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는 일본어를 배우고 있다. 배운다 해도 하루에 듀오링고를 10분 하고, 일주일에 한 번 구몬 학습지를 벼락치기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공부라서 사라지는 것이 아까워 작년 겨우렝 JLPT N2를 보았다. 꽤 높은 점수로 합격했기에 3개월 후에 있을 N1 시험을 무작정 신청했다.
여기까지 오고 보니 내가 일본어를 왜 하는지, 일본어를 해서 얻는 것이 무엇인지 이유를 찾고 싶었다. 시험에 접수했으니 앞으로 석 달은 자투리 시간을 모조리 일본어에 쏟아야 한다. 별 것 아닌 듯하면서도 부담스럽다. 세상에는 들을 팟캐스트도 많고 읽고 싶은 책도 매일 생겨난다. 슬프게도시간이 부족한 직장인은 재미를 취사선택해야 한다.
온갖 재미 중 일본어를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 시험을 보면 자격증이 나온다. 보고있으면 며칠은 기쁠 것이다. 둘, 응시료를 내었으니 좀 더 열심히 공부를 한다. 평소에 놀던 식으로 공부 흉내를 내어 봐야 하루만 지나도 잊어버리니, ‘깊은 공부’ 또한 평소에는 얻기 어려운 재미이다. 그러나 이 둘은 구태여 시험 공부를 하는 이유이지 외국어 공부를 하는 이유는 아니다.
일본어는 외국어 중에서도 특이하다. 오타쿠의 공용어다. 일본어로 된 오타쿠 컨텐츠가 워낙 많으니 일본어를 알면 덕질의 범위가 넓어진다. 지금의 일본어 공부도 그렇게 시작했다. 건담 수성의 마녀를 여러 번 돌려보다가, 일본어가 슬슬 들리는 것이 아까워 중학생 때 하다 말았던 구몬을 다시 시작했다. F단계에서 시작한 구몬이 벌써 L 단계, 다음이면 졸업이다. 그런데 나는 정작 지금은 덕질을 하고 있지 않다. 영상 보는 게 귀찮은 세대라 드라마는커녕 애니메이션도 찾지 않는다. 새 건담 시리즈가 나왔지만 일부러 찾아볼 생각도 없다. 덕질을 하는 중일 때는 세상에 그보다 재밌는 것이 없지만, 덕질이 끝나고 나면 그런 시간낭비도 없다.
여행을 갈 수도 있겠다. 일본은 가깝고 아기자기하다. 여행을 좋아했다면 두어 달에 한 번씩은 갔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미래를 계획하기 귀찮아 여행조차 미루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1년에 일주일도 안 있을 곳을 위해 언어를 붙들어매는 것이 이상하다. 영어라는 공용어를 놔두고 말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익힌 일본어가 아까워 산 정상의 표지석처럼 N1을 따고 넘어가자는 것이다. 이런 시험 하나로 언어를 정복할 수는 없다. 등산의 난이도와 비교하면 동네 뒷산과 다름없다. 등산의 비유와 어울리게도, 이런 식의 시험 공부는 그만두자마자 다 잊어버릴 것도 알고 있다. 올라온 산을 내려가는 것처럼.
굳이 일본어를 써먹고 싶다면 친구에게 만화책 원서나 빌려볼 일이다. 그러다 언젠가 또 덕통사고를 당하면 일본어를 한참 공부했던 지금 시기에 감사하겠지. 써먹는 데 집착하면 허무해진다. 경험의 하나하나에 재미를 찾아야 한다. 그것도 시험에 합격한 후에나 고민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