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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Jan 28. 2019

다시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사랑

결혼 생활 이야기

결혼을 해서 같이 살아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게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어떤 연인에게나 ‘결혼제도 안에서 함께 살아봐야만 알 수 있는 그 사람의 무언가’가 있다. 왜 살아봐야만 알 수 있느냐. 싸우고 나서 돌아갈 각자의 집이 없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무대에서 내려가 스스로를 재정비하고 싶은데 퇴장하지 못한 채 끝끝내 분장이 다 지워진 맨얼굴로 서로를 마주할 때, 화장솜으로 한순간 얼굴을 말끔히 닦아내는 것도 아니고 시간과 땀에 시시각각 화장이 날아가는 것을 고스란히 들킬 때,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된다. 아... 망한 것 같다...

언성을 높이며 남편과 다투던 어느 날, 스스로가 너무 추해서 그게 제일 슬펐다. 내게 이런 바닥이 있다는 걸 나도 몰랐는데, 심지어 그걸 가장 가까운 타인에게 들키는 중이라니. 그 사람의 바닥을 보면서는 ‘저런 바닥을 드러내게 한 게 나’라는 생각에 또 괴로웠다. 연애 때는 싸우다 멈추고 돌아설 수가 있었다. 토라져 집에 가기도 하고, 정 뭣하면 헤어지면 그만이었다. 바닥을 드러낼만큼 싸우기 전에 보통은 헤어지고 만다. 결혼하고 나니, 특히 아이를 낳고 나니 그게 안 된다.

결혼해서 같이 살아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당연하다. 내 한계가 어디인지는 한계까지 가 봐야 확인할 수 있는 법이니까. 지저분한 걸 못 참는 성격인 건 연애 때도 알 수 있지만, 그걸 어느 정도까지 못 참는지, 못 참으면 어떻게 되는지, 얼마나 괴로워하게 될지는 겪어봐야만 알 수 있다.

그 사람과 내가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안 맞는지, 살아보기 전에는 모른다. 그러니 결혼이 얼마나 모험인가.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안 맞는지 모르는 채로, 저 사람과 사회적/법적으로 묶이기로 결정해야하니 말이다.  

남편과 나는 5년 연애 후에 결혼했다. 연애하던 시절 심하게 다퉜던 적은 내 기억으로는 없다. 결혼하고 나서, 특히 아이를 낳고 나서 많이 다퉜다. 사랑이 끝났구나, 생각한 적도 있었다. 저 사람이 정말, 내게 정이 떨어졌구나. 사람이 생노병사 하듯이 우리의 사랑도 소멸했구나. 그렇지만 어린 아이들을 생각하니 차마 헤어질 수가 없었다. 어린 아이들을 두고 헤어질만큼, 그 정도로 저 사람과의 결혼생활이 최악인 것은 아니었다. 남자친구였다면 헤어졌겠지만 남편이자 내 아이의 아빠일 때는 헤어질 정도는 아닌...그런 갈등이랄까. 이제는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정도의 마음으로는 헤어질 수가 없는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사랑이 끝난 걸 아는데도 헤어짐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게 비참하고도 절망스러웠다.

남편에게도 물었다. 아이들이 아니었어도, 우리가 계속 같이 살았을까? 지나치게 솔직한 현실주의자인 내 남편은 이번에도 가감없이 말한다. 당연히 아니지. 아이들이 아니라면 굳이 괴로워하면서 서로 맞춰갈 필요가 있겠어. 그런데 나는 그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해. 사랑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헤어지지 않고 계속 같이 살기로 결정하는 것, 그게 사랑이야 나한테는.   

한 사람과 오래도록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건 그 자체로 사람을 성숙하게 하는 것 같다. 나는 남편과 결혼해 살면서 조금 더 어른이 됐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완전히 깨져서 망가진 것만 같은 관계를 다시 조각조각 모아 회복시켜 본 몇 번의 경험 때문이다. 사랑이 끝났다고 생각될 때, 내가 다 망쳐버린 것 같아 괴로울 때, 그래도 저 사람을 다시 사랑해 보자고 결심했더니 또 다른 얼굴의 사랑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그렇게 결심한 건 ‘저 사람은 다시 사랑할 가치가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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