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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May 18. 2023

감정의 억압에 대하여

『슬픔의 위안』을 읽고

    나는 감정을 억압하는 편이다. 자랄 때 감정을 이해받거나 수용 받지 못 해서일 것이다. 나는 잘 우는 아이여서인지 어렸을 때 ‘쪼다’라고 놀림 받는 일이 잦았다. 이 말은 ‘제구실을 못하는 어리석고 모자라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는 모자라는 아이라서 ‘쪼다’로 불렸고, ‘쪼다’라고 불릴 때마다 속상해서 울었다. 설상가상으로 내 엄마는 “울지마라!”, “짜지 마라!”라는 말로 내 눈물을 막았기에 나의 슬픔과 억울함은 표출되지 못하고 늘 억눌려 있었다.   

    감정을 회피하고 이성으로만 기능하는 것은 이 사회가 권장하는 일이기도 해서 나는 감정을 억압하려고 노력하며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울음은 혼자서만 울었고, 분노 같은 감정은 스스로에게 아예 허용하지 않았다. 우는 것은 바보짓이며, 화를 내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었다. ‘화내는 것이 허용되는 예외적인 존재는 어른들이고, 그들은 아이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다’라는 신념이 형성되었다. 내 엄마가 70대였을 때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기는 화를 낸 적이 없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듣고 나는 정말 놀랐다. 엄마는 정말 그렇게 믿는 것 같았다. 무서운 인상을 쓰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 화내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었을까? 엄마는 화를 낸 적이 없으니 그런 엄마를 무서워하는 나는 이상한 딸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 엄마는 거의 화를 내지 않는다. 타인을 흉보는 것도 삼간다. 엄마가 화를 내거나 타인을 흉볼 때 내가 더 화를 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나에게 가장 쉬운 감정 표현은 화내기가 되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슬픔이 느껴지지 않아서 절망스러웠다. 내가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슬픔을 느끼고 싶어서 책을 읽고 드라마를 보았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는 책을 읽어도 나의 슬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 실격>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는 슬픔이 조금 느껴졌다. 늙은 아버지를 보내는 주인공에게 감정이 이입되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슬픔은 가식처럼 느껴졌다. 엄마의 행태는 『슬픔의 위안』에서 감상벽으로 표현된 행동과 유사했다. 슬픔을 연기하는 느낌, 자신이 이렇게 슬퍼한다고 과시하는 느낌이었다. 


“뼈에 사무치도록 가슴이 아픈 사람은 죽은 남학생의 룸메이트였던 절친한 친구였다. 그는 주변에 홀로 떨어져 앉아 있었다. 슬픔을 가눌 수 없어서 무대 중심에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이들은 마음이 따뜻하고 위선적이지 않아서 절대 특별한 관심을 받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반면 감상벽은 과시가 심하다. 감상주의자들은 자신을 슬프게 하는 것보다 자신이 슬픔을 느낀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자신이 무엇을 느낀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서 그 감정을 정당화하려 한다.”      


    책의 구절을 복기하려니 또 화가 난다.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신 후 사흘 내내 장례식장에 머물며 손님들을 맞았다. 장례식에서 주로 보는 광경은 망자의 연로한 배우자가 가족실에서 쉬고 계시거나 집에 계시는 것이었는데 우리 엄마는 달랐다. 식당에 있으면서 어떤 손님이 오고 가는지 다 체크했다. 게다가 친척이나 지인들과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모습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내내 장례식장에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일 처리를 잘하도록 도와주고 싶어서였기도 했을 테지만 내게는 부정적으로만 생각되었다. 어떤 유력인사들이 다녀가는지, 그래서 이 장례식이 얼마나 성대해 보이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저자들이 인용한 시몬 드 보바르의 말은 엄마의 행동을 비판한 나의 태도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삶과 죽음을 통합하려 애쓰고 합리적이지 않은 무언가에 직면해 합리적으로 행동하려 애쓰는 것은 헛된 일이다. 각자 자신의 들끓는 감정 속에서 버틸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또 버텨내야 한다. 나는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에 수많은 소망을 품는 것도, 아무 소망을 품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여동생이 어머니를 아름답게 꾸며드리고 싶어 했든 어머니의 결혼반지를 가지고 싶어 했든, 동생의 반응을 나 자신의 반응처럼 기꺼이 받아들였어야 했다.”      


    슬픔은 연대를 통하여 타인과 공유할 수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럽고 건강하게 극복되어질 것 같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나는 엄마와 공유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내 엄마와 감정을 공유하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를 하거나 누군가를 걱정할 때 정도이다. 나는 설렘이나 기대, 불안이나 슬픔, 자부심이나 사랑은 엄마와 나누지 못한다. 그런 감정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하다.   

슬픔은 연대를 통하여 타인과 공유되어질 때 가장 건강하게 극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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