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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Jul 24. 2016

'아이를 낳아야 어른이 된다'는 말에 대하여 (2)

<뉴스타파>를 후원합시다 ^^

‘쿨병’에 걸려 살았던 적이 있다. (지금도 완전히 벗어났다고는 말 못하겠다.) ‘쿨병’의 징후, 여럿 있겠지만 내 경우는 잘 모르는 것도 다 안다는 듯이 말하며 어떤 문제가 생겨도 짐짓 태연한 척 “이런 일 한두 번 겪나? 원래 이렇잖아, 몰랐어?” 하는 식으로 대응하는 증상이었다. 모든 일에 미적지근하게, 세상 일을 풀샷으로 바라보며, 관조하듯이.


내가 조금 변했다고 느낀 건 언젠가 꾸었던 꿈 때문이다. 낮에 읽었던 기사 한 토막이 악몽으로 등장한 적이 있었다. 인도에서 천민 계급의 남자와 농민 계급의 여자가 사랑에 빠져 도망을 쳤는데, 마을 원로들이 재판을 열어 남자의 두 여동생에게 ‘윤간형’과 ‘나체 행진’ 판결을 내렸다는 기사였다. 여동생들은 각각 23살, 15살이었고, 마을을 떠나 도망 중이라고 했다. 이 끔찍한 이야기가 꿈으로 이어졌다. 꿈 속에서 마을 사람들은 횃불을 들고 밤새 이 자매를 찾아다녔고, 궁지에 몰린 자매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다에는 커다란 배가 떠 있었는데 두 자매가 바다에 몸을 던지는 순간, 배에서 남자 한 명이 그녀들을 구하러 뛰어내렸다. MBC 아나운서 출신의 방송인 오상진씨였다. 상진 선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게 꿈이라는 걸 알았다. 그날 위기에 빠진 인도 여자들을 구해야 하는 꿈에 뜬금없이 소환되어 고생이 많으셨다. 


새벽에 깨어 한참을 울었다. 그 여자들은 잘 도망치고 있을까. 그 잔인한 형벌을 피할 방법이 과연 있을까. 가슴이 답답했다. 4000킬로미터도 넘게 떨어져 있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땅의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들의 일에 마음이 저릿하여 꿈에까지 나올 만큼, 나는 그 정도로 오지랖 넓은 인간이 아니었다. 나는 이게 아이를 낳고 내게 일어난 변화임을 안다. 말하자면, ‘내 일’처럼 느껴지는 영역이 넓어졌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세상사에 감정적으로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됐다고 해야 할까. 


요즘 한창 이슈가 되는 삼성 이건희 회장의 불법 성매매 뉴스에 관해 몇몇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어떤 남자 어른이 “재벌들 이러는 거 몰랐어? 새삼스럽게 왜 그래?”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과거의 나라면 비슷하게 반응했을 것이다. 뭘 호들갑스럽게 그래, 이러다 곧 묻히겠지, 대한민국 몰라? 시크하게, 체념조로. 그런데 이번엔 그 남자 어른의 쿨한 발언이 참 불편했다. 


‘쿨병’에서 ‘핫병’으로 증상이 바뀐 듯하다. 부조리한 사회 문제, 특히 자식같은 아이들이 얽힌 일에는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올라오고 발작처럼 화가 난다. 수학여행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학생들, 가습기 살균제로 목숨을 잃은 아이들, 강남역에서 살해당한 젊은 여자,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사고를 당한 19살 직원, 그리고 우리 사회의 많은 구조적인 문제와 밀접하게 얽혀 있는 거대 재벌기업의 추악한 민낯까지. 언제든 내 자식도 겪을 수 있는 일, 내 자식에게 깊숙이 영향을 미칠 일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차라리 내 일이라고 생각했으면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동요하지는 않겠지. 엄마에겐 내 일보다 무서운 게 자식 일 아니겠는가. 


윤이형의 단편소설 <굿바이>는 독특한 설정을 바탕으로 한다. 갓난아기가 아무 것도 모르는 순백의 상태로 태어나는 이유는 천사가 태중의 아기에게 찾아와 지혜와 지식을 가져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복중의 태아가 지혜를 잃기 전, 엄마에게 건네는 말이 있다. 

[나를 지키기 위해 당신은 기꺼이 이름을 바꾸려 할 것이다. 처음 보는 종교의 사원에 들어가 절을 하려 들 것이다. 가슴 뛰지 않는 것에 활짝 웃거나 동의하지 않는 것과 악수를 할지도 모른다. 베어야 할 때 칼집에 칼을 도로 넣고, 대답해야 할 때 침묵할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을 당신은 반성 없이 소명처럼 받아들일 것이다. 어린 당신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어떤 어른들처럼, 명쾌하게 말할 수 없는 사정을 몸속에 품고 무거운 빛깔의 덩어리가 되어가는 당신이 내게는 보인다. 내 귀에는 들린다.] 


자식 때문에 부모는 때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한다. 자식 일에 쿨할 수 있는 부모는 없으니까. 이건희 회장은 자식에게 경영권을 주기 위해서 업무상 배임을 했다는 판결을 받았다. 어떤 국회의원은 장애가 있는 자식의 대학 합격을 위해 관계자들에게 ‘특별한 부탁’을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반대 방향으로 ‘뜨거워지는’ 부모도 있다. 영국의 전 총리인 데이비드 캐머런은 희귀병을 앓았던 아들 때문에 보수파임에도 복지와 의료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대통령에 당선된 후 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때는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았지만 너희들이 태어난 후에야 너희들에게 행복을 주지 않고서는 내 인생이 완벽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면서 "너희 둘과 이 나라 모든 아이들에게 최대한의 기회와 행복을 주려고 대통령에 출마했다"고 썼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쿨하게 살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5년 전 하율이를 낳으면서, 이번 생에 그렇게 살기는 글렀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은 내가 뜨겁게 움직이는 방향이 자식 앞에 부끄럽지 않기를 바란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보도를 감행한 최승호PD님과 기자님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뉴스타파>에 후원하는 금액을 늘렸다. 나의 두 딸들 덕분에 세상을 대하는 내 태도에 조금이나마 온기가 돈다. ‘아이를 낳아야 어른이 된다’는 말을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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