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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Feb 11. 2019

졸업식에 관한 상념

얼마 전 신곡을 소개하는 코너에서 고정게스트인 배순탁 음악작가가 윤덕원의 노래 <졸업식이 끝나고(vocal 시와)>를 가져왔다. 노래 이야기가 2할이면 각종 딴소리가 8할인 코너라 이야기는 금세 옆길로 샜고, DJ와 게스트는 각자 졸업식이 끝나고 뭘 했었는지 수다를 떨었다. 자장면을 먹었던 게 초등학교 졸업식이었는지 중학교 졸업식이었는지를 더듬거리다가, 대학교 졸업식이 끝나고 가족들과 스테이크를 먹었던 기억은 비교적 선명하게 풀어놨다. (유능한 음악작가는 이렇게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응?)

이야기를 들으며 졸업식에 관한 내 기억들을 떠올려 봤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지금 남편이 된 당시 남자친구의 대학 졸업식이다. 우리가 연애한지 2년쯤 됐을 때였는데, 살벌한 취업난 속에서 일찌감치 은행 입사를 확정지은 그의 졸업식은 내내 유쾌했다. 홀로 아들을 번듯하게 키워낸 어머니께 학사모를 씌워주는 모습은 전형적이었지만 왜 그것이 전형적인 세레모니인지, 왜 많은 사람들이 해마다 그 장면을 반복해 연출하는지 단박에 이해가 될 만큼 가족들의 표정은 행복해보였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건 그 전 해였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부모님께 학사모를 씌워드린 기억이 없다. 우리 가족들은 내 대학 졸업식에 오지 않았던 것 같고, 심지어 나도 참석했었는지 불분명하다. 아주 희미하게 친구들과 웃던 장면이 드문드문 떠오른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동생 둘까지 다섯 식구가 모두 식당에 갔던 기억은 난다. 중학교 졸업식 땐 내가 단상에 올라 상을 탈 때마다 아버지가 그걸 카메라에 담으려 무대 곳곳을 성큼성큼 걸어다녔는데, 어린 마음에 그게 부끄러우면서도 나를 견딜수 없이 자랑스러워하시는 마음이 느껴져 기뻤던 기억이 선명하다. 초등학교 졸업식에선 다니던 동네 교회 목사님이 축사를 하셨는데, 목사님을 교회가 아닌 학교에서 보는 게 신기하고도 어색했었다. 대학교 졸업식만 기억에 없다. 그러고 보니 그 즈음의 기억은 통째로 없다시피 하다. 왜 그런지도 안다. 뭘 했어야 기억이 날 텐데, 대학 졸업부터 회사에 입사할 때까지 약 2년 정도 나는 추억에 남을만한 무언가를 한 적이 거의 없다.
당시 나는 방송국 입사 시험에 연거푸 낙방하면서 극강의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누구는 면접 50번 만에, 누구는 100번 만에 취업했다는 소문이 안개처럼 무겁게 학교를 짓누르는 계절, 닥치는대로 이력서를 넣어야 겨우 한두 군데 시험 볼 기회를 얻는 마당에 방송 3사 통틀어 한 해에 다섯 명 뽑을까 말까한 라디오PD직에만 원서를 넣는 나는, 내가 봐도 대책없이 한심한 동키호테였다. 누가 물으면 언론사 시험을 준비한다는 말이 웅얼웅얼 입에서만 맴돌았다. 라디오PD가 되든 포기하고 어디 다른데 취업하든, 결론이 나야 누구를 만나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이 급해서 무엇에도 눈이 가지 않았다. 부모님 집에도 잘 가지 않았는데 졸업식을 챙겼을 리가 없다. 아마 부모님께 오시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을 것이다.

미셸 오바마의 책 <비커밍Becoming>을 읽다가, 미셸의 아버지가 병석에서 돌아가시기 직전 장면에서 눈물이 터졌다.

<우리는 아버지의 의식을 도로 불러들이려고 옛 추억을 꺼냈다. 그러면 아버지의 눈이 약간 반짝거렸다. ‘듀스와 쿼터’ 기억하세요? 그걸 타고 여름에 자동차극장에 갔던 거 기억하세요? 우리가 그 널찍한 뒷좌석에서 뒹굴었던 거 기억하세요? 아버지가 우리에게 권투 글러브 사줬던 거 기억하세요? 듀크스 해피홀리데이 리조트의 수영장 기억하세요? 아버지가 로비 할머니네 오페레타 워크숍에 쓸 소도구를 만들어줬던 일은요? 할아버지 집에서 다 함께 저녁 먹던 일은요? 엄마가 새해 전야에 새우튀김 만들어줬던 거 기억하세요?>

나와 내 부모님 사이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내가 그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일들은 뭐가 있을까. 딸들과의 추억도 생각했다. 내가 만약 죽음을 목전에 뒀다면, 딸들은 내게 무엇을 이야기하며 ‘그것 기억 하세요?’ 라고 말할까.
10대 시절부터 나는 다른 사람들이 다 하는 ‘전형적인 일들’이 우습다고 생각해 많이 건너뛰었다. 고등학교 땐 수학여행을 가지 않았었다. 집이 가난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랬다. 별로 재미있어보이지 않는 그 단체행동에 들이는 돈 치고 우리 형편에 과하다고, 그러니까 ‘실용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현실의 가난을 과장해 나를 ‘고독한 소녀’로 만들고 싶은 사춘기 특유의 마음도 없다곤 못하겠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사고로 뇌기능이 많이 떨어지신 지금, 그동안 ‘전형적인 일들’을 우습게 여기고 거의 하지 않았던 게 좀 후회된다. 수학여행이나 졸업식, 크리스마스 식사나 설날 세배같은 ‘연극적인 행사’ 대신 실용적인 걸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고작 도서관에 하루 더 앉아 상식 문제를 외우는 일이었다. 그런 일은 사랑하는 사람이 임종을 앞뒀을 때 함께 추억할 만한 일이 못 된다.   
이번주 일요일, 8살 딸아이가 피아노 연주회 무대에 선다. 두 곡, 채 5분도 되지 않을 짤막한 시간이고 ‘똥땅똥땅’ 수준의 어설픈 연주겠지만 나는 꽃다발을 들고 가서 축하해주고 무대 근처에 접근해 사진도 찍을 생각이다. 친척들 집에 놀러가면 거실에 그집 딸이 어린 시절 공주풍의 드레스에 발레리나처럼 화장을 하고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사진이 걸려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역시나 내가 우습다고 생각했던 연극적이고 전형적인 그림 중 하나였는데, 지금은 연극적이고 전형적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우습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돌아가신 엄마께, 그리고 많은 기억을 잃은 아빠께 내가 ‘그것 기억하세요?’라고 묻고 싶은 추억들 중 상당수가 그런 일들이다.

P.s 나는 이렇게 방송을 하다가 종종 상념에 빠진다. 듣던 노래 가사에, 게스트가 하는 이야기에, 디제이의 코멘트에.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도 그럴까. <졸업식이 끝나고 / 텅 빈 교실에 홀로 앉아서 / 꽃잎 같은 너희들을 보내고 나면 / 다시 또 봄이 오겠지> 이런 가사를 읊조리는 시와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들을 할까. 홀로 상념에 빠지게 만드는 데 라디오는 참 전형적인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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