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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Nov 12. 2024

우리 사돈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부인을 생각하며

  나의 큰사위는 손이 귀한 집안의 외아들이다. 내 딸이 남편감을 고른 기준은 딱 두 가지다. 잘 생겨야 하고 자상해야 한다는 것. 이 기준은 딸의 외할아버지이자 나의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다. 딱 외할아버지 같은 남자를 딸은 원했던 것이다.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가 생선 뼈를 발라주는 것에 반해서 딸은 결혼을 결심했다. 대한민국에서 자상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나의 아버지는 늦깎이 공부를 하는 딸을 위해 외손녀를 많이 돌봐주셨다. 

  내 딸에게 외할아버지의 판박이로 보였던 사위는 강릉 사람이었다. 사위의 어머니는 처녀 적에 산부인과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는데, 그 병원에 아이 낳으러 왔던 분이 자기 동생의 색싯감으로 점 찍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강원도 노총각에게 시집온 경기도 처녀는 귀한 아들을 얻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단산했다. 아들을 사교육 한번 없이 명문사립대로 보낸 사돈은 아들이 결혼할 때까지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었다. 

  피차 결혼 비용을 최소한으로 하기로 하여 우리는 사돈댁에 이불 한 채밖에 안 보냈는데, 사부인이 우리 집에도 이불을 보내주셨다. 본디 이불은 시집가는 색시가 보내는 것인데 어떤 의미로 주시는지 의아해하는 나에게 사부인은 “사돈은 아들이 없으니 이불 받으실 일이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었어요.”라고 하셨다. 집안의 큰일을 처음 치러 보는 나로서는 사부인의 마음이 얼마나 큰 것인지 잘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 딸이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갑상샘암에 걸렸다. 그때 사부인은 내 딸을 위해 병원에서 2박 3일을 간병해주셨다. 당시 나는 중병에서 회복되는 중인데다 막내가 어려서 사부인이 자발적으로 간병인을 자처하셨다. 병문안을 갔던 나의 시누이는 내 사부인의 인상이 정말 좋더라고 했다.

  사부인은 사돈과 며느리를 이렇게 아껴주는 분이었다. 그런데 딸은 방사선 치료가 끝나기 무섭게 임신 소식을 전해왔다. 태아가 잘못되었을까 봐 걱정했던 몇 달이 지나고 딸은 무사히 출산했다. 사장어른과 사부인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손이 귀한 집안이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외손녀의 돌잔치가 한 달도 남겨놓지 않고 사장어른이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나는 사부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좋으신 분이 이런 슬픔을 겪으셔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몇 년이 흐르고 사부인은 옛 경험을 살려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하셨다. 심심하지 않고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 아주 만족스럽다고 하셨다.

  이번에 문체부 후원으로 개최되는 컬처 트립 행선지가 강릉과 전주라는 것을 알고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참가를 결정했다. 혼자 계신 사부인을 언젠가 한 번 만나러 가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번이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사부인을 만나기 위해 강릉을 방문했다고 하면 사부인이 이런저런 신경을 쓰실까 봐 조심스러웠다. 강릉에 오는 길에 사부인을 잠깐 뵙고 싶다고 하니 기꺼이 시간을 내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하여 사부인은 강릉 여행의 오후 시간을 우리 일행들과 함께했다. 솔밭 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강릉에 가기 직전에 사부인이 협심증 증상으로 밤에 응급실에 갔던 일은 딸을 통해 들었었다. 그러나 내 딸은 시어머니의 건강 문제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아들과 며느리 걱정시키지 않으려는 사부인의 배려 때문이었다. 

  이날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부인이 지금까지도 갱년기 증상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사부인과 비슷한 인생 경로를 지나는 사람이라 자식들보다는 편하게 말씀해주신 것 같았다. 불편한 노인들 돌보는 일을 하고 있으니 본인이 아픈 것을 말할 처지가 못 되는 데다가, 아플 때 아프다고 호소도 하고 의논도 할 수 있는 남편이 없다는 것이 그녀를 더 힘들게 하였으리라.       

  혼자 있는 시간에 갑자기 심장이 조여와서 119에 전화를 해야 하나 고민했던 일, 결국 응급실에 갔는데 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해서 당황했던 일, 응급실에서 집에 올 때 택시를 탔는데 정신이 없어서 아들 명의로 된 카드를 쓰는 바람에 아들이 알게 되어 후회했다는 이야기 등을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는 잘하셨다, 아들이 당연히 알아야 한다며 사부인을 위로했다. 사위의 성화로 사부인은 서울 A병원에서 심혈관 정밀검사를 받기로 예약이 되었는데 그 날짜를 이틀 앞두고 우리 여행팀이 강릉에 간 것이었다.  

  나는 그 시점에 사부인을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사부인이 내게 밥을 사주신다는 것을 만류하고 우리 일행의 식사 장소로 함께 가시자고 권했다. 다음날이 내 생일이었기 때문에 미역국을 사주신다고 했던 것인데 마침 우리 일행이 가는 식당 메뉴 중에도 미역국이 있었다. 나는 뻔뻔하게 “나랏돈으로 먹는 거니까 괜찮아요.” 하면서 사부인을 식당으로 이끌었다.

  사람들은 내가 사돈과 격의 없이 이야기하고 함께 식사하는 것을 부러워했다. 사돈 덕에 내가 성격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 같아 어깨가 으쓱했다.


  식당에서 반찬으로 나온 것 중에 처음 보는 음식이 있었다. 대전에서 온 우리 일행은 모두 그 음식을 궁금해했다. 그것은 옥수수 범벅이라는 것이었는데 껍질 깐 옥수수와 팥을 삶아서 살짝 간을 한 것이었다. 반찬이라기보다는 죽에 가까운 음식이었는데 달짝지근하니 맛이 좋았다. 옥수수 껍질을 어떻게 깐 것인지 모두들 신기해하니까 사돈은 제가 나중에 보내드릴게요, 하셨다. 

  얼마 후에 우리 집으로 커다란 꾸러미 택배가 왔다. 사돈이 보내주신 깐 옥수수였다. 나는 사돈의 레시피 대로 옥수수 범벅을 만들어보았다. 말린 옥수수는 워낙 단단한 재료라 물에 한참 불려야 해서 금방 만들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팥도 오래 불려 따로 삶았다. 그렇게 두 가지를 따로 익혀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하니 평소에 먹어보기 힘든 별미였다. 나는 그렇게 만든 옥수수 범벅을 팔순 맞은 삼촌에게도 갖다 드리고 몸이 아픈 친구에게도 갖다 주었다. 옥수수가 어찌나 많았던지 나중에는 밥에도 넣어 먹었다.

  컬처 트립에 참가한 덕분에 7년 만에 사돈을 만났고, 그녀와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알게 된 옥수수 범벅이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의 지인들에게까지 그 맛이 전해졌다. 무엇보다도 옥수수 범벅을 전할 때마다 사돈과 나의 이야기도 함께 전할 수 있어서 흐뭇했다.     


  그렇게 받기보다 주기를 좋아하는 우리 사돈이 어깨 회전근개 파열로 수술을 받게 되셨다. 의료파업 때문에 강릉에 어깨 전문 의사가 없어서 서울로 와서 수술을 받으셨는데 나는 내 딸이 입은 은혜와 내가 받은 사랑을 어떻게 보답할까 궁리하다가 친정엄마에게 부탁하여 밑반찬 몇 가지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내가 직접 만들어드려야 의미가 있건만 밑반찬은 나보다 친정엄마가 훨씬 잘 만드시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사돈이 병원에 계신 기간에  마침 내 친구 아들 결혼식이 서울에서 있어서 가는 김에 병문안을 가야겠다 생각했다. 결혼식장에서 지하철로 네 구역만 가면 병원이었다. 딸에게 미리 말하지 말라고 했건만 딸은 말을 했고, 사돈은 내가 오는 것을 극구 사양하신다고 했다. 환자복을 입은, 풀어진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는 것이었다. 사돈이 외출할 때는 언제나 머리를 단정히 손질하시고 화장도 곱게 하시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그 점을 존경해왔지만, 병원에서 치료받는 동안에도 단정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 사돈의 마음이 이해되면서도 짠했다.

  친정 언니나 조카들의 병문안도 사양하셨다고 하는 말을 들으니 누구에게도 약하고 추레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일생이 어떠했을지가 상상이 되었다. 그녀는 평생 흐트러짐 없는 요조숙녀로 살아오셨을 것이다. 그런 분을 내 기분 내키는 대로 찾아가서 불편하게 해드리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다. 내가 찾아가서 사돈이 위로를 받는 것보다 사돈의 체면이 깎이는 것이 더 크다면 가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다. 

   내 경우에는 병원에 입원했을 때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 좋았다. 원래가 단정한 차림새로 다니는 사람이 아닌 나는 아프다는 핑계가 있으니 오히려 복장에 신경 안 써도 되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입장만 생각하고 사돈을 찾아가려 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은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사돈을 통해 새삼 깨닫는다.

  하지만 우리 사돈이 조금만 마음을 편히 잡수셨으면 좋겠다. 때로는 약한 모습도 보이고 모자란 모습도 보이면서 사람들의 도움을 기꺼이 받으시면 좋겠다. 특히 이제는 자식들을 좀 더 의지하시고 마음 편히 섬김을 받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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