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일기 : 우리가 함께 지나온 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잊고, 잊어버린 것들을 그리워한다. 실체 없이 감정만 남은 그리움은 제대로 추억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더 우울하다. 수십 년을 산 고향의 길, 한참을 보지 못한 사람의 얼굴, 다신 들을 수 없는 목소리.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쉽게 사라지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만약 잊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면 미리 노력해야만 한다.
어릴 적부터 죽음은 항상 내 가까이 있었다. 밤마다 옆에 잠든 사람의 숨을 세어보면서 내게는 세상을 유심히 보는 버릇이 생겼다. 동생의 얼굴은 잊어버리더라도, 동생의 속눈썹이 어떤 모양인지는 잊어버릴 수 없도록. 이를테면 선택과 집중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과거를 돌이켜보면 기억나는 건 사소한 순간이다. 집에서 챙겨 온 사과를 친구들과 학교 계단 아래서 나눠 먹었던 기억이나, 텐트 안에서 깜빡이는 불빛을 보며 눈이 쌓이는 소리를 들었던 순간처럼 짧고 사소한 것들. 중학교 때 몇 반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하굣길 어디서 아카시아 향기가 났는지는 기억하고 있다. 사진 밖 할아버지의 얼굴은 잘 떠오르지 않지만 할아버지의 울퉁불퉁하던 손은 떠올릴 수 있다. 그게 내가 기억을 오래 보관하는 방식이다.
유심히 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건 물론 아니다. 무언가를 기억하는 데에 가장 좋은 방법은 기록하는 것이다. 잊어버리기 전에 받아 적은 감정은 훗날 내 기억을 대신해준다. 어떤 사람이 글을 쓰는지에 대해선 수많은 말이 있지만, 나에게 한 마디만을 고르라고 한다면 "기억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 글을 쓴다고 말할 거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김연수는 한국에서 가장 성실하게 세상을 기억하는 사람이다.
<시절일기>는 김연수가 십 년 간 쓴 수필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그러나 그 글들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 배열되어 있는 건 아니다. 총 5부로 각각 묶인 글들 중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키워드가 있다면 역시 '애도'다. 김연수는 그가 끝없이 상실과 애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타자의 고통 앞에서 문학은 충분히 애도할 수 없다. 검은 그림자는 찌꺼기처럼 마음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애도를 속히 완결 지으려는 욕망을 버리고 해석이 불가능해 떨쳐버릴 수 없는 이 모호한 감정을 받아들이는 게 문학의 일이다. 그러므로 영구히 다시 쓰고 읽어야 한다. (p. 49)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동물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애도를 빨리 완결 지으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직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슬픔이 잊히면, 그 자리에는 불편함이라는 이름의 찌꺼기만 들러붙기 때문에. 그러나 애도는 얼마나 걸리더라도 충분하지 않다. 한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는 반드시 한 사람만큼의 자리가 남아서 우리는 바람이 불 때마다 그 빈자리를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문학은 끊임없이 상실을 반추해야 한다. 성실하게 쓰고 읽는 일만이 우리에게 기억을 되살려주며, 누구도 잊어버린 것을 애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수필집을 읽는 데엔 여러 방식이 있겠지만 나는 이 책에 실린 글을 두 종류로 나누어 읽었다. 2014년 4월 16일 이전의 글과 그 이후의 글. 작가는 수년에 걸쳐 '그 날' 이후의 슬픔을 토로한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슬퍼하기만 하는 건 아니다. 그는 팽목항에 대해, 광장에 대해, 유가족을 좌빨이라 부르던 사람들과 대통령과 슬퍼하던 사람들과 또 자기 자신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한다. 그 자신이 잊어버리지 못하도록, 동시에 읽는 우리도 잊을 수 없도록. 애도는 언제든 결코 충분치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쓰고 읽어야 한다. 그건 애도를 완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잊어버리거나 가슴에 묻지 않고도 견디기 위해서다.
어떤 슬픔으로도 그 타자를 애도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타자에 대한 윤리의 기본은 그냥 불편한 채로 견디는 일이다. 이렇게 견디기 위해서 소설가들은 소설을 쓰고 감독들은 영화를 만들고 시인들은 시를 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견디기 위해서 사람들은 소설과 시를 읽고 영화를 본다. 애도를 완결 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애도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들은 날마다 읽고 써야만 한다. (p. 43)
물론 그가 애도와 슬픔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문학에 대해, 삶에 대해, 그 자신에 대해 끝없이 사유하고 기록한다. 그러나 그 날 이후 쓰인 어떤 글을 읽어도 슬픔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마 우리가 다시는 2014년 4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에 오면서 딱 한 권의 책만 들고 올 수 있었다. 실은 짐이 너무 많았던 탓에 그 한 권도 들고 오지 못할 뻔했지만, 우기고 우겨서 겨우 한 권이 내 가방에 실렸다. 지금 얘기하고 있는 책인 <시절일기>다. 많은 책들 중에서 이 책을 고른 이유는 하나다.
김연수가 성실하게 매일 써 내려간 십 년간의 기록은 내게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종종 글을 쓰는 게 귀찮고 번거로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를 떠올리려고 애쓴다. 기억하고 싶기 때문에, 기억하기 위해서 계속 써야겠다는 마음을. 바람이 불 때마다 느낄 수 있는 빈자리를 견디기 위해서라도 써야 한다는 다짐을. 이 책은 내게 그런 감정들을 되살아나게 한다. 작가가 애도하는 대상이 나의 슬픔과 다르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프랑스의 바람이 점점 쌀쌀해지는 계절이다. 홀로 떨어져 살아가다 보면 그리워할 것들만 늘어난다. 부재가 존재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가 말했듯, 우리는 사랑이 사라진 후에야 사랑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삶에 사랑이 있는 한 애도는 끊이지 않는다. 부재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글을 쓰고 노래를 짓고 다시 읽고 듣는 것뿐이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이별은 노래가 된다. ¹
1) 김연수, 시절일기, 레제, 2019, 115쪽