 첫 에피소드에서 노래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버스터 스크럭스가 술집을 떠난 뒤 도착한 프랑스인의 협곡 장면을 살펴보자. 무기를 반납하고 들어간 술집에서 버스터 스크럭스는 한 포커 게임에 참여한다. 이 게임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전 사람이 버린 패로 참여해야만 한다. 패를 본 뒤 그다지 좋은 패가 아닌 것을 확인한 버스터 스크럭스는 게임에서 빠지려고 하지만 또 다른 참가자인 조가 말한다. “보았으니 놀아야지(You seen’em, you play’em).” 버스터 스크럭스가 거부하자 조는 총을 겨누면서 그를 위협한다. 이 순간 가게 안의 음악이 멈추고 정적이 흐른다. 이 가게 안에서는 무기 소지가 불법이다. 그런데도 조는 총을 소지하면서 버스터 스크럭스를 위협하고 있다. 가게의 규칙과 논리를 거부하는 조. 그러면서 그는 버스터 스크럭스를 자신의 논리와 규칙 하에 복종시키려고 하고 있다. 마치 버스터 스크럭스가 폐쇄되어 있던 술집을 자신의 세계의 논리와 규칙의 이름으로 정복한 것처럼. 이제 상황이 뒤바뀌었다. 버스터 스크럭스가 가게의 규칙을 따라 총을 맡긴 것과 달리 조는 버스터 스크럭스가 체화한 서부의 논리를 등에 업고 그를 위협한다. 버스터 스크럭스는 조에게 가게의 방침을 따를 것을 제안하지만 조는 거부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쇼트. 아마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기억하고 있을 쇼트. 버스터 스크럭스가 탁자를 밟아 판자를 들어 올려 조의 팔을 치자 그의 손에 있던 총이 그의 얼굴을 쏘게 된다. 이걸 두고 현실적인지를 논하는 것은 요점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 쇼트는 인물들을 정면에서 찍던 이전의 쇼트들과 달리 조와 버스터 스크럭스를 옆에서 롱쇼트로 찍었다. 마치 카메라가 잠시 빠져나온 것만 같은 구도. 이때의 카메라는 인물을 찍는 대신 행위를 찍는 것처럼 보인다. 버스터 스크럭스의 퍼포먼스.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우리를 사로잡는 퍼포먼스. 조가 죽은 뒤 버스터 스크럭스는 조의 죽음을 조롱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정적이 흐르던 가게 안은 다시 활기를 되찾는다. 

이 지점에서는 이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왜 조가 내세우던 서부의 논리는 버스터 스크럭스와 달리 실패했는가? 여기서 그가 가게의 규칙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요점을 놓친 것이다. 서부의 논리와 규칙은 작은 술집의 규칙 정도는 얼마든지 압도할 수 있다. 그럼에도 조의 행위가 실패한 것은 버스터 스크럭스가 그보다도 더 거대한 논리와 규칙으로서 그를 압도했다는 의미이다. 그건 어떤 논리인가? 영화의 논리. 영화의 규칙. 앞서 말했다시피 서부라는 세계는 영화 속에서의 관념적 세계이다. 버스터 스크럭스는 단순히 서부를 체화한 것을 넘어 카메라의 존재를 의식할 정도로 서부가 영화 속 세계라는 것까지 체화한 인물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서부보다도 더 거대하다. 버스터 스크럭스는 그러한 영화의 이름을 앞세워 조의 세계를 정복한다. 영화의 논리는 무엇인가? 버스터 스크럭스의 퍼포먼스를 보다 보면 이상하리만큼 화려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건 단순히 인물의 본성을 넘어 카메라를 차지하기 위한 움직임처럼 보인다. 무슨 뜻인가? 영화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은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 순간부터 인물들은 영화 바깥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관객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만 한다. 영화가 사라지는 순간, 영화가 자신을 외면하는 순간 자신의 존재는 사라진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카메라 앞에서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며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시선을 얻기 위한 투쟁. 카메라를 차지하기 위한 운동. 영화를 위한 퍼포먼스의 향연. 말하자면 버스터 스크럭스는 어떻게 카메라의 시선을 차지하고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는지를 아는 인물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가 노래를 잘하는 이유도 영화를 차지하기 위한 퍼포먼스의 일환이다. 조가 죽은 뒤 그를 조롱하는 노래를 부를 때 그는 영화 자체를 완전히 정복한 것에 대한 승리를 축하하는 것만 같다. 

여기까지 따라왔다면 그가 왜 노래와 총질에 능한지, 혹은 왜 그를 코엔 형제가 주인공으로 삼았는지 역시 알 수 있을 것이다. 서부의 논리를 체화한 자. 그리고 영화의 논리를 체화한 자. 영화 속 서부 안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아는 자. 총질을 하며 서부 안에서 생존하고 노래를 하며 영화 안에서 생존하는 자. 하지만 그런 버스터 스크럭스조차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조의 동생과의 결투에서 승리한 뒤 노래를 부르려는 찰나 멀리서 또 다른 연주 소리가 들려온다. 불길한 징조이다. 노래를 빼앗긴다는 것은 영화에서 시선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고 동시에 영화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흔들린다는 의미이다. 이윽고 멀리서 자신을 ‘죽음의 전조’라고 부르는 남자가 버스터 스크럭스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버스터 스크럭스는 여전히 자신만만해한다. 결투를 앞두고 죽음의 전조가 말한다. “셋을 셀까?(You need a count?)” 버스터 스크럭스의 대답. “아니.” 이 대답이 나오자마자 죽음의 전조가 총을 쏜다. 정확하게 총알은 버스터 스크럭스의 머리를 관통한다. 그렇게 버스터 스크럭스는 서부에서 사라진다. 무엇이 그를 죽였는가? 달리 말하며 어떤 거대한 세계가 그의 세계를 정복했는가? 버스터 스크럭스는 자신의 영화 안에서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몰랐던 사실. 영화는 주인공이라는 자리를 필요로 할 뿐 그 자리에 어떤 인물이 오든 상관하지 않는다. 버스터 스크럭스보다 총질에 능하고,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는 자라면 영화는 언제든지 그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 있다. 말하자면 버스터 스크럭스는 자신이 영화의 주인이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그는 영화 속 시선의 대상일 뿐 주인이 될 수 없다. 그것을 깨달은 듯이 죽은 버스터 스크럭스가 말한다. “이런 날이 올 걸 예상해야 했네요. 영원한 최고는 없으니.” 그리고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죽음의 전조가 노래를 부른다. 그 역시 버스터 스크럭스처럼 영화를 체화한다. 이어지는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죽어있는 버스터 스크럭스에 다가간 죽음의 전조가 흙먼지를 시체에 뿌리자 버스터 스크럭스의 영혼이 하늘로 승천한다. 카메라는 걸어가는 죽음의 전조와 쓰러져있는 버스터 스크럭스의 시체, 그리고 승천하는 버스터 스크럭스의 영혼을 한 프레임 안에 담아낸다. 각각의 인물, 육체, 영혼은 각자의 방향으로 프레임에서 퇴장한다. 죽음의 전조는 말을 타고 지평선 쪽으로, 버스터 스크럭스의 시체는 장의사들에 끌려가며 화면 오른쪽으로, 그의 영혼은 날개를 달고 하늘로 사라진다. 이 장면은 그 자체로서도 아름다운 구도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거대한 순환, 거대한 운동을 담아내고 있다. 서부의 운동. 서부극의 운동. 영화의 운동. 버스터 스크럭스의 자리를 죽음의 전조가 차지했듯이 언젠가 다른 인물이 나타나 그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것이 서부를 차지하고자 하는 운동이고 서부극이라는 신화 속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퍼포먼스이며 영화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이들의 순환이다. 에피소드의 마지막 문단. “지금 어딘가에 또 한 명의 아이가 있다. 노래와 총질을 배우며 전설이 되기를 꿈꾸는 아이. 언젠가 그는 그 아이를 만날 테고 다르고도 같은 이야기가 또 생겨날 것이다.” 


4.  두 번째 에피소드를 보고 나면 누구든지 코엔 형제의 내러티브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로 가득 찬 내러티브. 자신이 짓지 않은 죄로 단죄받는 죄인. 여러 코엔 형제의 영화, 그중에서도 특히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를 떠올리게 하는 아이러니의 연쇄. 코엔 형제의 아이러니는 어디에서 오는가? 인물을 세계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나 세계는 인물보다 거대하다. 그러니 인물이 의지를 가지고 행동한다고 한들 그 의지의 산물을 언제나 의지 바깥에서 온다. 그것이 인물을 압도하는 세계의 법칙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첫 문단. “은행 설립 당시 그 위치와 이름을 놓고 마을이 떠들썩했음을 모르는 눈치였다.” 은행 앞에 선 카우보이는 자신의 방식으로 은행을 털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는 이 세계 앞에서 철저히 무지하다. 은행으로 들어선 뒤 은행 점장과 나누는 대화에서 그는 이전에 은행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듣게 된다. 은행에서 싸움이 나서 산탄총으로 진압한 것과 은행 강도 두 명을 직접 잡은 사건. 여기서 점장은 단순히 자신이 겪은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 (의식하든 아니든)카우보이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는 당신이 털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카우보이는 그 경고를 무시한다. 총으로 점장을 위협하며 돈을 요구하는 카우보이. 하지만 상대는 이미 두 명의 강도를 처치한 바가 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카우보이의 강도는 실패로 끝난다. 이 실패는 곧 세계의 법칙을 뛰어넘기 위한 운동의 실패이다. 말하자면 신화가 되기 위한 운동. 자신이 속한 세계의 법칙을 넘어서 새로운 법칙의 주인이 되기 위한 운동. 하지만 세계는 인물을 압도한다. 그러니 인물은 언제나 자신보다 거대한 세계 앞에서 그 법칙에 순응해야 한다. 코엔 형제의 시선에서 서부는 신화로 가득 찬 세계가 아니라 신화가 부재한 세계이다. 신화의 부재는 곧 신화를 창조하는 영웅의 부재이다. 코엔 형제의 서부는 자신의 세계를 넘어서는 영웅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인물은 세계가 창조한 논리와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카우보이의 노래>가 옴니버스인 것은 그러한 영웅의 신화를 허락하지 않는 서부를 담아내기 위함이다. 어떠한 서사도 신화가 될 수 없는 세계. 

그러한 서부의 법칙에 따라 카우보이는 교수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이 교수형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형을 집행하기 직전 갑자기 인디언들이 나타나 집행관과 그의 무리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세계와 세계의 충돌. 백인의 세계와 인디언의 세계. 백인의 인식 범주 바깥의 세계가 침입할 때 백인들의 세계의 법칙이 잠시 오작동한다. 하지만 인디언들은 카우보이를 구해줄 생각이 없다. 목에 올가미를 맨 채 간신히 버티고 있는 카우보이를 한 인디언이 바라보더니 그를 조롱하듯 소리를 질러 말을 놀라게 한 뒤 자리를 떠난다. 카우보이는 그렇게 두 세계 어디에서도 속하지 못한 상태로 놓인다. 세계로부터의 추방. 상징적 죽음. 그러던 중 소몰이를 하는 한 남자가 다가와 카우보이를 구해준다. 남자는 카우보이를 그냥 구해주지 않고 올가미에 총을 쏴 줄을 끊어 그를 구해준다. 이 장면을 보는 순간 누구든지 이것이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의 오마주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석양의 무법자>에서 블론디가 매달린 투코를 구하는 방법. 블론디가 매달린 투코를 구하는 것처럼 카우보이를 남자가 구출한다. 여기서 요점은 퍼포먼스가 아닌 구출 자체에 있다. 올가미를 목에 매달고 있는 카우보이를 보는 순간 어떤 인물이든 그가 세계로부터 추방당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카우보이를 보면서도 그를 구출한다는 것은 카우보이와 마찬가지로 상징적으로 죽은 인물이라는 것이다(가장 단순한 설명. 당신에게 구조 요청을 보내는 사람이 사형수라면 당신은 그를 살려줄 것인가?). 말하자면 카우보이의 구조 요청은 자신이 추방당한 상징계로 돌아가기 위한 몸부림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상징적 죽음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다. 처형식은 무효화된 것이 아니다. 세계는 한 번 추방한 그를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 

자신을 구해준 남자를 따라 소몰이를 하던 중 멀리서 보안관들로 보이는 자들이 나타나자 남자는 급하게 도망치고 영문을 모르는 카우보이는 그 자리에서 체포된다. 그 남자는 소 도둑이었고 카우보이는 그 남자의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된다. 재판에서 카우보이는 어떠한 변론의 기회도 얻지 못한다. 재판은 빠르게 진행되고 카우보이는 다시 한번 처형대에 오른다. 두 번의 재판. 두 번의 처형식. 코엔 형제는 두 개의 처형식을 확연하게 대비시켰다. 황량한 평원에서 이뤄지는 첫 번째 처형식과 군중들 앞에서 이뤄지는 두 번째 처형식. 재판의 과정이 생략된 첫 번째 처형식과 재판이 명확하게 드러난 두 번째 처형식. 그리고 첫 번째 처형식은 실패하고 두 번째 처형식은 성공한다. 카우보이는 첫 번째 재판에서는 상징적으로 죽고 두 번째 재판에서는 실재적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두 개의 죽음. 두 번의 죽음. 두 번째 처형식에서 재판이 신속하게 진행된 것은 단순히 서부의 부조리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오작동한 서부의 법칙을 바로잡기 위한 과정처럼 보인다. 코엔 형제의 영화에서 언제나 세계는 오작동이 일어나는 순간 이를 바로잡았다. 그것이 인간사의 부조리이다. 카우보이의 처형식은 이미 한 번 오작동을 일으켰다. 그렇기에 더 이상 서부는 그러한 오작동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기는 상징적 죽음이 실재적 죽음으로 이어 저야만 하는 세계이다. 이미 상징적으로 죽은 카우보이에게는 실재적인 죽음이 뒤따라 와야만 한다. 그래서 첫 번째 처형식과 달리 두 번째 처형식이 군중들 앞에서 이뤄지는 것도 더 이상의 오작동을 만들어내지 않기 위한 서부의 결단인 것만 같다. 처형대 위에 선 카우보이. 그러다가 그의 눈에 한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들어온다. 카메라는 그의 시점쇼트로 여자를 내려다본다. 두 인물은 눈을 마주치고 서로에게 미소를 짓는다. 전형적인 복선. 마치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될 것만 같은 징조. 하지만 코엔 형제는 그런 뻔한 복선이 진행되기도 전에 이야기를 끝낸다. 다시 한번 반복. 여기는 어떠한 신화도 허락되지 않는 서부이다. 세계는 한 차의 오차도 없이 법칙에 따라서 움직인다. 불가능의 세계. 어떠한 서사도 신화로서 존재할 수 없는 세계. 코엔 형제는 실패한 서사를 빠르게 끝내고 새로운 이야기로 넘어간다. 



5. 세 번째 에피소드와 네 번째 에피소드는 여러 측면에서 완전히 대비된다. 먼저 ’밥줄’이라는 제목을 가진 세 번째 에피소드는 해리슨이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팔다리가 없는 해리슨은 단장을 따라 서부 곳곳을 돌면서 공연을 가진다. 그 공연은 모두가 알만한 문학 작품이나 연설의 구절을 가져와 낭독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관중들은 무엇을 보기 위해 그의 공연을 찾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만약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단순히 사지가 없는 해리슨의 육체라면 그 낭독을 들을 이유가 없다. 단장도 그에게 낭독을 시키는 대신 그 육체를 전시하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관중들이 그를 보러 가는 것은 그의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낭독을 듣기 위해서이다. 이때 팔다리가 없는 해리슨의 육체는 어떠한 몸짓도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목소리만을 전달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야기만이 온전하게 전달될 수 있다. 단장은 해리슨의 육체를 통해 어떠한 육체적인 표현도 곁들이지 않은 순수한 이야기를 보여주고자 한다. 이야기의 전시. 목소리의 퍼포먼스. 첫 번째 공연에서 사지가 없는 해리슨의 육체를 본 이들은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하지만 해리슨의 낭독이 이어지자 모두가 그의 목소리에 매혹되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육체에서 목소리로의 전도. 한마디로 목소리의 영화. 

반면 네 번째 에피소드 ‘금빛 협곡’은 대사로 가득 찬 세 번째 에피소드와 달리 대사가 거의 없다. 대신 금광을 찾기 위해 협곡을 이곳저곳 파헤치는 노인의 육체를 바라보는 것이 영화의 거의 전부이다. 목소리와 육체. 두 개의 실존양식. 그리고 두 에피소드의 명확한 미장센의 대비. 내내 햇빛이 보이지 않는 어둡고 황량한 겨울을 배경으로 한 세 번째 에피소드와 광활하고 생명의 활기로 가득한 협곡의 절경을 무대로 하는 네 번째 에피소드. 배경의 차이는 곧 정조의 차이이다. 이러한 정조의 차이는 두 개의 서사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중심인물인 해리슨은 앞의 두 에피소드와 마찬가지로 죽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의 죽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반면 네 번째 에피소드의 탄광자는 죽은 것처럼 보였으나 죽지 않는다. 혹은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다. 유일하게 죽음을 극복한 인물. 

이 대칭을 좀 더 자세히 따라가 보자. 해리슨의 퍼포먼스는 오로지 목소리가 유일하고 그 목소리를 통해 흘러나오는 이야기가 전부이다. 단장은 이 서부에서 오로지 목소리와 이야기만으로 살아남고자 한다. 이때 이야기를 낭독하는 해리슨의 육체는 어떠한 기능도 하지 못한다. 밥을 먹을 때나 생리 현상을 해결할 때나 단장이 거들어 주어야 한다. 게다가 해리슨은 에피소드에서 낭독을 할 때를 제외하면 단 한 마디의 대사도 하지 않는다. 해리슨은 그저 자신이 외운 대사들을 무대에 설 때만 낭독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해리슨은 한 명의 인물이라기보다 낭독하는 기계처럼 보인다. 분명히 단장에게 해리슨은 그러한 존재일 것이다. 돈을 벌어다 주는 기계. 이야기하며 사람들을 홀리는 기계.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해리슨의 공연을 보러 오지 않는다. 더 이상 관중들은 이야기에 자신들의 시간과 돈을 소비하지 않는다. 단장은 문득 관중들이 열광하는 암산하는 닭의 퍼포먼스를 보게 된다. 해리슨과 정반대의 영역에 있는 퍼포먼스. 온전한 육체의 퍼포먼스. 아무런 목소리 없이 사람들이 전하는 수식을 푸는 닭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열광한다. 누군가는 이러한 모습을 보며 점차 예술적 가능성으로서의 이야기가 사라져 가고 스펙터클만이 남게 된 작금의 영화적 현실에 대한 코엔 형제의 쓸쓸한 비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해석을 부정하고 싶지 않지만 너무 멀리 밀고 나아가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나는 여기서 코엔 형제가 다시 보여주는 하나의 순환 자체에 더 집중하고 싶다. 어떤 순환? 끊임없이 자리를 내주고 차지하기를 반복하는 순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버스터 스크럭스가 자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새로운 인물이 그 자리를 차지했듯이 해리슨이 차지했던, 혹은 이야기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스펙터클이 차지한다. 세계는 그 자리 자체를 필요로 할 뿐 어떤 인물이, 어떤 대상이 그 자리에 위치하는가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끊임없는 순환. 세계의 흐름 앞에서 밀려나는 인물들의 비애. 부조리한 순환을 응시하는 영화. 이제 단장의 마차에 해리슨과 수학하는 닭이 함께 오른다. 불가능한 공존. 한쪽은 다른 한쪽을 반드시 밀어내야만 한다. 마차를 타고 가던 중 다리에서 멈춘 단장은 무언가를 시험하듯이 다리 밑으로 돌을 던진다. 불길한 징조. 그리고 마차로 돌아오는 단장을 해리슨의 시점 쇼트로 바라보며 신이 끝난다. 그 뒤 마지막 장면에서 해리슨은 마차에 있지 않다. 누구든지 예측 가능한 죽음. 이때 중요한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닌 죽음을 보여주지 않는 영화의 선택 자체에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버스터 스크럭스의 죽음은 화려하게 연출된 것에 비해 해리슨의 죽음은 영화에서 생략되었다. 왜 그래야 하는가? 카메라는 그 이전에 단장이 다리에서 돌을 떨어뜨리는 모습은 명백하게 담아냈다. 이 상황에서 단장이 똑같이 해리슨을 떨어뜨려 죽이는 것을 영화가 보여준다면 그것은 해리슨을 돌과 동치 시키는 것이다. 그건 명백히 단장의 관점이다. 기계와 다를 바가 없는 해리슨의 육체. 더 이상 사람들을 매혹시키지 못하는 쓸모없는 육체. 하지만 이 장면의 마지막 쇼트는 해리슨의 시점 쇼트이다. 해리슨은 지금 자신에게 다가오는 단장이 무엇을 할지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저항할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이 쇼트의 마지막 페이드 아웃은 해리슨이 눈을 감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건 곧 자신에게 닥칠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자 이 거대한 순환에 복종하겠다는 의미이다. 이 결단은 한낱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결단이다. 코엔 형제는 그러한 그의 결단을 존중하기 위해 그의 죽음을 묘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코엔 형제가 인물을 애도하는 방식이다. 세계는 그를 애도하지 않으나 영화는 그를 애도할 수 있다. 혹은 그래야만 한다. 영화의 윤리. 해리슨이 다른 인물들과 다른 점은 그가 세계 앞에서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일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렇기에 영화는 더욱더 그를 애도해야만 한다. 서부극의 바깥. 서부극이 미처 보지 못한 서부의 이면. 코엔 형제는 그렇게 세계 앞에서 가차 없이 버려지고 밀려나는 이를 향해 마지막 연민의 시선을 보낸다. 

그런데 이 에피소드 뒤에 이어지는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이러한 세계의 운동과 순환이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 서부는 운동하는 세계가 아닌 그 자체로서 존재하기만 하는 세계처럼 보인다. 자연 그 자체로서의 서부. 이 풍경은 버스터 스크럭스가 묘사한 “지역 간 거리가 멀고 경치가 단조로운 곳”이라는 말이 적용되지 않는다. 마치 인간에 의해 개척되지 이전의 순수한 서부를 보는 것만 같은 절경에 한 노인이 노래를 부르며 나타난다. 그가 나타나자 협곡의 생명체들은 화면 바깥으로 도망친다. 이 장면만 보면 마치 이제부터 인간과 자연이 대립하는 서사가 이어질 것만 같다. 하지만 에피소드가 진행될수록 그 예측은 빗나간다. 오히려 늙은 탄광자는 자연을 그 자체로서 존중하며 자연은 그러한 노인을 품어주는 인상이 든다. 그렇기에 여기에는 앞서 있었던 에피소드들이 보여준 서부의 거대한 순환과 운동이 나타나지 않는다. 세계가 운동을 멈출 때 카메라는 인물의 운동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다. 그러니 네 번째 에피소드는 오로지 늙은 탄광자(혹은 이를 연기하는 톰 웨이츠)를 위한 에피소드이다. 이 늙은 탄광자는 계속해서 금광을 “금광 양반”이라고 부르며 자연을 의인화한다. 여기에서 자연은 인물을 제약하는 환경도 자신의 법칙을 따라 운동하는 세계도 아니다. 네 번째 에피소드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이질적인 것은 단순히 미장센에서 오는 것이 아닌 세계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에 있다. 이런 점에서 네 번째 에피소드는 유일하게 버림받은 자가 아닌 개척자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문명의 승리를 담은 이야기인가? 하지만 코엔 형제는 그런 인간의 서부 개척의 역사가 시작될 것 같은 시점에 그 서사를 멈춘다. 마침내 탄광자가 금광을 발견한 순간 누군가 아무런 조짐도 없이 갑자기 노인의 등 뒤에 나타난다. 곧이어 그가 총을 쏴 탄광자를 죽인(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남자가 구덩이로 들어가자 탄광자가 살아나 남자를 죽인다. 노인에 의하면 그 남자의 총알은 정확히 급소를 피해 배만 관통했다고 한다. 이 상황은 마치 남자의 살인이 실패했다기보다는 자연이 노인을 죽음으로부터 구해준 것만 같이 보인다. 만약 남자의 살인이 성공했다면 그것은 생존을 위해 모든 살육이 허용되는 서부의 법칙이 자연으로 넘어오는 것이다. 인간의 법칙. 인간문명이 창조한 법칙. 하지만 자연은 그 자체로서 존재할 뿐 그러한 법칙이 자신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다. 그렇기에 자연은 자신들과 공존할 줄 아는 노인을 되살려내 그러한 법칙의 운동이 시작되는 것을 멈춘다. 역사를 멈추는 세계. 코엔 형제는 인간에 의해 개척된 서부를 디스토피아적으로 그려낸 데 반해 어떠한 문명도 도착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서부는 유토피아적으로 그려낸다. 역사 바깥의 서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서부. 아낌없이 내어주는 자연. 이 대조는 마치 서부에서 인간이 겪은 모든 비극은 인간 스스로가 자아낸 비극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영화 전편을 통틀어서도 인간은 서로를 죽일 뿐 자연은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서부 개척사의 비극이고 역사의 비극이다. 서부극의 이면. 세계의 흐름 앞에서 무기력한 인간. 그 이면에서 떨어진 유토피아. 역사 바깥에서 충만한 인간. 늙은 탄광자는 그렇게 자연의 은혜로 죽음에서 돌아와 금을 채취한 뒤 협곡을 떠난다. 그가 떠난 뒤 협곡은 잠시 사라졌던 생명들이 돌아오며 다시 원래의 활기를 회복한다. 아마도 이제 노인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가 다시 돌아오는 순간 이 반복은 역사와 문명의 운동이 될 것이다. 자연은 그것을 원치 않는다. 늙은 탄광자는 그걸 잘 알 것이다. 앞으로도 그곳에는 영원히 문명이 도착하지 않을 것처럼 이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초원 위의 말굽 자국과 구멍 뚫린 산비탈만이 그곳의 평화를 깨뜨리고 간 요란한 삶의 흔적으로 남았다.” 


6. 다섯 번째 에피소드인 ‘낭패한 처자’는 모든 에피소드 중 가장 극화되어 있다. 서사의 구조는 가장 정형화되어 있고 인물들의 이주, 인디언과의 대립이라는 서부극에서 가장 흔한 소재들이 등장한다. 누군가는 이 에피소드를 보고 난 후 하워드 혹스의 <붉은 강>의 초반부를 떠올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행렬을 떠나고자 하는 길잡이. 그런 길잡이와 사랑에 빠지는 여성. 그러나 사랑을 실패하도록 만드는 인디언의 습격. 여기서 나는 두 영화의 요소들을 일일이 대조하는 대신 두 영화에서 인물의 성공과 실패의 차이에 대해서 질문하고자 한다.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 보자. 다섯 번째 에피소드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실패의 연쇄극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모든 것이 실패한다. 앨리스와 길버트의 이주도 실패하고 앨리스와 빌리 냅의 결혼도 실패하며 아서 역시 앨리스를 구하는데 실패한다. 실패로 가득 찬 서사. 나는 이 실패들의 인과를 하나씩 해체하는 대신 이 실패들이 남긴 여파가 무엇인지 질문하고자 한다. 첫 번째 실패. 오리건으로 이주하던 길버트가 갑자기 급성 콜레라에 걸려 죽는다. 이 행렬의 주인이 사라졌다. 이제 그 주인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앨리스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앨리스는 그 주인의 자리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 길잡이인 맷은 길버트와의 약속이라며 포트래러미에서 임금의 절반인 200달러를 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앨리스에게는 그 정도의 돈이 없다. 게다가 길버트의 돈은 그의 시신과 함께 묻혀있다. 그녀는 주인의 자리에 갔지만 주인이 되지 못한다. 책임과 능력의 간극. 이 주인의 자리는 지금 사실상 공백의 상태이다. 누군가 이 공백의 자리로 가야만 한다. 동시에 길버트의 죽음은 곧 길버트가 주선하기로 한 앨리스의 결혼이 무효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지금 공백의 상태로 있는 것은 행렬의 주인의 자리와 앨리스의 남편의 자리이다. 그런 상황에서 길잡이인 빌리 냅이 앨리스에게 청혼을 한다. 여기서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배제해야 한다. 빌리 냅은 길잡이 생활을 그만두고 어딘가에 정착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을 꾸려야 하고 자신이 누군가의 남편의 자리로 가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남편의 자리가 공백으로 있는 앨리스와 결혼하고자 한다. 이 선택은 앨리스가 책임지지 못하는 주인의 자리까지 책임지겠다는 결단이 포함되어 있다. 그걸 알기에 빌리 냅은 앨리스에게 그의 오빠 길버트가 진 빚을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약속한다. 말하자면 앨리스와 빌리 냅은 서로에 대한 구원의 가능성이다. 행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구원. 새로운 삶에 대한 가능성. 

하지만 그 구원의 욕망은 결국 실패한다. 이 실패는 서사에서 독립적인 실패가 아닌 이전의 실패가 연쇄된 결과이다. 그 연쇄를 따라가 보자. 빌리 냅은 앨리스에게 여정 내내 끊임없이 짓어대는 강아지 피어스 대통령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을 전하면서 그를 죽여도 되는지 물어본다(나는 이 피어스 대통령을 어떤 메타포로 보고 싶지는 않다). 앨리스가 자신의 강아지가 아닌 길버트의 강아지라고 말하자 빌리 냅은 곧장 강아지를 데리고 죽이러 간다. 이 선택은 자신이 강아지의 주인이라는 선언이다. 강아지의 생명권을 결정할 수 있는 주인. 그러나 그는 강아지를 죽이지 못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방아쇠를 당기자마자 강아지가 도망쳤다고 한다. 여기서 실패의 이유는 핵심이 아니다. 이 실패는 더 커다란 실패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여정을 이어가던 중 앨리스가 갑자기 행렬을 이탈한다. 아서가 그녀를 찾아 나서고 곧 버림받은 뒤에도 계속해서 그들을 쫓아오던 피어스 대통령과 놀고 있는 앨리스를 발견한다. 이 강아지는 빌리 냅이 실패한 임무이다. 주인으로서 실패. 앨리스는 그 실패를 되찾기 위해 행렬을 이탈한 것이다. 안 좋은 선택. 코엔 형제 영화에서 비극은 언제나 실패를 다시 되돌리고자 할 때 벌어진다(가장 대표적으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실패를 되돌리는 것은 자신이 속한 세계의 질서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저 멀리서 인디언 무리가 나타난다. 그들이 공격할 태세를 보이자 아서도 방어할 준비를 한다. 그러면서 앨리스에게도 총을 한 자루 쥐어준다. 이 총은 아서가 방어에 실패했을 때 자결하기 위한 용도이다. 앨리스가 거부하자 아서는 이 말을 덧붙인다. “저들에게 잡히면 안 좋은 꼴을 당할 거요. 옷을 찢어 발가벗긴 후 강간할 겁니다. 그런 다음 생가죽을 벗기고 몸 한가운데 말뚝을 박아 땅에 꽂은 후 다른 몹쓸 짓을 더 할 텐데 그렇게 당할 순 없잖소.” 공포를 심어주는 아서. 이때의 공포는 인디언에 대한 백인의 공포이다. 공포의 형상화. 이 공포를 심어준 뒤 아서가 전투를 시작한다. 그리고 승리한다. 단 한 번 인디언에게 기습을 당해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결국 그 인디언도 처리한다. 하지만 아서가 승리했음에도 앨리스는 아서의 말대로 자살한다. 아마도 아서가 한 번 기습당한 순간에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앨리스를 죽인 것은 아서가 그녀에게 심어준 공포이다. 말하자면 인디언에 대한 공포. 인디언에 대한 백인의 인식. 결국 아서는 전투에서는 승리하지만 길잡이로서의 임무는 실패한다. 

이 실패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서가 인디언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앨리스는 하나의 가능성을 본 것이다. 어떤 가능성? 아서는 그녀를 인디언의 세계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방어선이다. 그 방어선이 무너질 수 있다는 가능성. 그 방어선이 무너졌을 때 그녀에게 들이닥칠 공포. 서부극에서의 공포. 아서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하지 않았을 선택. 이 죽음은 곧 백인의 세계와 인디언의 세계에 대한 공존불가능성으로서의 표상이다. 서로에 대한 타자. 타자들의 세계. 이 타자들은 서부극 안에서는 공존할 수 없다. 두 세계는 반드시 한 프레임, 하나의 신에 잡히는 순간 충돌해야 한다. 그것이 서부극에서의 원칙이다(물론 나는 여기서 수정주의 웨스턴과 같은 서부극의 긴 역사를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다). 공존 불가능한 세계. 동시에 앨리스의 죽음은 서부극 바깥으로 나가고자 했던 그녀의 욕망의 실패이다. 왜 실패했는가? 아서가 심은 공포. 전형적인 백인의 공포. 전형적인 서부극의 논리. 서부극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서부를 바라보는 백인의 인식 체계와 시선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결국 그녀는 서부극의 서사와 논리를 받아들인다. 그녀의 죽음을 확인한 아서는 행렬로 돌아가고 거기서 자신을 향해 오는 빌리 냅을 발견한다. 그때의 빌리 냅은 자신이 실패한 임무가 어떻게 돌아왔는지 아직 모르고 있다. 빌리 냅의 실패는 행렬의 운동으로 표상되는 백인의 세계의 질서를 바로잡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이어진 앨리스의 일탈은 그녀의 죽음이라는 방식으로 회귀한다. 일탈이 허용되지 않은 세계. 아서는 세계 바깥에서 그녀를 지키고자 했으나 결국 그가 심어준 타자에 대한 공포가 죽음이라는 결과로 돌아왔다. 이야기의 살인. 이 죽음으로 인해 행렬의 운동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빌리 냅의 욕망 역시 실패한다. 그에게는 이제 앨리스의 남편의 자리도, 행렬의 주인의 자리도 사라졌다. 이제 빌리 냅은 이 서사 안에서 영원히 길잡이의 역할로서 주인 없는 행렬의 운동 안에 머물러야 한다. 행렬의 주인이 사라졌다는 것은 서부극의 주인이 사라졌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서부극은 주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주인 없는 운동. 주인이 없다는 것은 이 운동의 목적지가 부재한다는 의미이고 그럴 때 이 운동은 세계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이 전부이다. 서부극은 인물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 아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부극의 승리를 위해 두 인물을 희생시켰다. <붉은 강>에서 던슨은 행렬을 빠져나와 자신의 신화를 창조하는 데 성공했지만 자신이 빠져나온 그 행렬이 파괴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신화의 창조. 서부극의 붕괴. 하지만 <카우보이의 노래>에서는 그러한 신화가 허락되지 않는다. 코엔 형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들의 서부에서는 그러한 신화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서사를 마무리한다. 



7. 마지막 에피소드가 메타 영화, 영화에 관한 영화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멈추지 않은 영화처럼 멈추지 않는 마차(그런데 이 영화는 OTT 영화가 아닌가?). 코엔 형제를 대놓고 은유하는 두 명의 현상금 사냥꾼. 죽은 시체처럼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죽어있는 우리를 운반하는 서사. 이 에피소드는 코엔 형제 특유의 리듬감과 서스펜스만으로도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동시에 이 에피소드에서 코엔 형제는 자신들의 창작에 대한 태도와 방법론을 보여주고자 한다. 현상금 사냥꾼 팀 보스의 말. “클래런스가 작업을 마친 뒤에 그자들을 보면 흥미로워요. 길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죠. 여기서 저기로 저 반대편으로 가면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려고 애써요. 이해하려고 애쓰는 그들의 눈을 들여다보는 게 좋아요.” 여기서 보스가 말하는 그들이 관객인 우리라는 것은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우리가 이야기에 홀려 있을 때 코엔 형제는 우리의 뒤를 후려치는 데 능숙한 창작자들이다. 그렇게 우리는 죽은 채 영화에 실려가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파악할 뿐이다. 영화의 흐름에 온몸을 맡기는 순간. 코엔 형제는 OTT 시대에도 여전히 영화에 몸과 시간을 온전히 맡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시간의 주권을 영화에게 내주자는 전언. 그 말을 하기 위해 누구든지 멈추고 돌아갈 수 있는 넷플릭스 영화에서 멈추지 않는 마차를 등장시켰다. 

마차가 호텔에 도착한 뒤 현상금 사냥꾼 팀은 시체를 데리고 호텔로 들어간다. 세 명의 승객은 망설임 끝에 마차에서 내리고 호텔로 들어갈 준비를 한다. 그들을 내린 마차는 또 다른 승객을 태우기 위해 돌아간다. 이제 영화가 끝나면 호텔로 들어간 승객들처럼 각자의 관객은 각자의 방식으로 영화 이후의 세계를 마주할 것이다. 코엔 형제는 영화가 플랫폼의 일부가 된 시대에도 영화가 하나의 예술 매체로서 존재하기를 바란다. 서부의 존재론에서 시작한 영화는 서부극에 대한 존재론으로 넘어와 결국 영화의 존재론에 대한 질문으로 마무리된다. 아마도 코엔 형제는 이미 죽어버린 장르, 서서히 죽어가는 듯한 매체의 존재론을 다시 탐구하며 그 가능성을 남겨놓는 것만 같다. 분명 서부극은, 영화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나 역시 그 믿음을 지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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