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많이 하는 이야기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의 고민이나 자존감 하나는 높지 하는 자각이나 어찌 됐든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키워드.
오늘 내가 생각하고 싶은 것은 '잘하지 못하는 나'이다. 자존감은 무엇이든 잘하는 나로부터 오는 뿌듯함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감정인데, 많은 경우 무언가를 잘하는 뛰어난 내 모습에 만족하며 자존감을 쌓게 된다. 작은 성취, 작은 성공 경험을 쌓으면 자존감을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는 자기 계발서의 이야기 덕분이다. 맞는 이야기지만 비록 '작은'이라는 수식어가 있다 해도 성취와 성공에 집중하다 보니 실수하는 나, 기대에 못 미치는 나를 만날 때 쌓아놓은 자존감이 허무하게 무너지기도 한다. 예상에 없던 전개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렇다. 어느 정도 쌓아둔 커리어가 자랑스럽고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재미가 있다. 가끔은 일에 몰입하는 내가 마음에 들고 노력하는 대로 나오는 결과물도 만족스럽다. 그러다 갑자기 아차 싶다. 이곳을 벗어나면 지금의 내 모습은 없을 텐데. 이런 일을 하는 나는, 이런 인정을 받는 나는 없을 텐데.
"팀장님 처음 봤을 때랑 지금이랑 너무 다른 것 같아. 첫인상이랑 엄청 달라졌어."
"음...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은데..."
"어? 아니.. 응.. 일.. 잘.. 하는 거 같아."
"정치적으로 보인다는 거죠? (웃음) 팀장님, 전 팀장님이 처음 봤을 때 그 모습 그대로예요. 그러니 정치적인 이 판에서 제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이런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알고 있는 모습과 다르다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나도 일처리 하는 내 모습에 가끔 놀라지만 마음의 부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긴장하고 스트레스받고 피하고 싶은 날의 연속이다. 그런 날이 쌓여 어느덧 괜찮아지는 순간도 오지만 그 모습으로 살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종종 멈춰 서게 된다. 이것이 정말 내 모습인지, 내가 원하는 모습인지.
이미 한번 경험했었다. 힘든 점도 있었지만 새로운 업무가, 내게 거는 기대가, 사탕발림일지라도 쏟아지는 칭찬이 좋아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 어떤 일을 계기로 서운한 마음 반, 어디 한번 고생 좀 해 봐라 하는 마음반으로 휴직을 했는데 조직을 벗어나니 어디에서 인정을 받아야 할지 마음잡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며 적당히 일 잘하는 내가 나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회사가 아닌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니 만족이 없었다. 회사 밖의 나는 없는 것인가? 직장에 기반한 나의 커리어와 자존감은 신기루 같은 것인가? 물음표가 떴다. 그저 내가 있는 환경이 달리진 것뿐이다. 회사라는 조직이 아닌 또 다른 공간에서 나이지만 변형된 모습으로 다양한 나를 꺼낼 수 있고 과거의 인정, 어제의 나를 털고 오늘의 나를 일으켜 세우면 되는 것인데 말처럼 쉽지 않았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의 격차를 해소하는 데 걸리는 시간, 수용의 과정이 만만치 않았기에 조직에 몸담고 있는 지금, 이따금 자아도취에 빠지는 순간을 경계한다. 더 잘하려고 힘을 주는 순간마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모습인지 의식적으로 멈춰 선다. 환경에 상관없이 내가 나 일수 있는 모습을 찾고 유지하기 위해 에너지를 비축하는 것이다. 에너지를 다 쓰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무슨 일이든 시작하면 인정받고 싶고 잘 해내고 싶기 때문이다. 부족하다 싶으면 그 결과 값이 곧 나인 것 같아 굳이 100% 이상을 해내고 싶다. 이 과제의 성공이 곧 나는 아냐. 하나의 일일 뿐이고 누가 해도 비슷한 결과를 얻을 거야. 그럼에도 나라는 사람은 변함없이 존재하니 과제와 나를 분리하고 설사 잘 해내지 못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려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잘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연습, 너무 애쓰지 않는 연습이랄까? 잘한 뒤에 얻게 되는 영광을 곧 나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무언가를 잘 해내면서 자존감을 쌓는 게 아니라 잘하지 못하는 나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꺼내놓으며 자존감을 쌓는다. 맡은 일마다 100% 갈아 넣어야 성실한 사람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정당하게 처리하고 내 삶을 잘 꾸려가면 내 인생에 성실한 사람이다. 누구에게 성실한 사람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지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내 모습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그래도 괜찮지, 누군가 내게 실망해도 괜찮지. 이런 측면에서 미숙함을 보여도 어쩔 수 없지. 꼭 최고가 될 필요는 없지 되뇌며 나는 내 자존감을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