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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Oct 21. 2022

사춘기 대비

같이 할 운동 만들기, 취미 만들어주기

언젠가 이사갈 집을 알아보러 다니다가 있었던 일이다. 단독주택이 모여 있는 동네에 급매로 나온 집이었는데, 사진이 아주 예뻐서 부동산에 연락해 주인을 만났다. 나와 남편이 거실에 들어서자, 컴퓨터로 게임을 하던 10대 아들이 엄마에게 소리쳤다. “아, 이사 안 간다니까!!” 집주인도 우리도 민망함을 감추고 서둘러 집을 둘러보았다. 벽지와 소품, 커튼과 계단에 놓인 화분까지 주인의 취향이 듬뿍 담겨 있어서, 이렇게 정성껏 꾸며놓고 왜 집을 내 놓았을까 궁금했다. 집에는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는데, 현관문 바로 앞에 침대가 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멋진 거실에 어울리지 않은 가구 배치였다. “침대가… 여기 있네요?”라고 의아해 하니 “저희 아이가 사춘기가 와서요”라는 답이 돌아온다. 대관절 아이의 사춘기와 현관 앞의 침대가 무슨 관계일까.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으니 그 어머니도 하소연을 참지 못하고 내게 쏟아내었다. 불과 1년 전에 집을 사서 신나게 인테리어를 한 이야기, 중학생이 된 아이가 ‘질 나쁜’ 친구와 어울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밤이면 그 친구들이 집앞에 와서 아이를 불러낸다는 이야기, 아이의 밤외출을 막으려 아버지가 현관문 앞에서 자기 시작한 이야기, 끝내 아이를 친구들과 떼어놓을 방법을 찾지 못해 집을 팔고 이사를 가기로 했다는 이야기까지. 우리 첫째가 초등학교 고학년을 목전에 둔 것을 알고, 그 어머니는 내게 경고인지 당부인지를 덧붙였다. 자신의 아들도 초등학생 내내 모범생에 우등생이었다고, 사춘기는 하루아침에 찾아와서 어제까지 멀쩡하던(?) 아이를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고. 진열장 가득 놓인 각종 상패와 상장을 증거로 보여주기까지 한다.

우리는 그 집을 사지 않았다. 그 동네에 산다는 ‘질 나쁜’ 학생들 때문은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은 회사가 있는 상암동을 벗어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리한 대출이 부담되기도 했고. 여튼, 이사는 못 갔지만 그 집에서 들은 이야기는 그 어떤 ‘사춘기 괴담’보다 강하게 나의 뇌리에 남았다. 현관문 앞에 덩그러니 놓인 퀸사이즈 침대가 지금도 선명하다.   

율이 11살 중반이 된 요즘, 나는 율과 함께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레슨비는 회당 4만원, 둘이 같이 해서 7만원이다. 주 1회씩 한달 하면 28만원. 식구 많은 월급쟁이에겐 적지 않은 지출이다. 율과 같이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곧 아이의 사춘기가 도래할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언젠가 아이를 혼낸 날, 율은 방에 들어가서 한참 혼잣말을 했다. 듣진 않았지만 엄마를 욕하는 내용이었겠지. 아이만큼이나 나도 속상하고 억울했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불러내서 “너 지금 뭐라고 했어?”라고 다그치기도 뭐하지 않나. 엄마가 혼낼 수 있는 것처럼 아이는 뒤에서 구시렁거릴 수 있는 일이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율은 요즘 키가 훌쩍 컸고, 몸에는 굴곡이 생기기 시작한다. 손발은 나랑 크기가 같다. 일기장을 보여주지 않고, 가족이 다 같이 마트에 갈 때 혼자 집에 남고 싶어한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다. 몇 년일지, 몇 달일지, 혹은 며칠일지도 모르겠다. “다녀왔습니다” 인사만 하고 방문 닫고 들어갈 날이. 엄마는 뭘 모른다고, 말 안 통하는 꽉 막힌 사람이라고, 앞뒤가 다른 속물이라고 생각할 날이. 이걸 피할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날이 오고야 말리라 생각하고 대비하는 게 차라리 속편하다. 하지만 대비라니. 자식의 사춘기를 대체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신뢰하는 소아정신과 의사 선생님께 ‘아이의 사춘기 때 엄마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여쭤본 적이 있다.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좀 덜 바빠야 한다, 아이의 말을 많이 들어야 한다. 바쁜 부모일수록 아이의 말을 많이 들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쉽지 않은 일이다. 바쁠수록 아이를 만났을 때 들을 말보다 해야할 말이 많기 때문이다. 밥은 먹었는지, 숙제는 했는지, 학원은 어땠는지. 의문문이지만 “네” 이외의 답은 듣고 싶지 않은 질문들이다. 아이가 그걸 모를까. 엄마가 ‘네’라는 답만을 원한다는 걸, 내가 자각하기도 전에 아이가 먼저 눈치챌 터. 들을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상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은 없다. 분주한 내 마음을 들키는 순간, 아무리 내가 듣고 싶어도 아이가 말을 할 것 같지가 않다.

 바쁠 수도 없고, 아이의 말을 많이 들을 자신도 없다. 율이 어느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굴면 어쩌나, 불쑥 두려워졌다. 그래서 테니스에 등록했다. 엄마랑 말하기 싫어하는 ,  대신 공이라도 주고받을  있었으면 해서. 이것이 내가 생각해  ‘사춘기 준비이다. 통할지  통할지는  알게 되겠지. 지금은 그저, 볼머신에서 튀어나오는 공에 허둥대는 서로를 우스워하며 깔깔대는 것으로 만족한다.

내가 은밀히 준비하고 있는 ‘사춘기 대비책’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아이에게 취미 만들어주기이다. 불행히도 율의 취미는 돈이 좀 많이 드는 운동이다. 피겨 스케이트.  <스피닝>이라는 그래픽 노블을 읽은 게 계기였는데, 어릴 때부터 피겨 선수로 생활하다 그만둔 주인공의 자전적 이야기이다. 피겨 레슨비가 어찌나 비싼지 지불할 때마다 ‘그만두고 다른 걸 하면 어떠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꾹 참고 있다. 율이 얼음 위에 있는 시간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피아노나 수영이 취미가 되길 바랐지만 그건 내가 이루지 못한 욕심의 투영이었을 뿐, 아이는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 말고 이걸 좋아해 봐”라고 말했다가 자칫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게 될까 봐 두려워서, 좋아하는 피겨를 계속 좋아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내가 바라는 건 하나다. 그토록 좋아하는 피겨가 율의 마음에 ‘소도’가 되어주길. 공부에 지치고 친구 관계에 상처받을 어느 날,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을 만큼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사춘기의 흔한 날들에 도망칠 구멍이 되기만 한다면, 지금 들이는 돈이 전혀 아깝지 않겠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은 그 구멍을 만들어 주는 일 뿐이니까. 며칠 전 율에게 피겨의 매력이 뭐냐고 물었다. 율은 잠시 생각하다가 “바람!”이라고 말했다. 땅에선 느낄 수 없는 바람을 얼음 위에서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거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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