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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Apr 15. 2023

치매를 보는 전혀 새로운 방식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 독후감

    누군가가 치매라는 진단을 받는 순간 온 세상은 그를 치매 환자라는 프레임으로 본다. 이런 고정관념은 환자를 사랑하는 가족들도 예외가 아니다.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은 의사도, 가족도 아닌 치매를 앓는 사람의 시각으로 써진 글이다. 그동안 보호자의 관점에서 치매환자를 돌보는 이야기는 많이 발표되었지만 환자 본인이 쓴 글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뇌세포가 점차 손상되는 치매라는 병의 성격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누군가가 치매 진단을 받은 후에는 아무도 그의 의견이나 느낌을 묻지 않는다는 잔인한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 아빠의 경우만 보더라도 의사는 반응이 굼뜬 아버지 대신 엄마나 나와만 대화했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뿐 본인도 의사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데 그곳에 없는 사람처럼 취급받았던 아빠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은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치매에는 치료약도 없고 우연히 낫는 법도 없고 더 나빠질 일만 남았다는 생각 때문에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엄연히 살아있는데도 죽은 사람 취급을 받는다.    

    저자인 웬디 미첼은 치매를 진단받은 후에도 우리의 삶은 계속될 수 있으며, 또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사는 환자가 무엇을 할 수 없는가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녀는 치매환자라 할지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여전히 많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안전을 이유로 환자를 집이나 시설에 묶어놓기보다는 그가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여 환자의 지존감과 삶의 질을 높여주어야 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 지원의 범주에는 치매 친화적인 환경 조성,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있도록 돕는 것, 주변사람들이 환자를 질병을 앓는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녀는 58세에 조기 발병 치매 진단을 받았다. 자기에게 찾아오리라고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어떤 일을 당할 때 누구나 그렇듯이 그녀는 커다란 두려움에 빠졌다. 게다가 그녀는 이혼 후 싱글 맘으로 살아왔고 아이들은 다 독립했기 때문에 누구에게 의지할 처지가 못 되었다. 치매라는 병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이 병과 동거하기 시작했던 미첼은 할 수 있는 한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분투한다.

    진단 후에도 7년 동안 그녀는 여전히 혼자 살면서 치매와 함께 사는 삶에 적응해갔다. 동시에 그녀는 꾸준히 치매라는 질병에 대해 공부했고 SNS를 통해 치매를 앓는 사람들과 소통했다. 이 책에서 그녀는 서서히 진행되는 치매가 자신과 동료 환자들에게 야기한 모든 종류의 변화를 서술한다. 감각이 왜곡되었고, 관계가 변했으며, 당연히 의사소통 방식도 변화되었다. 이 책을 쓴 목적은 자신과 비슷한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길잡이가 되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치매를 사회적 사망으로 생각하는 사회의 인식을 바꾸고자 함이었다.

웬디 미첼과 그의 첫번 째 회고록 『내가 알던 그 사람』

    내가 이 책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두 번째 책이고 첫 번째 책은 2018년에 『내가 알던 그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는데 나는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을 읽고서야 그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내가 미첼과 같은 치매 당사자의 목소리를 미리 들을 수 있었다면 내 아버지를 대하는 방식이 좀 달랐을 것이다. 언어 이해 속도가 느리고 발화 속도가 느리다고 그 사람이 생각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의견이 없는 것도 아니건만 나는 그렇게 오해했다. 나는 아빠를 지적 장애인 또는 정신질환자로 취급했다. 모든 치매의 증상과 진행속도가 똑같지는 않다고 하지만 나는 아빠의 정신이 최악의 상태라고 간주했다. 마지막 시간을 요양병원에서 보낼 때 아빠의 손과 발이 굳어가는 것을 보면서 아빠의 정신까지도 화석화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는 것이 마음 편했다. 식물인간 아니 광물인간 같은 아빠는 그저 숨만 쉬고 있을 뿐 아무 생각도 없다고,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믿고 싶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슬픔과 죄책감을 느꼈지만 치매를 겪은 당사자가 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내 아빠의 간병에는 실패했으나 남아있는 다른 노인들과 나, 그리고 나의 배우자에게 이 병이 찾아온다면 좀 더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은 계속되는 것이니까. 치매환자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엘리베이터에서 팔다리가 불편하신 남자 어른을 만났다. 전 같았으면 피차 곤란한 상황이라 생각하고 최대한 시선을 피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운동 열심히 하시네요.”하고 말을 건넸다. 병이나 장애가 아니라 사람을 보라는 미첼의 말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어른의 얼굴이 밝아졌다. 본인이 일흔여섯이라며 나에게 오십 정도 되었냐고 물으셨다. 육십이 넘었다고 웃으며 대답했더니 “그럼 내가 오빠네.” 하셨다. 아마도 무척 오랜만에 장애인이나 노인이 아닌 이웃사람으로 대접받아서 기분이 좋아지신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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